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언데드가 되어버린 하이랜더의 시신들이 비처럼 쏟아진다. 몇몇 녀석들은 날아오다가 돌벽에 얻어맞고 반병신이 돼서 바닥에서 허우적거리고, 몇 녀석들은 눈알이 밖으로 튀어나오거나, 머리통 한쪽이 으깨지긴 했지만 문제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을 둘러싼 병사들을 향해 무기를 휘두른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그런 선조의 시신을 향해 사납게 무기를 휘두르는 하이랜더들까지. 서로 뒤엉켜서 정신을 제대로 차리기도 힘든 상황이 되었다.
“뭘 봐! 앞에 집중하고, 다가오는 녀석들에게 활 쏴!”
그 와중에 성벽에서 활을 쏴붙이던 병사가 자기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자, 나는 곧바로 언데드의 정수리에 박혀 있던 검을 팍 뽑아내면서 살벌한 어조로 외쳤다. 이쪽을 보던 병사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저 녀석들은 바깥에 집중해야 한다. 이쪽을 바라볼 여유가 있으면 다가오는 적을 한 마리라도 더 많이 활로 쏴 죽여야 하는 녀석들이다.
“언데드가 역청과 물을 끓이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다섯 마리 정도는 아군 투석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 역청과 물은 성벽에 붙은 녀석들에게 뿌려야 하는 물건이다. 저 시체 자식들이 방해하게 둘 수는 없다. 애초에, 하늘에서 떨어지는 시체가 무서운 점이 바로 저런 짓거리를 하기 때문이다.
투석기를 노리고, 궁수들이 머무르는 성벽으로 기어 올라가려고 들고, 성벽을 오르는 적병을 막기 위해 미리 준비해 놓은 장비들을 망쳐놓는다.
병사의 외침에 나는 얼굴에 튄 피를 소매로 훔치며 싸우는 하이랜더 중 몇 명을 향해 외쳤다.
“너희 둘, 저기로 가서 막아줘!”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 두 명이 투석기를 노리고 이동하는 언데드 하이랜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거의 동시에 나는 병사 한 무리를 이끌고 역청과 물을 끓이고 있는 장소로 향했다.
“방패 박아!”
내 외침에 가장 전방에 서 있는 병사들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커다란 방패를 땅에 박아 고정시켜 임시로 벽을 만들었다. 물론, 하이랜더들의 근육을 생각해보면 저건 상대를 막는다기보다는, 병사들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행위일 뿐이다.
방패가 땅에 박히자, 곧바로 뒤편에 서 있던 병사들이 세워진 방패 사이로 창을 내밀었다. 그 와중에도 시시각각, 제국군의 명령을 받아 움직이는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역청과 물이 끓고 있는 장소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그 숫자는 대충 열 마리 정도.
“마틴 님…….”
물과 역청을 끓이던 병사들이 불안한 눈빛을 하고 나를 바라본다. 나는 건조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시끄러, 문제없이 막을 수 있으니까 빨리 가서 땔감이나 더 넣어. 이미 내 손에 작살난 저 거구의 시체들이 스무 구가 넘으니까.”
내 말을 들은 녀석들이 다시 물과 역청을 끓이는데 집중하는 사이, 나는 데리고 온 병사들을 향해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를 지키지 못하면 방벽이 무너진다. 방벽이 무너지면 너희들은 어차피 죽어. 차라리 죽어야 한다면 여기를 지키다가 죽어라.”
“……알겠습니다!”
별로 힘이 되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어차피 사람을 부리는 데 당근만 쓸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지금 같은 급박한 상황에서는 협박에 가까운 명령도 효과가 좋다.
녀석들의 대답을 들은 나는 곧장 양손으로 검을 움켜쥐고 언데드 하이랜더를 향해 달려들었다.
“찾았다!”
그 순간, 갑자기 근처에서 울려 퍼진 익숙한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청백색 갑옷과 두 자루의 검. 내가 알고 있는 녀석이다.
“하, 이게 누구야.”
로베르 그리즈만.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마주하게 된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입에 절로 썩소가 지어진다. 빙하에 갇힌 둘리 신세가 되었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실제로 보는 건 지금이 처음이네.
“마틴 레드우드.”
분노와 살기가 질척거리는 목소리로 내 이름을 언급한 녀석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눌 필요가 없다는 듯이 양손에 검을 뽑아 들고 나를 향해 돌격했다.
“이러면 곤란한데. 조금 있다 놀아주면 안 될까?”
대답 대신 휘둘러진 시미터를 검을 들어 막자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지금 나는 언데드 하이랜더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근데 이 녀석에게 시간을 빼앗기게 되면 저 병사들이 망치를 얻어맞은 순두부 꼴이 될 거다.
저 녀석들만 문제가 아니지, 지금도 시시각각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이 성의 중요한 곳들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려면 실력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다.
“흐아아앗!”
로베르의 힘은 여전히 넘친다. 고함과 함께 녀석이 앞으로 몸을 기울이자 내 몸이 뒤로 쭉 밀린다.
버틸 생각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일부러 뒤로 밀려나면서 목에 걸려 있던 피리를 물고 재빨리 신호를 보냈다.
클로에가 듣게 된다면, 이 신호를 모를 수는 없다. 이미 몇 번이나 보내왔던 신호니까. 피리를 분 나는 입에 물고 있던 피리를 뱉어낸 다음 침을 삼켰다.
잠시 뒤, 저 멀리에서 클로에의 외침이 들렸다.
“무슨 일…… 저 남자는!”
클로에의 외침에 나는 곧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이거 상대하느라 저것들을 처리할 수 없어!”
내 말에 클로에의 시선이 병사들을 두들겨 패는 언데드 하이랜더 쪽으로 향했다.
“제가 막을게요!”
“저것만 막아내지 말고, 이후에도 좀 부탁할게!”
내 말에 클로에가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클로에가 나서준다면 저 언데드 하이랜더들은 어떻게든 되겠지.
클로에에게 언데드 하이랜더의 처리를 맡기고 나서, 나는 재빨리 녀석의 몸을 한 번 살펴봤다. 녀석의 양 귀가 귀마개 같은 걸로 꽉 막혀 있다.
“귀마개라. 내가 말하는 건 아예 듣지 않을 생각인 모양이네.”
“…….”
귀를 막으면 전반적인 몸의 감각이 둔해진다, 싸우는 사람 입장에서는 귀를 막고 싸우는 건 미친 짓이지만…… 어차피 저 녀석은 치명상이라는 개념이 없으니까. 내가 씨부리는 말을 듣고 흥분해서 날뛰느니, 차라리 청각을 틀어막아 평정심을 유지하겠다는 생각인 모양이다.
“저게 머리를 굴려서 생각해낸 방법이라니. 참 귀엽기도 하지.”
누가 보면 내가 저 녀석의 귀를 잘라낼 틈조차 없을 정도로 지한테 쥐어 터지는 줄 알겠네. 로베르는 분명히 실력이 뛰어난 기사다. 솔직히 말해서 몇 가지 분야에서는 분명히 나보다 더 뛰어나다.
하지만 이미 저 자식은 나에게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미 죽고도 남았을 치명상을 여러 번 입었다.
절대, 누구 하나가 일방적으로 밀리는 싸움이 아니라는 거다. 오히려, 자기 몸을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이는 그 습관 때문에 더 그렇다.
“크으…….”
마침내, 나는 녀석의 귀를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당연히, 귀를 막고 있던 귀마개도 귀가 잘려나가면서 한 세트로 같이 떨어져 나갔고, 다시 복구된 로베르의 귀에는 귀마개가 끼워져 있지 않다.
“아. 아. 이제 좀 들리십니까?”
비웃는 것 같은 내 표정과 함께 목소리를 들은 녀석의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
녀석은 억지로 내 말을 무시하고 다시금 멧돼지처럼 나를 향해 돌격하며 시미터를 내지르고, 스틸레토를 날려 보낸다. 던져진 스틸레토는 피하고, 내 허리를 자를 기세로 휘둘러진 시미터는 흘려낸다.
“언제나 똑같아. 사람이 발전이 없다니까.”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젖혀 되돌아오는 스틸레토의 공격을 피하고는 히죽 웃었다.
“몸이 튼튼하면 머리가 나빠도 된다고 하지만, 그래도 눈사태까지 얻어맞았는데 뭔가 발전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내 말을 들으면서도 녀석은 계속해서 참격을 쏟아내고, 나는 그 공격들을 흘리고 피하고 막아내다가 틈을 봐서 녀석의 몸에 검을 박아넣는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벌써 세 번은 죽고도 남았을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이전에 그랬듯이 이번에도 이 녀석은 참 쌩쌩하다. 하긴, 눈사태를 맞고도 안 죽고 돌아온 녀석이니, 칼빵 맞았다고 윽 소리나 내겠어?
다시 한번 휘둘러진 시미터가 맨땅을 후려친다. 재빠르게 발을 뻗어 시미터의 칼등을 콱 찍어누른 나는 분신을 만들어 녀석의 뒤통수에 검을 박아넣었다.
로베르의 뒤통수를 뚫고 이마 쪽으로 튀어나온 칼날이 보인다.
“으으.”
별로 유쾌한 광경은 아니다. 분신이 사라지고, 당연하다는 듯이 녀석의 이마에 뻥 하니 뚫려있던 칼자국이 사라진다. 흐려진 녀석의 두 눈에 다시 생기가 깃들고, 내 면상을 향해 주먹을 휘두른다.
녀석이 후려친 건 내가 아니라 허상이었다. 녀석이 순간적으로 무게중심이 흔들려 휘청거리는 사이 다시 한번 내 검이 척추에 박혔다가 뽑혀 나온다.
“망할 놈의 자식.”
로베르가 나를 향해 원망을 담은 눈길을 보내며 그렇게 중얼거린다.
“새삼스럽게 왜 그래? 네가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던 경우가 이번이 처음도 아니잖아.”
내가 공격에 성공하는 사이 저 녀석도 나에게 제법 많은 상처를 입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중에 치명상이라고 할 만한 건 없었고, 나도 심장에 품고 있는 마력의 성질상 어느 정도의 상처는 금방금방 회복하기 때문에 크게 티가 나지는 않는다.
당연히, 쳐들어온 입장인 로베르의 마음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조급해지면 실수가 늘어나고, 실수가 늘어나면 녀석이 입는 치명상의 숫자도 늘어난다.
“마력이 다 떨어져야 죽는다고 했지.”
녀석의 심장에 검을 박아넣은 나는 코앞에서 녀석과 얼굴을 마주치고 히죽 웃었다.
“어디 네가 며칠이나 버틸 수 있나 보자고.”
“네 녀석이 죽기 전까지는 버틸 수 있을 거다.”
말은 참 잘해요. 녀석의 가슴을 발로 차서 검을 뽑아낸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하늘에서 쉬지 않고 떨어지는 언데드는 하이랜더와 아군 병력, 그리고 클로에가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지속적인 피해가 발생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말도 안 될 정도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건 아니다.
“조바심이라도 나는 모양이지?”
싸우면서 내가 주변을 살피기 시작하자 로베르가 제법 이죽거리는 듯한 한마디를 나에게 던진다.
“아니, 계집 하나에 헤까닥 눈깔이 돌아가서 칠렐레 팔렐레하는 실력 없는 너절이랑 싸우려니 좀 심심해서 주변 감상 좀 하고 있었는데?”
내 말에 녀석이 어금니를 꽉 문다. 네가 입을 털어서 나를 자극하려면 한 300년은 더 있어야 할 거다.
“적병이 공호를 메우기 시작한다! 궁수는 공격을 집중하고, 마법사들은 적병이 끌고 오는 공성 병기를 요격하라!”
그 와중에 위에서 울려 퍼지는 미로스의 외침. 공호를 메우기 시작한다는 소리는, 성벽에 당도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외침을 들은 로베르의 얼굴에 다시 힘이 돌아온다.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이 자식이 더 이상 나를 물고 늘어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로베르 저 자식은 정말로 나랑 여기에서 이렇게 며칠이고 싸울 기세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
다시 성 밖으로 내쫓아야 한다. 어떻게 할까.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이내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인근에 자리 잡은 발리스타가 눈에 들어왔다.
그래, 네가 투석기를 통해 날아왔다 이거지. 그렇다면 돌아가는 길에는 저걸 타고 돌아가는 게 어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