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녀석들의 안내를 받아 임시로 만들어진 화장실 앞에 도착한 나는 문을 열고 곧바로 허상을 만들어 화장실 안에 넣고, 은신을 사용해 모습을 감춘 다음 빠져나와 주변을 살폈다.
그 광경을 틈틈이 확인하며 투석기 쪽으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퉁, 퉁 하는 소리가 점점 선명해진다.
“오래지 않아 걸리기는 할 거야.”
대변이라면 응당 나야 하는 소리가 나지 않고 있을 테니까. 마법에 걸리지 않는 시간은 30분이지만, 지금 화장실 앞을 지키고 있는 녀석들에게 걸리지 않는 시간은 그것보다 훨씬 더 짧다.
“해보자고.”
나는 목을 이리저리 돌려 푼 다음 곧바로 투석기 쪽으로 붙었다. 발사를 기다리며 쭉 늘어서 있는 언데드 하이랜더들과, 다소 지루한 표정으로 투석기를 발사하고 있는 병사들이 보인다.
이제 안 지루하게 만들어주지. 나는 양손으로 검을 꽉 거머쥐고, 투석기를 지탱하고 있는 기둥 앞에 섰다. 이게 잘리면 답이 없겠지. 투석기를 살펴본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가 막히긴 하네. 마법적인 처리를 한 건가?”
나무는 자세히 살펴보면 희미하게 푸른 기운 같은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게다가, 투석기의 탄환을 날려 보내는 데 사용하는 무게추도 조금 이상하다.
무게추의 크기 자체는 쏘아내는 언데드에 비해 작은데도 불구하고,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을 굉장히 멀리까지 날려 보낼 정도다. 자체적으로 희끄무레한 연기를 흘리는 걸 보니, 부피에 비해 무게가 많이 나가도록 뭔가 특수한 처리를 한 모양이다.
이러니 몇 킬로미터 밖에서 돌을 쏘아내는 투석기라는 조합이 가능했던 거겠지.
“고생했다. 전역해라.”
나는 심장의 마력을 뿜어내며 검을 휘둘러 투석기를 지탱하는 기둥을 검으로 후려쳤다. 뻐억, 하는 소리와 함께 굵직한 기둥이 절반 정도 잘려나갔다. 그 후, 걸려 있는 추와 하이랜더의 무게를 지탱하는 데 실패한 기둥이 으지직 소리를 내며 부서진다.
“뭐야, 왜 투석기가……!”
비밀이야. 나는 부지런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투석기들의 기둥을 검으로 내려찍었다. 그 사이, 피유우우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간 빨간 불꽃이 펑 하고 터졌다. 그 즉시 투석기 진지는 물론이고,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제국군의 본대에서도 종소리가 번잡하게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가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뭔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투석기의 기둥을 파고든 검을 뽑아 들었다. 내가 서 있는 인근에 붉은빛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나에게 조치해놓은 임시허가를 철회한 모양이다.
곧이어 마법사들이 그 빛이 떠오른 일대에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팔찌에 마력을 불어넣은 나는 그 자리를 이탈했다.
내가 서 있던 장소 일대가 쏟아진 마법으로 쑥대밭으로 변하고, 팔찌가 만들어낸 방어막이 박살 난다.
“크흐.”
온몸을 타고 전달된 충격에 나는 잠깐 몸을 휘청였다. 이제 빨리 움직여야 한다. 내가 서 있는 땅 주변에는 계속해서 붉은빛이 올라온다. 잠깐이라도 멈췄다간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을 얻어맞을 수밖에 없다.
다행인 점은, 붉은빛으로 내가 서 있는 땅 일대가 표시되기는 하지만 은신으로 몸을 숨긴 내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는 못한다는 거다.
게다가…….
“자, 쏠래?”
붉은빛이 주변을 휘감고 있는 가운데, 나는 투석기 근처에 바짝 붙었다. 마법을 발사하면 투석기가 파괴된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던 마법들이 순간적으로 취소된다.
“병신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검을 휘둘러 투석기 하나를 또 박살 내고 다음 투석기로 향했다. 남은 건 10개 정도다.
투석기 3개를 더 부쉈을 때, 마침내 내가 투석기 주변에 있어도 마법을 발사하라는 허가가 떨어진 모양이다. 나를 노리고 날아오는 마법들을 보면서, 심장의 마력을 죄다 끌어내 다리에 밀어 넣고 달린다. 마법이 나를 때리기 전에 먼저 그 장소를 벗어나자, 쏟아진 마법은 애꿎은 투석기를 박살 내버렸다.
남은 것들을 정리하던 나는 저 멀리 불을 밝히고 밀려오는 본대의 규모를 확인하고는 바닥에 침을 뱉었다.
“이제는 도망쳐야겠는데.”
저기에는 로베르뿐 아니라 제국에서 제법 실력이 있다고 평가받는 기사들도 있을 것이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실력자들이다.
다섯 대 정도의 투석기를 남겨놓은 나는 곧장 해당 장소를 벗어나기 위해 달렸다. 내 뒤편으로 쏟아지는 마법과 화살들. 마침내 방어벽을 뚫고 화염구 하나가 내가 서 있는 땅 인근을 후려갈겼다.
“커흐…….”
튀어 오른 화염이 순간적으로 몸을 휩쓸고, 나는 살이 익는 것 같은 열기를 참으며 계속 달렸다. 그 와중에 날아온 화살 몇 대가 내 몸에 박혀 화염의 열기와는 또 다른 화끈한 감촉을 선사한다. 고통은 익숙하다. 나는 이를 악물고 계속해서 달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내가 서 있는 일대를 휘감던 붉은빛이 사라졌다.
마법이 수색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는데 성공한 거다.
“후우…… 후우…….”
나는 잠깐 멈춰서 숨을 몰아쉬고 나서, 다시 아리아 장벽을 향해 달렸다. 그 사이, 도착한 본대의 병력들이 말을 타고 주변을 돌아다니며 포위진을 만드는 움직임을 보인다.
나는 허상을 하나 만들어 녀석들의 시선을 끌었다. 곧바로 주변을 돌아다니던 병력들이 그 허상을 향해 마법과 화살을 쏟아내고, 말을 탄 병사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덕분에 포위에 구멍이 생겼고, 나는 그쪽으로 달리며 뒤를 돌아봤다.
“올리비에.”
그 여자가 말 위에 탄 채 주변을 바라보다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주변의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을 건다. 그 말을 듣는 자들 중에는, 로베르도 있었다.
내가 있을 장소를 대충 알아차린 모양인데. 눈썰미 하나는 기가 막힌다니까.
“잘 맞췄어. 여기, 상 받아라.”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사이, 나는 모습을 드러내고 병사로 위장하기 위해 챙겨두었던 창을 그 여자를 향해 집어 던졌다.
자신을 노리고 날아오는 창에 올리비에의 눈이 커졌다.
급하게 로베르가 검을 휘둘러 던져진 창의 궤도를 비틀었다. 내가 던진 창은 슬프게도 올리비에의 한쪽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데에 그쳤다.
“젠장.”
로베르가 생각보다 더 빠르게 반응했다.
올리비에는 멍하니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쓰다듬더니 손에 묻은 피를 멍하니 바라본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나는 지축이 뒤흔들릴 정도로 쉬지 않고 달렸다.
“크흐.”
질주하는 와중에 어깨에 뭔가가 퍽 하고 박혀서 확인해보니, 화살촉이 뒤편 어깨를 뚫고 앞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팔을 관통한 화살 때문에 오른팔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고 축 늘어진다.
“마틴 레드우드!”
로베르의 외침이었다. 내 어깨를 꿰뚫은 화살이 자신의 것이라고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녀석의 손에는 활이 들려 있었다. 나는 혀를 몇 번 찬 다음 중얼거렸다.
“저 새끼는 내 이름 부르짖는 거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건가.”
무슨 아주, 헤어진 여친에게 전화 걸어서 부르짖는 것처럼 구성지게도 외치네. 어쨌든, 그사이 나는 제국군의 시체가 한가득 쌓여 있는 장소에 도착해 입고 있던 제국군의 투구를 벗어 던졌다.
제국군의 시체가 쌓여 있다는 건, 여기부터는 아군 병력이 쏘는 화살이나 마법이 닿는다는 뜻이다. 녀석들도 섣불리 접근할 수 없다.
“마틴 레드우드다, 쏘지 마!”
나는 성벽을 향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곧이어 성벽 위에 만들어진 조명이 나를 비췄다. 조명을 만들어낸 당사자는 엘렌이었다. 내 얼굴을 확인한 미로스가 곧바로 병력들에게 말했다.
“밧줄을 내려라!”
“오른팔을 다쳤습니다, 고리매듭을 지어서 내려보내 주셔야 합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밧줄을 던졌다. 고리매듭에 허리를 밀어 넣은 나는 왼손으로 줄을 당겨 허리를 단단히 조였다. 곧이어, 병사들이 내 몸을 성벽 위로 끌어올렸다.
“아이고…… 죽겠다.”
성벽 위에 도착한 나는 털썩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다가, 왼손으로 튀어나온 화살촉을 부러뜨린 다음, 어깨에서 쑥 하고 뽑아냈다.
“……괜찮으신 거예요?”
클로에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안 괜찮아. 등에 박힌 화살 좀 뽑아줘.”
내 말에 클로에가 칼을 들어 내가 입고 있는 상의를 찢어버린 다음, 등짝에 박힌 화살들을 살피다가 말했다.
“화살촉을 제대로 제거하려면 아무래도 칼로 째야 할 것 같아요.”
“듣기만 해도 상쾌하네. 얼렁 처리해줘.”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단검을 물로 씻고 화톳불의 불길에 가져가 소독한 다음 화살이 박힌 장소와 자신의 손을 독한 증류주를 적신 솜으로 닦았다.
“그럼, 뽑을게요.”
단검이 살을 후벼낸다.
“아프시면 말씀하세요.”
“말하면 뭐가 변하나?”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니지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숙인 채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마침내 몸에 박혀 있던 화살들이 다 제거되었다. 나는 혀를 내두르며 이마에 맺힌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오늘 침대에 등 대고 자기는 글렀군.”
상처가 완전히 아물기 전까지는 엎드려서 자야 할 것 같다.
“고생했네.”
미로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지요. 언데드 하이랜더는 더 이상 안 날아올 겁니다.”
물론, 적이 보급로를 통해서 추가로 투석기를 보낼 수는 있겠지만, 그 투석기들이 도착하기 전에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의 병력들이 먼저 도착할 것이다.
“이걸로 최소한, 적이 공격하지 않는 동안은 아군 병력도 휴식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었어.”
“다행이네요.”
올리비에를 거기에서 죽이지 못한 건 굉장히 아쉽다. 게다가, 은신도 들켰겠지. 이 정도로 일을 벌여놓았는데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성벽 위에서 적진을 바라봤다.
“어차피 완전히 결착을 볼 생각이었으니까.”
제국과 왕국의 전면전. 여기에서 우리가 승기를 잡는 데 성공하면 우리는 승전의 대가로 올리비에의 신변양도를 요구할 것이다. 즉, 은신은 들켰지만 어차피 이번 싸움이 끝나고 나면 내가 끝장나거나 올리비에가 끝장나는 길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까지 숨기고 있던 은신이라는 수단은 여기에서 들켜도 괜찮다. 오히려 그걸 숨기겠다고 어물어물했었다면 우리가 끝장났을 것이다.
밤하늘에 떠오른 헤로스의 머리는 다시 제국군의 머리 위로 옮겨져 있었다. 그걸 확인한 나는 옆에 있는 클로에를 향해 말했다.
“쓰러질 테니, 내 숙소로 옮겨줘.”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픽 쓰러져 눈을 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숙소의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몸은 깨끗하게 닦여 있었고, 옷도 갈아입혀 있었다. 등짝과 어깨에는 깨끗한 붕대도 감겨 있었다.
“…….”
젖은 수건을 널고 있던 클로에와 내 눈이 마주쳤다.
“지금 시간이?”
내 말에 클로에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어둑한 새벽이다.
“더 쉬셔도 될걸요.”
나는 그 말에 클로에의 몰골을 확인하고 대답했다.
“쉬는 건 이제 네 차례인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차리신 걸 확인했으니 이젠 저도 돌아가야겠네요.”
나는 잠깐 주변을 살펴보다가 말했다.
“몸은 누가 씻기고, 옷은 누가 갈아입힌 거야.”
“아마도 저일걸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혀를 찼다.
“외간 남자의 몸을 그렇게 막 만지면 쓰나.”
내 말에 클로에가 코웃음을 쳤다.
“어머, 답지 않게 부끄러우신 거예요?”
“답지 않게? 나중에 내 근처에서 기절하길 간절히 빈다.”
내 앞에서 기절만 해봐, 몸을 혀로 핥아서 닦아주마.
이를 갈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클로에가 내 몸 상태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말했다.
“정신은 차리신 것 같으니. 저도 이제 돌아가서 좀 쉴게요. 아, 옆에 놓인 차는 제법 식었으니까 목마르시면 드세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