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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55화 (155/275)

155화

아리아 장벽은 겉으로 보기에 웅장한 성이었지만. 그 내부는 지금 난리도 아니었다. 애초에, 패잔병들이 모여서 휴식과 재편성을 진행 중이다 보니, 성벽 안쪽의 분위기는 좋으려야 좋을 수가 없다.

“이쪽! 부상자가 실신했어, 빨리 와라!”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환자들이 시시각각 그 목숨이 위협받고 있었고, 가벼운 부상을 입은 병사들은 공포와 피로에 굴복해 웅크리고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갑자기 눈을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팔이나 다리가 절단된 채 붕대를 휘감은 병사들이 비척거리며 후방으로 빠질 준비를 하고, 후송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죽은 병사들의 시신을 향해 사제가 기도를 올린다.

“썩 좋은 분위기는 아니지?”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코랄린 관문에서 후퇴한 병력들이 우선적으로 도착했지 않습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친구들은 제국군의 공세를 받아내고, 거기에 더해서 썩은 내 풀풀 날리고 고름 질질 흘리는 하이랜더들의 시체를 마주한 다음 패주한 녀석들이다. 그런 경험을 한 상황에서 낄낄거리며 웃을 수 있으면 그건 일류를 넘어서 정신병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지 않을까.

“후퇴를 거듭하는 예비 거점의 병력들도 사기는 지금 아리아 장벽 안에 머무르는 병력들과 비슷할 거야.”

계속해서 지는 싸움만 해왔을 테니까. 이후 합류하는 병력도 멘탈이 제대로 붙어있지는 않을 거다.

“어차피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는 건 각오하고 저지른 일입니다.”

그래도, 계획에 없던 후퇴를 하는게 아니기 때문에 탈영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을 아닐거다.

“피난민들입니다! 숫자는 약 50명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피난 행렬에서 사정이 생겨 잠시 떨어져 나갔던 무리라고 합니다!”

그 말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벽 위로 올랐다. 아리아 방벽 아래 땀과 땟국물에 절은 피곤한 표정의 백성들이 짐을 짊어지고 우리가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찬찬히 훑어보다가 코웃음쳤다.

“이 여자가 또 씨알도 안 먹힐 개수작을 부리고 있네.”

뭐, 50명 정도라고 한다면 뒤로 돌려볼 만하지. 내 중얼거림을 들은 미로스가 응? 하는 소리를 냈다. 나는 뒤편에 있는 병사를 보고 말했다.

“창고에 가서 뭘 좀 가져와줘.”

말을 마친 나는 귓속말로 녀석에게 뭔가를 중얼거렸고, 내 말을 들은 병사가 경례를 하고는 곧바로 창고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잠시 뒤, 녀석이 내 쪽으로 천 주머니 두 개를 건네주었다. 나는 그 주머니를 받아들고 내용물을 확인한 다음, 곧바로 그 주머니를 성벽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에게 던졌다.

“야, 둘 중에 뭐가 기장 같냐? 말해봐.”

한쪽 주머니에는 기장이 들어있고, 다른 주머니에는 조가 들어있다. 농사를 지었다면 저 두 개를 구분하지 못 할 리가 없다. 설사 자기가 직접 키워보지 않았다 해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곡물이니까, 두 개의 구분을 하지 못할 리가 없지.

성문 앞에 서 있던 녀석들이 멍하니 주머니 안의 내용물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그 사이, 성벽 위에 오른 병사들이 활을 아래로 내린 채 시위에 살을 먹인다.

마침내, 대답이 돌아왔다.

“이쪽이 조입니다.”

나는 그 말에 히죽 웃었다.

“그래?”

곧바로, 대답한 녀석의 코앞에 나타난 내 분신이 녀석의 목을 잘라냈다.

“둘 다 피야 이 새끼들아. 조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조와 기장은 생긴 게 꽤나 비슷해서, 긴장하면 틀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를 던져줬는데 그걸 보고 조라고 하는 건 그냥 농사는 해본 적도 없다는 거다. 피는 밭에 툭 하면 자라나는 잡초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본 녀석들이 피를 구경해보지 못했을 리는 없다.

곧바로, 화살을 시위에 올려놓고 있던 병사들이 녀석들을 향해 화살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성벽 위에서 쏟아지는 화살에 뒤늦게 숨겨두고 있던 무기를 꺼내 들던 녀석들이 쓰러지기 시작한다.

녀석들 중 몇 명은 그래도 제법 실력자였던 모양인지 날아오는 화살들을 제법 능숙하게 피하면서 성벽으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꽤나 눈에 띌 정도로 화살을 잘 피하던 녀석이 마침내 화살의 사거리 밖으로 나가는 데 성공한다.

“저기, 한 녀석이…… 화살이 닿을 거리가 아닙니다!”

성벽 위에 올라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하이랜더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병사의 창을 빼앗아 그대로 확 집어 던졌다. 굉음을 내며 날아간 창이, 정확히 녀석의 등줄기를 뚫고 땅에 박혔다. 도망치던 녀석은 그대로 푹 꼬꾸라져 숨을 거뒀다.

하이랜더는 그 녀석이 죽는 걸 보고 코웃음을 한 번 친다.

“저 멀리에 있는 적에게 창을 던져 맞추다니.”

미로스는 그런 감탄사를 흘렸다. 하이랜더는 미로스의 말을 듣고 나서 나를 바라봤다.

“내 말을 그 이상한 도구를 통해 이 성에 있는 자들에게 번역해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곧바로 나에게 번역을 부탁한 하이랜더가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전투를 앞에 두고 뒤로 나아가는 게 네 종족들의 본능인 것 같군. 육체만큼이나 나약해 빠진 정신이다. 싸그리 부끄러운 줄 알아라.”

그 말에 미로스가 다소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표정에도 약간의 불쾌함이 드러난다.

“우리는 싸우기 위해서 이 성에 집결했다.”

미로스의 말이 카일의 수정구를 통해서 번역된다. 곧바로 하이랜더가 비웃음을 얼굴에 담고 아리아 장벽 안에 머무르는 병사들의 얼굴을 슥 훑어봤다.

“싸우기 위해 모였다는 것들의 표정이 부엉이가 두려워 눈 속에 숨은 새앙쥐 같군.”

그 말에 미로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마찬가지로, 병사들의 표정도 시시각각 안 좋아지고 있었다.

- 저기, 이거 계속해서 번역해도 괜찮은 겁니까?

카일의 말에 나는 작게 대답했다.

“계속해.”

- ……알겠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카일이 계속해서 번역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말을 이어가던 하이랜더는 나를 슬쩍 바라본 다음 말을 이었다.

“제대로 우리와 말을 섞을 자격이 있는 자는 결국 쿠르스트 산맥 아래에는 저 녀석 하나 말고는 없는 것 같다. 지금 와서는 하이랜더들의 문제를 하이랜더들끼리 해결하지 않고 저 남자의 말을 듣고 동행해서 여기까지 온 게 후회된다. 한겨울에 몰아치는 눈보라 속에서 꾸물거리는 구더기 같은 것들.”

그 말에 사람들이 이를 꽉 물었다. 미로스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이 이상으로 아군의 사기를 꺾지 마라.”

미로스의 말에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하! 마치 꺾일 사기가 있기는 한 것처럼 말하는군.”

그 대꾸를 들은 미로스가 한 걸음 한 걸음 하이랜더를 향해 가까워지고, 하이랜더는 그런 미로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얼마 전 내 아버지와 동생의 시체를 박살냈다. 그 둘의 머리통이 부서질 때, 사방으로 튀는 뇌수와 박살난 하얀 두개골이 아직도 선명하지.”

그 말에 미로스의 발걸음이 멈칫했다.

“어차피 네 녀석들에게는 모욕당한 우리 선조들의 시체도 그냥 다 똑같은 하이랜더일 뿐일 것이다. 내가 네 녀석들의 시체를 봐도 다 똑같듯이.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우리는 우리를 향해 무기를 들고 다가오는 시신 속에서 부모의 자상한 웃음이 보이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해주시던 옛날이야기가 들리고, 형제자매와 보낸 추억이 떠오른다.”

말을 마친 하이랜더가 주저앉아 있는 병사들을 바라본다.

“가족과 선조의 시신을 박살내는 끔찍한 현실을 마주한 우리가 오히려 투지가 충만해 있고, 네 녀석들이 오히려 죽어가는 쥐새끼마냥 골골거리고 있다니. 부끄러워할 줄 알아라!”

말을 마친 하이랜더가 자기 앞에 서 있는 미로스를 보고 입을 열었다.

“듣기로는, 굉장한 숫자의 적들이 여기로 몰려온다고 들었다.”

그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랜더는 뒤로 나아가는 법이 없다. 하지만 네 녀석들은 적을 앞에 두면 도망갈 생각부터 하는 모양이다. 하이랜더는 그 꼴을 두고 보지 않는다. 싸움이 시작되면, 뒤편에 하이랜더 몇 녀석이 머무르며 근처로 다가오는 모든 것을 박살낼 것이다. 그게 우리의 선조를 능욕한 자식들이건, 아니면 두려움에 찌들어 있는 네 녀석들이건.”

말을 마친 하이랜더가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이번만큼은 네가 아무리 설득해도 이 결정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충분히 이 자식들에게 실망했다. 너의 용기와 투지에 감탄해 네 말을 믿고 이 머저리들과 함께 싸울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지만, 이제는 한계다.”

하이랜더는 내 대답을 듣지 않았다. 이미 자기들이 결정한 사안이니, 내 대답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멀어지는 하이랜더의 뒷모습을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고 병사들을 바라봤다.

“저 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나?”

내 말에 병사들이 술렁거린다.

“완전히, 밸도 간도 없는 좆밥으로 취급하고 있어. 슬픈 건, 딱히 틀린 말을 한 것 같지 않다는 점이지.”

병사들은 완전히 사기가 떨어져 있었으니까. 성문 안으로 들어온 하이랜더들이 아군 병사들의 상태를 보고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미로스는 병사들을 바라보다가 내 말을 받아서 입을 열었다.

“지휘관인 내 판단으로도 아군 병력의 사기가 많이 떨어져 있다는 지적은 부정할 수 없었다. 가족의 시신을 부숴가며 싸울 각오를 한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비추어졌을지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 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말을 마친 미로스가 지휘실 건물 쪽으로 향했다. 나도 마찬가지로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어떨 것 같습니까?”

내 말에 미로스가 대답했다.

“방금 전 그 하이랜더의 말로 인해서 병사들이 자극받은 건 확실해.”

표정의 변화에서 나도 그걸 느꼈다. 최소한, 성문을 통과하면서 봤던 그 패잔병들의 모습은 많이 지워져 있었다.

“하이랜더들이 그런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순수하게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허어, 하는 소리를 내고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그렇다면 더 굉장한 거야. 쿠르스트 산맥의 수비대는 저런 정신상태를 가진 녀석들을 그토록 오랫동안 막아내야 했었던 거군.”

“함께 뭉치는 경우가 거의 없어서 그렇지, 저 녀석들이 가족 단위로 따로 다니는 게 아니라 뭉쳐서 왕국 같은 걸 세우는 식의 문화가 있었다면…….”

로마가 훈족에 쥐어 터졌던 건 장난처럼 보이는 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미로스는 잠깐 고민하다 싶더니 이내 병사 하나를 불렀다.

“아리아 방벽 안쪽에 머무르고 있는 간부들을 이 장소로 집결시켜라.”

병사가 재빠르게 경례를 하고 돌아갔다. 잠시 뒤, 성 안에 머무르던 간부들이 전부 지휘실 안에 모였다.

“병력들 상태는?”

“전반적으로, 하이랜더들에게 비웃음당한 게 분한 모양입니다.”

미로스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밤에는 휴식을 취하지만, 방금 전에 그걸로 어쨌든 병력들이 정신을 조금 추스른 모양이다. 방어 강화를 위해 공호 밖에 방책을 추가로 세우고, 에단 경의 조언에 따라 소금이나 밀가루를 통해 언데드의 접근을 방해할 수 있는 경계선을 그을 것이다.”

패잔병들에게 그런 작업을 시키면 안 그래도 사기가 꺾인 상황에서 더 사기가 팍 죽을 수가 있어서 휴식 이후로 미뤄왔던 일이다. 간부들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라면 문제없습니다. 병력들도 재빠르게 움직여 줄 것 같습니다.”

“좋아. 진행하자고. 하지만, 위축된 정신은 바로 잡았다고 해도 피로가 쌓인 몸은 정신으로 어떻게 할 수 없으니. 충분한 휴식여건을 보장한 상황에서 작업에 들어가도록.”

“알겠습니다.”

병사들만 자극받은 게 아니라, 간부들도 단단히 자극받은 모양이다. 코앞에서 다른 종족에게 실컷 팩트로 비웃음당했으니, 열이 꽤나 뻗쳤겠지.

“마법사들은 엘렌 리버플로우 양과 함께, 필요한 순간이 오면 성역화 마법을 바로 발동할 수 있도록 준비하도록.”

“그러겠습니다.”

불 꺼진 잿더미만 쌓인, 싸늘한 아궁이 같았던 아리아 방벽에 빠르게 다시금 활기와 전의가 불어 넣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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