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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61화 (161/275)

161화

투석기가 박살 나서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을 더 이상 쏘아내지 못한다. 그럼 적이 시도할 행동은 이제 하나뿐이다.

뚫릴 때까지 공격한다. 원래, 기묘한 전술은 불리한 쪽에서 시도하는 법이다. 세력이 더 크고 병력이 많은 쪽은 굳이 기기묘묘한 전술을 쓸 필요 없이, 그냥 압도적인 숫자로 밀어붙이면 된다.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한 나는 클로에, 엘렌과 함께 성벽 위로 올라가 적진을 바라봤다.

“적이 병력의 일부를 분할해서 블루핸드 성이나 안타리아 관문으로 보낼 수도 있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거기에서 오고 있는 병력의 숫자는 적지 않아.”

설사 보내서 막을 생각이라고 해도, 어정쩡한 숫자로는 어림도 없을 것이다. 한곳에 뭉쳐있는 병력을 세 토막 내겠다는 수작인데, 그런다면 우리는 수성전을 훨씬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고, 자연스럽게 아리아 장벽에서 농성할 수 있는 기간도 길어진다.

농성할 수 있는 기간이 길어지면 지금 아리아 장벽으로 향하는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수비대가 도착할 때까지 충분히 버틸 수 있을 거다.

“제국군은 여기를 뚫는 거 말고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어.”

이렇게 말하면 제국군이 불리한 상황처럼 보이지만, 사실 제국군은 그렇게까지 불리한 상황도 아니다.

아군이 도착하기 전에 여기가 뚫리면 왕국은 끝이라고 봐도 된다. 상당한 병력 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나 잘 버티는 성이다. 제국군의 손에 떨어지게 되면 블루핸드 성이나 안타리아 관문의 병력만 가지고는 세 번 죽었다 다시 살아나도 제국군이 점령한 아리아 장벽을 뚫을 수 없다.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어깨를 크게 으쓱했다.

“공격이 거칠어지겠네.”

“그래도 어젯밤에 투석기 대부분을 잃은 건 뼈아픈 실책이겠죠.”

공성전에서 투석기는 매우 중요하다. 그걸 잃어버렸다는 건, 적이 성벽을 박살 낼 수단이 사실상 없어졌다는 뜻이니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저 멀리 보이는 제국군의 움직임이 서서히 부산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오전에 공격할 줄 알았는데 왜 안 하나 했더니.”

또 뭔가 개수작을 부리는 모양이다.

“확대해볼게. 적이 방해하면 오래 유지할 수는 없겠지만, 10초 정도는 볼 수 있을 거야.”

말을 마친 엘렌이 손을 들어 올리자, 허공에 짙은 보라색 테두리를 가진 원이 만들어졌다. 원 안에는 확대된 적진의 모습이 보인다.

“저건 또 뭐야. 사랑의 교미 같은 건가.”

언데드로 변한 하이랜더의 시체들이 서로 뒤엉켜 한데 뭉쳐지고 있었다.

시체의 형상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으스러진 살점과 뼛조각이 뒤엉킨 그것은 마치 미트볼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직 하는 소리와 함게 엘렌이 만들어낸 보라색 원의 형태가 무너졌다. 슬쩍 옆을 돌아보자, 엘렌의 표정이 굉장히 심각하다.

“뭔지 아는 모양인데. 우리도 좀 알자.”

“육괴야. 이미 언데드로 변한 시체의 형태를 훼손하면서 억지로 뭉친 다음, 꽉 압축시키는 거지.”

그 말을 들은 나는 턱을 쓰다듬다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데?”

“형태가 굉장히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내구도가 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약해지고, 제대로 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통의 언데드보다 훨씬 더 둔해져. 보조가 없으면 제대로 걷지도 못할걸.”

그 이야기만 들어서는 저 녀석들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이 좀 병신같아 보이는데. 기껏 만들어낸 언데드 하이랜더를 못 쓰게 만드는 거잖아.

“무슨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신호를 보내면 폭발해. 억지로 억눌러 놓았던 썩은 살점과 체액, 뼛조각 같은 것이 사방으로 비산해서 일대를 휩쓸지.”

그 살상반경과 위력은, 대충 들어보니 어지간한 박격포탄 정도를 자랑하는 모양이다.

“저런 게 있었으면 투석기로 날려 보냈으면 될 거 아니야.”

이 세상의 투석기는 안 그래도 지구의 투석기보다 훨씬 더 성능이 좋다. 저런 걸 탄환 삼아 투석기로 날렸다면 말 그대로 박격포가 따로 없었을 텐데.

“투석기로 날리려 들었다면 쏘아지는 순간 터져, 오히려 그 폭발 피해를 제국군이 뒤집어썼을 거야.”

다행히도, 저 시체 폭탄은 투석기를 사용해 날려 보내기 힘들 정도로 불안정한 상태인 모양이다. 다행이긴 하지만…….

“결국 적은 투석기 말고 다른 방법을 통해 성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거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고, 클로에가 엄지와 검지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저 덩어리들을 접근시키면 곤란하다는 거군요. 일단, 사령관님께 보고하고 돌아올게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곧바로 미로스가 머무는 장소로 달렸다. 그 사이, 병사들도 적의 움직임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는 걸 깨닫고 서서히 전투 채비를 갖춘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하이랜더들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봐.”

하이랜더를 향해 말을 걸자, 녀석들이 나를 바라본다. 그들을 바라보던 나는 잠깐 침묵했다.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 이 친구들이 뒤엉켜 미트볼이 된 선조의 시체를 보고 충격 먹지 않게 하려면 미리 현재 상황을 말해줘야 할 필요가 있긴 한데.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너희들의 조상님들께서 지금 미트볼로 변해서 다가오는 중이야. 성벽 앞에서 펑 하고 터질 거야. 같은 식으로 말할 수는 없잖아. 이게 무슨 장난도 아니고.”

내가 머뭇거리는 모습을 보던 하이랜더가 얼굴을 약간 구겼다.

“할 말이 있으면 해라.”

나는 그 말에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지금 너희들의 선조들께서는 저자들의 명령을 따르는 꼭두각시가 되어있잖아?”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최대한 단어를 조심해 사용하면서 녀석들에게 현재 상황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내 말을 전부 이해한 하이랜더가 흉악할 정도로 얼굴을 구긴 채 외쳤다.

“선조들의 시신이 지금 고기경단으로 변해서 밀려온다는 뜻인가!”

제대로 이해했네. 그리고 지금 저 친구가 한 말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내가 혼잣말로 했던 표현과 일맥상통한다. 그냥 미트볼 어쩌구 하는 식으로 표현했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을 것 같은데.

“제국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어제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공세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뽑아 들었다. 저 멀리에서, 갑옷을 입은 미로스가 뛰쳐나와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전원 위치로! 죽음을 각오하고 각자가 맡은 장소에서 지시받은 역할에 최선을 다한다면, 우리는 이겨낼 수 있을 것이다!”

“전원 위치로!”

미로스의 외침이 성벽 안에 울려 퍼지고, 곧바로 병사들이 그 말을 복명복창한 다음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활을 들고, 투석기를 준비하고, 펄펄 끓고 있는 타르와 물을 옮길 준비를 한다. 성문 앞에는 무기를 챙겨 든 보병들이 자리 잡고, 하이랜더들은 거친 숨을 내뿜으며 거대한 바윗덩어리를 든 채 성벽 위에서 대기한다.

“발사!”

그 외침과 함께, 적과 아군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궁수들은 활을 들고 화살을 쏴붙이기 시작하고, 마법사들은 마법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서로가 서로를 향해 쏟아내는 마법과 화살들이 허공에서 교차하고, 곧장 노리고 있던 목표 위로 비처럼 쏟아져 내린다.

나는 브레이서에 마력을 넣어 몸을 보호하고, 병사들은 방패를 들어 올려 쏟아지는 화살을 막아낸다.

“적병의 접근을 막아라, 공호를 메꾸도록 두어서는 안 된다!”

저 멀리에서, 병사와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등에 흙을 담은 거대한 부댓자루를 짊어지고 비탈길을 달려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저걸 던져서 성벽 앞에 만들어진 공호를 채우겠다는 속셈이다.

그리고, 적들을 지휘하는 간부들이 하나같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가장 먼저 공호에 흙더미를 던지는 병사에게는 이천 론도, 성벽에 가장 먼저 도착한 자에게는 고향 땅을 포함한 150가구의 조세권과 노동력 징발권을, 성벽을 가장 먼저 오른 자에게는 앞서 말한 두 가지는 물론, 향사 자리까지 약속되어있다! 설사 죽더라도 이 약속은 유가족들에게 그 권리가 이전된다. 그대들은 제국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말고 싸워라! 눈앞에 있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빛나는 미래다!”

향사라. 인심 한번 크게 쓰네. 하긴, 그런 거라도 걸지 않으면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성벽을 향해 돌격하려고 들지는 않겠지. 제국의 병사들도 그 호령에 힘을 받아서 그런지, 무겁기 짝이 없는 흙더미를 짊어진 채 빗발치는 마법과 화살을 감수하고 공호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사람 팔자 피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지만, 역시 그중 최고는 전쟁에서 공을 세우는 거라지. 나도 마찬가지로 활을 들고, 공호를 메꾸기 위해 돌격하는 제국군 병사들을 쏘아 맞히며 외쳤다.

“적들이 죽고 싶단다, 그렇게 해주자! 부에 욕심이 멀어 목숨을 포기한 녀석들이 지옥으로 떨어져 후회하게 만들자고!”

내 말에 병사들이 으아아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공격에 더 박차를 가한다.

“병사들은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다고 하지만…….”

언데드로 변한 하이랜더들이 문제다. 화살로는 쉽게 막아낼 수 없기 때문에 발리스타나 투석기를 이용해 막아야 하는데, 두 가지 무기는 장전에 시간도 굉장히 오래 걸리고 보유한 숫자도 궁수에 비할 바가 아니다.

결국, 언데드 하이랜더 중 하나가 마침내 공호 앞에 도착해서 짊어지고 있던 거대한 흙더미를 집어던지는 데 성공했다. 하나씩 하나씩, 적은 전우의 시체를 무시하거나 짓밟으면서 서서히 아리아 장벽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다. 병사들의 시체와 흙더미가 서서히 공호 안을 채우기 시작한다.

“사다리차와 교량거가 옵니다!”

구름사다리는 성벽에 걸어 병사들이 타고 오르는 사다리를 만드는 공성무기다. 교량거는 거대한 철판을 방패처럼 세우고 움직이는 거대한 수레다. 공호 앞에 도착하면 방패로 삼던 저 거대한 판을 내려 말과 공성병기들이 지나갈 수 있는 임시 도로를 만들 것이다.

물론, 공호 위에 철판 하나 달랑 깔아서 임시 다리로 쓸 수는 없다. 그 위를 달리는 공성병기와 기병의 무게를 이기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저 병사들이 목숨을 걸고 공호에 모래주머니와 시체를 던지는 것이다.

“교량거를 우선 공격해!”

교량거가 다리를 놓기 전까지는 사다리차는 공호를 건널 수 없다. 지금의 우선순위는 교량거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쳐내다가, 바닥을 굴러다니는 피에 젖은 창을 발로 차올려 손에 잡았다.

“하나, 둘!”

그런 외침과 함께 몸에 마력을 불어넣은 다음 앞으로 다가오는 교량거를 향해 던졌다. 철판을 앞세우고 나아가던 교량거를 향해 쇄도한 창이 곧장 녀석들이 앞세운 철판을 꿰뚫었다. 교량거가 일시적으로 멈추지만, 곧바로 근처에서 돌격하던 병사들이 흙더미를 집어던진 채 달라붙어 다시 교량거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왕국의 마법사들이 교량거를 노리고 마법을 쏟아내면, 제국의 마법사들이 마법을 펼쳐 교량거의 파괴를 필사적으로 막아낸다.

점심때를 넘어, 봄이 찾아온 하늘 위에서 해가 점점 더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그럴수록 아래에 펼쳐진 아비규환은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교량거가 내려졌다! 전 병력은 교량거의 공격을 중단하고, 뒤따라오는 공성병기들을 요격해라!”

35개의 교량거 중 15개가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성공했다. 내려진 철판은 바닥에 쌓인 시체와 모래주머니로 받쳐져, 기병이나 하이랜더, 심지어 공성병기가 통과해도 충분히 버텨줄 정도로 튼튼해졌다.

내 입장에서는, 별로 행복한 소식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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