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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56화 (156/275)

156화

며칠 동안 하이랜더에게 자극받은 패퇴병들이 다시금 전의를 불태우며 필연적으로 이어질 싸움에 대비하는 사이, 임시 거점에서 후퇴하며 최대한 시간을 벌던 예비거점의 병력들이 마침내 아리아 장벽에 도착했다. 그 말인즉, 적의 군세와 이 장벽 사이의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뜻이다.

한 번에 거대한 방책 서너개를 짊어진 하이랜더가 병사에게 뭐라고 말을 한다. 당연히, 병사는 하이랜더의 말을 모른다. 어쩔 수 없이 서로 손동작을 통해 의사소통을 시작하고, 병사가 말한 자리에 하이랜더가 방책을 내려놓고 그 위를 두들겨 바닥에 단단히 고정한다. 하이랜더가 슬쩍 병사를 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고맙다.”

어쨌든, 하이랜더들도 막말하긴 했지만 그 이후로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고는 조금이나마 평가가 나아진 모양이다. 어쨌든, 그렇게 제법 충분한 시간을 들여 함께 장벽의 방어를 강화한 덕분에 병사들이 하이랜더를 바라보는 눈에서 공포가 많이 사라졌다.

“문을 열어라!”

예비거점의 병력들을 확인한 우리는 다리를 내리고 성문을 열었다. 병력들이 아리아 장벽에 도착한 시점에, 이미 밤이 찾아와 있었다.

그리고 깊은 새벽이 되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성벽 위에서, 우리는 저 멀리 보이는 무수한 불씨들에 혀를 내둘렀다.

“젠장맞을, 왜 땅 위에 은하수가 놓여있냐.”

약 20만에 달하는 제국군과 언데드 하이랜더의 군세가 저 멀리에서 불을 피워놓고 야숙하고 있었다.

“일부러 저러는 거겠죠?”

마찬가지로 성벽 위에서 적의 숙영지를 바라보던 클로에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저거 봐. 숫자만 봐도 아득하네.”

아군은 약 7만이다. 산 위에 지어놓은 장벽 안에 7만의 병력을 수용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지만, 적의 숫자는 대충 그 세 배는 된다. 그리고 그 군세가 모조리 달려들어 이 장벽을 두들기기 시작할 거다.

“안타리아 관문과 블루핸드 성의 병력들도 오늘 밤 중으로 준비를 마치고 재빠르게 복귀하기 시작할 겁니다.”

재빠르게 복귀하는 중이라고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는 적어도 열흘은 버텨야 할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버텨야 할 수도 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렌도 우리가 있는 곳을 어떻게 찾았는지 다가왔다.

“병력들은 좀 어때?”

내 질문에 엘렌이 대답했다.

“아무래도 불안하겠지. 적의 숫자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지만, 아군의 숫자를 눈으로 확인하는 건 어려운 법이잖아?”

말을 마친 엘렌이 성벽에 등을 기대면서 나를 바라봤다.

“헤로스는?”

“한 30분 전까지는 적의 머리 위에 떠 있었는데, 이제는 우리 머리 위에 있네.”

내 말에 엘렌이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가 뭔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저쪽에서 뭔가 뚫을 방안을 마련한 건 아닐까?”

아마 그럴 것이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지만.

“괜찮아. 이렇게 빠르게 머리가 오락가락하는 상황이라면 최소한 팽팽하긴 하다는 뜻이니까.”

헤로스의 머리가 쉬지 않고 왔다 갔다 하는 싸움은 이미 카루토스 타카운과 한 번 해봤다. 결국, 이 전투의 승패는 아주 적은 차이로 인해 결판나게 될 것이다.

“아군의 병력도 적지는 않아요. 아리아 방벽과 현재 주둔하고 있는 병력, 거기에 더해 하이랜더들까지 있잖아요.”

클로에의 긍정적인 발언. 실제로 방벽을 지키고 있는 병력과 적군의 병력 사이에는 약 5.5배 정도의 차이가 있다.

“그래, 공격보다 방어가 유리하다고들 하잖아?”

엘렌의 클로에의 말에 수긍한다.

“수성전은 어느 시점까지는 거의 피해 없이 막아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그 시점이 넘어가기 시작하면 수성 측에서도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해.”

적이 성벽을 넘는 데 성공하거나, 성문을 부수는 데 성공하면 결국 수성전이 가지고 있던 장점이 많이 흐려지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특정 시점을 넘기 전까지 적에게 큰 피해를 줘서 물러나게 하는 거지.”

뒤편에서 갑옷을 입은 미로스가 다가오며 말을 걸었다.

“순찰 중이셨습니까?”

“저 정도의 군세가 눈앞에 있으니, 잠이 일찍 깨더군.”

말을 마친 미로스가 혀를 한 번 찼다. 그 사이, 하얀 빛 뭉치 하나가 제국군의 진영 쪽으로 날아가 펑 하고 터지며 적진을 밝혔다. 야습을 대비해서 주기적으로 쏘아 보내는 마법이다.

아마, 저게 마지막일 것이다. 어둡던 하늘이 서서히 푸르스름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이 다가오겠지. 그리고, 아마 적군은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 * *

제국군 사령관이 옆에 앉아있는 올리비에 황녀를 보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황녀 전하, 아직 쾌차하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올리비에는 의자에 앉은 채 산 위에 자리 잡은 아리아 요새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돌아다니는 것도 아닐걸요. 지시한 건 잘 준비 되었나요?”

사령관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다소 당황스러웠지만.”

“아리아 방벽의 굳건함은 진짜예요. 튼튼한 성벽을 끼고 있는 병사들은 어느 정도 투지를 찾은 모양이고. 그렇다면 저 방벽의 공략을 위해서는 기이한 수단이 필요한 법이잖아요?”

올리비에 황녀의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숙여 인사하며 대답했다.

“지당하십니다.”

“그렇다면, 바로 준비해주세요.”

올리비에 황녀가 마련해 놓은 방안은 그 자체로는 완벽하지 못하기 떄문에, 적절한 시점의 협공이 병행되어야 한다.

“준비!”

사령관의 외침과 동시에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병사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방패와 창을 든 병사들이 앞에 서고, 활을 든 병사들이 연신 심호흡을 하며 방패의 벽 뒤에 서서 활에 살을 먹인다.

그 사이, 제국군의 후방에 위치한 투석기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전 투석기, 준비 완료되었습니다!”

보고를 받은 사령관이 심호흡을 한 번 하고 검을 들어 올렸다.

“전 병력, 진군하라! 목표는 아리아 장벽이다!”

“진군하라!”

북소리의 주기가 바뀌기 시작하고, 그 소리에 맞춰 병력들이 고함과 함께 성벽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투석기 위에는,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이 올라타 있었다. 땅에는 밀가루와 소금을 만들어낸 경계선이 언데드를 성가시게 한다. 게다가, 성벽 주변에 내려앉은 오로라는 성역화 마법이 시전되고 있다는 증거다.

언데드 하이랜더들로 하여금 아리아 방벽을 향해 돌격하게 하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성역화 마법은 물론이고, 소금과 밀가루 같은 언데드의 움직임을 방해하는 요소들 때문에 접근하기 전에 입게 되는 피해가 막대할 거다. 거기에 더해서, 해자와 방책 같은 성가신 물건들도 존재한다.

“올리비에 황녀 전하.”

돌진하는 제국의 병력을 향해, 아리아 방벽에 자리 잡은 왕국군이 화살을 쏘아붙이기 시작한다.

“조금만 더.”

올리비에는 무심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15분 정도 지났을까. 제국군은 계속 쏟아지는 공격에 피해를 입으면서도 묵묵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 순간, 올리비에가 입을 열었다.

“지금이 좋을 것 같네요.”

올리비에 황녀의 말을 듣자마자 사령관이 기다렸다는 듯이 외쳤다.

“전 투석기, 발포!”

“발포!”

누워 있던 붉은 깃발이 팍 하고 솟구치자, 그 깃발을 확인한 병사들이 일제히 발포라는 단어를 크게 외쳤다.

그리고, 무수한 투석기가 아리아 장벽 너머로 뭔가를 날려 보내기 시작했다. 날아가는 건 돌덩이가 아니었다.

언데드가 되어버린 하이랜더들의 시체였다.

“성역화 마법에 영향을 받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소금과 밀가루, 깊게 파인 공호 따위는 어렵지 않게 뛰어넘을 수 있다. 게다가, 달려가는 것 보다 쏘아내는 속도는 훨씬 빠르기에 적병과 교전하기 전에 성역화 마법으로 입게 될 피해도 현저히 줄어든다.

감정이 없고,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언데드라 가능한 방법이다. 게다가, 하이랜더의 시체는 튼튼하기 때문에, 투석기를 활용해 쏘아 보낸다고 해도 상당히 많은 숫자가 성벽 너머에 떨어진 이후 싸움을 이어 갈 수 있을 거다.

“다소의 피해는 있겠지만…….”

투석기로 날려 보내지 않고 그냥 돌격시켰다면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방벽 너머의 왕국군이 크게 흔들리는 것을 이 거리에서도 느낄 수 있을 지경이다. 화살을 쏟아내는 빈도수가 줄어들고, 성벽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소리가 희미하게 귀를 간지럽힌다.

올리비에는 그 광경을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선물을 줘야겠지.”

올리비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사령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로베르 그리즈만 경을 이리로 데려와 주세요.”

잠시 뒤, 로베르 그리즈만이 올리비에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아리아 장벽 너머에 마틴 레드우드가 있다고 들었는데, 당신도 날아가 주지 않을래요?”

그 말에 로베르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고 올리비에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로베르 그리즈만은 투석기를 통해 날아가도 문제없다. 하지만, 산 채로 으깨지는 고통은 그대로 다 느낄 것이다. 당연히,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이런 부탁을 들어줄 리가 없다.

올리비에의 말을 들은 로베르가 잠깐 몸을 떨고 대답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 * *

“이런 미친년이.”

투석기가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을 탄환 삼아 쏘아내고 있었다. 투석기를 통해 날려진 언데드 하이랜더 중 상당수는 성벽에 부딪히거나, 세워놓은 돌탑에 부딪혀 그대로 으깨졌지만…….

무시할 수 없는 숫자의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투석기로 쏘아진 것치고는 그럭저럭 멀쩡한 모습을 하고 아군 병력을 향해 무기를 휘두르기 시작한다.

“마법사들을 시켜 날아오는 언데드들의 요격을…….”

미로스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안 됩니다. 제가 대기 중인 보병과 함께 성벽을 넘는 데 성공한 언데드를 제압하고 있겠습니다.”

적병의 숫자는 우리보다 많다. 날아오는 시체 탄환을 막아내기 위해 마법사들의 힘을 낭비할 수는 없다. 그들은 지금 산을 올라 방벽으로 돌격하는 제국군을 상대로 마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 주게.”

말을 마친 나는 곧장 검을 뽑아 들고 성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따, 볼수록 억울하게 생겼다.”

성벽을 넘어 날뛰기 시작하는 언데드 하이랜더를 바라보던 와중, 한 녀석이 성역화 마법 때문에 하얀 화염이 휘감긴 채 아군 병력을 상대로 무기를 휘두르는 장면이 보였다.

곧바로 달려들어 휘둘러진 무기를 비껴낸 다음, 곧바로 시체 하이랜더의 몸을 향해 쉬지 않고 검을 휘둘러 개작살을 내며 뒤편에 서 있는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당황하지마! 어차피 얼굴 맞대고 싸워야 하는 녀석들이잖아! 뭘 이제와서 두 눈으로 믿을 수 없는 사태를 맞이한 것처럼 굴고 있어, 진형 갖추고! 차분하게 상대해! 어차피 성역화 마법 때문에 녀석들도 제대로 움직이기는 힘들어!”

게다가 내 손등 위에서 빛을 뿌리는 헤로스의 흉터까지 있으니까. 이 녀석들의 주요 목적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시체 하이랜더로 인해 아군 병력을 당황시키는 데 있다. 애초에, 올리비에도 일만오천이 넘어가는 언데드를 죄다 투석기로 날려 보낼 생각은 아닐 테니까.

사실, 투석기둘이 지금부터 일주일 내내 투석기를 통해 언데드를 날려 보낸다 해도, 성문을 향해 진격할 언데드의 숫자가 더 많을 것이다.

언데드의 골통에 박아넣은 검을 다시 뽑아내며, 나는 얼굴을 팍 구겼다.

“첫날부터 아주 죽어라 죽어라 하는구나.”

대학교도 개학하고 첫날은 쉬엄쉬엄 봐주면서 하는 법인데, 왜 저 여자는 그런 미덕이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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