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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59화 (159/275)

159화

내 말에 미로스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자네가 죽으면 지금 이 성에 머무르는 하이랜더들을 통제할 수 없어. 투석기의 처리는 분명히 중요한 일이지만, 그 임무의 위험성을 고려한다면 투석기의 처리를 위해 자네가 성 밖으로 나가는 건 사령관으로서는 쉽사리 허락하기 힘든 요청이네.”

간단하게 말하면, 기각한다는 뜻이다.

“이대로 있으면 병력들이 제대로 휴식을 취할 수가 없습니다. 아군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 성이 먼저 밀릴 겁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작게 신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를 보고 계속해서 설득하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성이 밀리면 그다음은 왕도입니다. 제가 죽게 된다면 하이랜더를 통제할 사람이 없어지긴 하지만, 저는 제 몸 하나는 안전하게 빠져나올 자신은 확실히 있습니다. 제가 적진에서 죽어 하이랜더들이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 벌어질 확률은 낮습니다. 하지만, 이대로 저 투석기를 그냥 두면 아리아 방벽이 함락될 확률은 높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침을 한 번 삼켰다.

“제 제안을 재고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러다가 우리 성안에서 맞아 죽게 생겼어. 인마. 현명하게 생각해. 어쨌든 이 부대를 지휘하고 있는 사령관은 미로스 제커빌이고, 내가 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미로스 제커빌의 지시를 따르는 병력들의 협조가 필요하다.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다. 사령관 명령 안 듣고 제멋대로 행동하다가 일을 조진 사람들과 사례를 늘어놓자면 사흘 밤낮을 떠들어도 부족하니까.

“…….”

미로스의 시선이 하늘을 가로질러 날아오는 언데드 하이랜더들의 비행 궤도를 쭉 따라간다. 당연히, 그 시선의 끝에는 방패와 무기를 치켜들고 땀과 피를 흘리며 필사적으로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미로스는 한 시간 정도 바라보고 있었다. 단순히 풍경 감상하는 것처럼 멍하니 바라보는 게 아니다. 한눈에 봐도 생각이 많아 보였다.

머리를 벅벅 긁던 미로스가 이를 꽉 문 채로 대답했다.

“젠장, 확실히 자네 말이 맞군. 이대로 있을 수는 없겠어. 게다가…… 자네의 제안을 수행할 수 있는 적임자가 자네뿐이라는 것도 동의해.”

아무래도 결정을 내린 모양이다. 미로스가 잠깐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상황이 좋지 않고,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가 크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전장에서 죽고 싶지는 않아.”

미로스의 말을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미로스 제커빌 경의 평안한 노후에 한몫 거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준다니 기쁘군.”

좋아, 이제 행동에 들어갈 준비만 하면 되겠군. 나는 아리아 장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관측용 첨탑 정상으로 향했다.

투석기의 위치를 확인하고, 배치된 장소와 제국군 본대 사이의 거리를 확인했다.

언데드 하이랜더 중 상당수가 투석기 쪽에 집중 배치되어있다.

투석기의 탄환으로 사용하고 있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투석기 쪽에 모여 있는 숫자는 제법 되지만, 일만 오천의 하이랜더가 전부 투석기 근처에 집결해 있다고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적은 규모다.

“나머지는 본대에 있을 테고.”

본대의 대응 속도가 빠르다는 가정하에, 내 모습이 들키게 되면 병력이 움직여 투석기 주위를 포위하는 데에는 30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절대 싸울 상황을 만들지 않고, 은밀하게 진행해야 한다.

첨탑을 내려온 나는 곧장 출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 들었어요. 괜찮으시겠어요?”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입을 열었다.

“이야, 엄청나게 지쳐 보이네. 몇 마리 잡았냐?”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한숨을 쉬고는 대답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나는 그 말에 클로에의 몰골을 슥 훑어봤다. 머리카락에는 말라붙은 오물이 한가득 엉겨 붙어 있는데, 그 위에 다시 언데드 하이랜더의 몸속에서 흘러나온 체액이 질질 흘러내리는 중이다. 서 있는 폼을 보니 경상이긴 하지만 부상을 입은 것도 확실해 보인다. 발목을 좀 심하게 삔 모양인데.

오래 버틸 수 없다. 미로스와 나는 현 상황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다.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혹시 제가 도울 건…….”

나는 그 말에 손을 휘휘 저었다.

“가서 발목이나 치료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잠깐이라도 쉬어. 그러다가 죽는다. 내기는 볼 것도 없이 네가 이긴 것 같네. 잠깐이라도 쉬면서 나중에 휴가 받으면 뭐 할지 생각이나 해둬.”

말을 마친 나는 챙긴 짐을 어깨에 둘러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겠습니다.”

내 모습을 지켜보던 클로에가 옆으로 물러난 다음 허리를 숙여 인사했고, 나는 그 인사를 받은 다음 밖으로 나섰다.

“성문을 엽니까? 사령관께서는 성벽 위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근처에서 대기하던 병사가 내가 나오자 곧장 다가와 그런 질문을 던졌고,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사람 밖으로 나간다고 광고할 일 있어? 알아서 나갈 테니 신경 쓰지 말고 경계에 집중해.”

그 커다란 성문을 열어젖히면 제국군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내 말에 병사가 경례하고 물러났다. 성벽 위로 향하는 사이에도 언데드 하이랜더들과 아군 병력들이 쉬지 않고 교전하는 소리가 시끄럽다. 나는 미로스 옆으로 다가간 다음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진짜, 나쁜 새끼들 아닙니까?”

“그러게 말이다.”

이 깊은 밤에도 전투의 잔불이 타오르는 아리아 장벽 안쪽과는 달리, 성벽 위로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풍경에 자리 잡은 제국군은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아군 병력은 여기에서 이토록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저 개새끼들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는 채 푹 쉬고 있는 모양이다.

“어디, 투석기가 다 박살 나고 나서도 그렇게 잘 쉴 수 있나 한번 보지요.”

내 말에 미로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출발하면, 시간을 기록하겠네. 동틀 무렵이 되어서도 돌아오지 않는다면, 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네를 구하기 위해 병력을 보내겠어.”

미로스가 한 말은 전우애 때문이 아니다. 내가 위험에 빠지면 하이랜더를 통제할 사람이 없다. 미로스 입장에서는 아군이 상당한 피해를 입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구할 수밖에 없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잘 해결하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살짝 손 인사를 하고 그대로 성벽 아래로 휙 떨어졌다. 후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내 몸이 추락하고, 나는 그대로 땅 위에 몸을 안착시켰다.

“후우, 냄새.”

사방에 쌓여 있는 적군의 시체들. 그리고, 어디에선가 시체의 소식을 듣고 온 날벌레와 길벌레들이 창궐해 시체의 살점을 물어뜯고 체액을 빨아먹고 있다.

나는 흘러내린 피가 흙과 뒤섞여 끈적거리는 늪과 같이 변해버린 땅 위를 걸어, 투석기가 배치된 장소로 향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시체가 가득하던 대지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저 멀리에서 흔들거리는 횃불이 보인다. 경계를 서는 모양이다.

적진이 가깝다는 뜻이니까, 나는 히죽거리며 은신을 사용해 몸을 숨겼다.

“거 시원시원하게 날아간다.”

횃불을 들고 순찰하는 병사 중 하나가 그런 소리를 했다. 성벽을 향해 날아가는 언데드들을 보고 한 말인 모양이다.

“교대까지 얼마나 남았냐?”

“글쎄, 한 시간 정도 남았을걸.”

저 녀석들을 확인한 나는 살짝 웃었다. 한 시간이라. 시간은 충분하다. 저 녀석들도 암구호는 사용하겠지. 그렇다면…….

나는 녀석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녀석들이 곧바로 눈을 크게 뜨고 내 쪽을 바라보며 외쳤다.

“정지, 양손을 들고 움직이지 마라. 홍차!”

오늘의 문어는 홍차로군.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녀석들의 뒤편에 분신을 만들어 두 녀석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크륵…….”

나를 향해 무기를 겨누고 있던 녀석들은 목젖 부근에서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희미한 단말마를 남긴 채 절명했다. 나는 곧장 그 시체 중 하나에서 갑옷을 벗겨 갈아입고, 시체를 숨겼다.

암구호는 피아를 구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그럭저럭 유용하지만, 문제점이 아예 없는 무적의 수단은 절대 아니다.

문어와 답어, 둘 중 하나만 알아도 통과할 수 있다. 문어가 홍차라는 걸 알았으니…….

나는 갈아입은 갑옷의 상태를 한 번 확인하고는 은신을 사용한 다음, 화톳불이 피워 올려진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이제는 답어를 확인할 시간이다.

화톳불 근처에도 역시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들이 보였다. 녀석들의 뒤로 돌아간 나는 은신을 풀면서 녀석들을 향해 말했다.

“정지, 양손을 들고 움직이지 마라. 홍차!”

내 말을 들은 녀석들이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향해 본능적으로 대답했다.

“이불!”

“고맙다.”

병사들은 문어를 들으면 답어로 대답하도록 훈련되어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 갑작스럽게 뒤에서 문어를 물어본다면, 자기도 모르게 답어를 말할 수밖에 없다.

답어를 확인한 나는 곧장 녀석들도 아까 녀석들과 마찬가지로 목줄기를 따서 제거하고, 녀석들의 짐을 확인한 다음 시체를 숨겼다. 적과 아군을 식별하기 위한 암구호를 확보했으니, 이제 다음은 제국군인 척하고 투석기가 설치된 장소로 향하는 것만 남았다.

투석기가 설치된 장소로 향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 잡은 병사들이 나를 확인하고 정해진 절차와 함께 입을 열었다.

“홍차!”

“이불.”

내 대답을 들은 녀석들이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지?”

“젠장, 똥 쌀 것 같아.”

내 말에 녀석들 중 조장으로 보이는 녀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봤다.

“야 이 새끼야, 아무리 급해도 그렇지 근무지를 벗어나?”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경계하는 장소에서 싸버릴까? 다음 근무자들 똥 냄새 맡게 할 수는 없잖아. 아…… 씨, 나올 것 같아. 한 번만 봐주라. 진짜 급해!”

내 말을 듣고 있던 녀석들이 내가 어흐흑! 하는 소리를 내며 몸을 비틀자 쯔, 하는 소리를 냈다.

“이름이랑 계급.”

“이런 망할, 급하다니까.”

“그래도 그냥 통과시킬 수는 없어.”

내가 죽인 시체의 몸수색을 하면서 파악해둔 신원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바로 대답을 돌려줄 수 있었다.

“거참, 본대 자식이 왜 여기 와서 똥을 싸겠다는 거야.”

“본대는 너무 멀잖…… 흐윽, 부탁이니까, 이제 지나가도 되겠냐!?”

내 말에 녀석들이 잠깐 서로를 바라보다가 수정구를 들고 어디에다가 보고를 하기 시작한다.

“장교님. 검문조장 루벤입니다. 아니, 본대 녀석 중 하나가 경계근무 중에 큰 일이 급하다고 찾아왔습니다. 네, 검문 절차는 이상 없이 응했고, 별달리 수상한 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엄청 급해 보이는데요. 경계초소에 쌀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습니까. 네, 사람은 당연히 붙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게 생긴 도구를 들어 올리더니, 그걸로 나를 한 번 비춘다. 찡, 하는 소리가 들렸다.

“통과해도 좋다. 임시허가는 길어봤자 30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으니까, 귀찮은 일 만들고 싶지 않으면 똥 싸고 바로 나와라. 한스와 에드먼드는 저 녀석을 화장실까지 안내해줘.”

따라붙는 건가. 하긴, 그래도 군대인데 정말로 이런 핑계로 휭 하니 통과시켜주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감시가 붙었다는 건 그렇게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마법 같은 거에 걸리지 않고 투석기가 설치된 장소 안으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두 녀석 중 하나는 내 앞에, 다른 녀석은 내 뒤에 자리잡았다.

“따라와. 인마.”

통과 허가를 받고, 마법적인 조치까지 끝난 상황이니. 30분 동안은 돌아다녀도 여기에 설치된 마법에 걸리지 않을 거다. 일이 잘 풀려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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