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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62화 (162/275)

162화

적들이 공호를 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앞세워진 것은 당연히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였다.

“완전, 화살받이잖아.”

수십 발의 화살이 박힌 언데드 하이랜더들은 고슴도치와 비슷한 몰골을 하고, 성역화의 영향을 받아 하얀 불꽃에 휘감긴 채 성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한 마리가 순철 화살촉이나, 소금물을 바른 화살 백 발 정도를 맞고 난 다음에야 움직임을 멈춘다. 교환비가 너무 안 좋지만, 그렇다고 저 녀석들을 무시하고 제국군에 화살을 쏘아붙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성벽에 붙어 벽과 성문을 두들기기 시작하면, 제국군 병사들보다 더 큰 효과를 발휘할 테니까.

“그래도 많이 약해진 건 사실이지.”

성벽 위에서 돌과 창을 던지고 있는 우리네 하이랜더들은, 날아오는 화살 따위는 그냥 무시한 채 계속해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녀석들의 몸을 때린 화살은 가죽도 제대로 뚫지 못하고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리고, 아군 병사들은 방패로 몸을 보호하며 화살을 쏘다가, 하이랜더의 몸을 맞고 바닥에 떨어진 화살들을 다시 주워서 사용한다.

“때려 부숴라!”

성벽을 향해 굴러오던 구름사다리를 향해 하이랜더가 거대한 돌덩이를 던진다. 제국의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방어벽에 돌덩이가 부딪쳐 박살 나고, 보호막이 크게 출렁였다.

시간이 지나 서서히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전쟁 중에 식사할 여유는 당연히 없었다. 조금이라도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상황이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제국군의 사다리가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2번, 3번, 7번, 11번, 12번, 15번 구역입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곧바로 고개를 뒤로 돌리고 외쳤다.

“도르래, 물건 올려!”

내 외침과 함께 성벽 아래에 있던 도르래가 항아리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항아리는 아래에 바퀴가 달린 판 위에 올려진 채 도르래를 타고 올라왔다. 병사들은 재빨리 판을 밀어 위에 올려진 항아리를 사다리가 걸린 성벽 쪽으로 나른다. 항아리 안에는, 부글거리는 역청과 물이 담겨있었다.

동시에, 사람 머리통만 한 돌덩이들도 도르래를 통해 성벽 위로 전달되기 시작한다. 전부,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적병들에게 쏟아낼 물건들이다.

“사다리 걸렸습니다! 3, 6, 11, 15! 2번과 3번은 걸리기 전 파손에 성공했습니다!”

그 보고를 듣는 와중에, 내가 서 있던 성벽의 난간에 턱 하고 갈고리가 걸리는 것이 보였다. 곧바로 검을 휘둘러 갈고리에 연결된 밧줄을 잘라낸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외쳤다.

“벌써 여기에서 밀릴 수는 없어! 이를 악물고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 피곤하다고 비실거리면 평생 눕게 된다!”

이 성벽에서 최소한 이틀은 더 버텨야 한다. 여기가 벌써 밀리는 건 우리의 계획에 없다.

사다리차 위로 타르가 쏟아지고, 그 위에 횃불이 던져진다. 뜨겁게 달궈진 역청에 횃불이 던져지자, 타르를 뒤집어쓴 사다리차가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성벽을 두들기고 있습니다!”

“장소 말해!”

“16번 구역 아래입니다!”

여기에서 별로 멀지 않다. 나는 그 말에 곧바로 보고받은 구역으로 달려가 성벽 아래로 몸을 던졌다.

“이 새끼들아, 벽에 문이 달려있으면 문으로 들어와!”

뛰어내린 나는 하얀 화염에 휩싸인 언데드 하이랜더의 머리통을 밟고, 정수리에 검을 박아넣었다. 언데드 하이랜더의 몸을 휘감은 불꽃이 더 격렬하게 타오르며 언데드로 변한 하이랜더의 몸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이 백색의 화염은 살아있는 자들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않으니까, 나는 괜찮다.

“한 녀석은 정리했고.’

나는 녀석의 머리통에서 검을 뽑아내고, 머리통을 발로 박차 근처에서 벽을 두들기는 다른 언데드 하이랜더에게로 날아갔다.

땅에 발을 디딜 생각은 없다. 아무리 병사들이라고 하지만, 포위되면 위험하니까. 두 번째 녀석을 제거하고 나니, 세 번째 녀석과 나 사이의 거리가 제법 된다.

“으랴앗!”

허공으로 뛰어오른 나는 발아래에서 분신을 만들어낸 다음, 그 분신을 다시 한번 발로 박차고 멀리 떨어져 있는 하이랜더를 향해 날아가 그대로 목을 후려쳐 대가리를 잘라냈다.

“마틴 레드우드다, 집중사격해라!”

그 외침을 들은 나는 성벽을 향해 뛰어오르는 허상을 만들고, 바로 머리통이 날아간 하이랜더의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었다. 적은 이 언데드의 등짝을 보고 있을 테니, 뛰어오른 허상이 나라고 생각하겠지. 허상을 향해 화살이 한바탕 쏟아지고 나자, 나는 바로 그 자리를 이탈해 다른 하이랜더의 머리통을 날렸다.

“적들이 마틴 레드우드 님을 노리고 있다, 엄호해! 하이랜더들이 성벽을 더 이상 두들기게 하면 안 된다!”

16번 구역을 담당하고 있던 간부의 외침에 병사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머리를 내밀고 화살을 쏴붙이기 시작한다. 덕분에 나를 노리는 화살비가 막아내거나 견딜 수 있는 수준으로 변했다.

허공에서 계속 분신을 발판 삼아 이동하던 나는 마침내 16번 구역을 두들기던 스무 마리 정도의 언데드를 제거하는 데 성공하고 다시 성벽 위로 올라왔다.

그러기가 무섭게, 목에 걸어두고 있던 군용 수정구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 마틴 레드우드 님. 고생하시는 와중에 죄송합니다만…… 11번 구역에 제국 선봉장을 맡은 기사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데 성공한 모양입니다. 현재 방어 중입니다만, 이미 꽤 많은 병사들이 그자의 손에 절명했습니다. 아군 기사님들과 하이랜더 몇이 억제하고 있습니다만, 처리가 지연되고 있습니다.

“알았어.”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한 번 문지른 나는 곧장 11번 구역으로 달렸다.

“으하하하하하! 고작 이 정도란 말이냐!”

턱수염이 수북하게 나 있는 근육질의 남자가 양손으로 글레이브를 휘두르며 성벽의 병사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뒤를 따라 사다리를 타고 병사들이 성벽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아군 병사들이 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는 중이다. 나는 쯔, 하고 혀를 찬 다음 검을 바로잡고 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다!”

파랗게 질려있던 병사들이 나를 보고 그런 소리를 외쳤다. 글레이브를 휘두르던 녀석이 나를 바라보고는 코웃음을 친다.

“하, 네 녀석이 그 마틴 레드우드라는 버러지냐? 제법 날뛴다고 들었건만, 사타구니에 털도 안 나게 생긴 어린 자식이었을…….”

“미안한데, 내가 좀 바뻐. 나머지 개소리는 지옥 가서 해라.”

가슴팍에 박힌 검을 아래로 쭉 내려긋자, 피와 함께 내장이 흘러내려 바닥을 적신다. 그걸로 끝이었다.

굉장한 기세를 뿌리며 글레이브를 휘두르던 제국의 선봉장께서는 인생 최후의 장기자랑을 하며 바닥으로 푹 쓰러졌다.

“선봉장이라. 별로 실력도 없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쓰러진 시체의 목을 베어낸 다음, 성벽 위에 걸려있는 깃대로 던졌다. 동시에 나타난 내 분신이 그 머리를 받아 깃대 위에 머리통을 퍽 하고 박아버린다.

그 광경을 보던 나는 소매로 검에 엉겨 붙은 피를 훔치며 제국의 병사들에게 말했다.

“자, 저거 보이냐? 니들 선봉장 되시는 분이다. 가시는 길 심심하지 않게 경례라도 해봐.”

대번에 상황이 변한다. 사다리를 타고 올라와 기세등등하던 제국 병사들이 당황하고, 그사이 사기를 잃어가고 있던 아군 병사들 사이에서 간부 한 명이 목놓아 외쳤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 적의 선봉장을 참수해 깃대 위에 걸었다!”

그 외침을 뒤따라 울려 퍼지는 으와아아아아! 하는 고함.

“밀어붙여, 이 성벽은 우리 것이다! 넘어오게 하지 마라!”

내 말과 동시에 다시금 사기가 바짝 오른 병사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던 병사들을 역으로 밀어내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보던 나는 수정구를 손에 쥐고 말했다.

“다음은?”

― 성문 쪽으로 공성추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알았어, 처리할게.”

공성추의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성벽 너머를 바라본 나는 얼굴을 구겼다.

“이런 씨팔거. 그냥 공성추가 아니잖아! 보고 제대로 안 할 거냐?!”

성문 바로 앞에 자리 잡은 적병들은, 공성추의 머리 부분에 뭔가를 고정시키고 있었다. 얼마 전에 관측했던 그 육괴라고 하는 물건이다. 저걸 공성추의 머리에 고정하고 성벽을 두들기면…… 공성추의 충격에 더해 저 육괴의 폭발까지 더해질 것이다.

그걸 확인한 나는 곧장 성벽 아래로 분신을 내려보냈다. 공성추 끝에 고정되던 육괴를 향해 분신이 검을 휘둘렀다. 파샥, 하는 폭발음과 함께 피와 살점, 뼛조각이 사방으로 휘날리며 공성추 주변에 있던 적병을 휩쓴다.

시선을 돌려 저 멀리를 바라보자, 사방을 나무판으로 감싼 수레 서른 대 정도가 이쪽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나는 수정구를 들고 말했다.

“사령관님 연결해.”

― 알겠습니다, 바로 연결합니다!

― 마틴 레드우드, 무슨 일이지?

잠시 뒤, 미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장 대답했다.

“적이 이제서야 육괴를 사용하려는 모양입니다.”

― 그래, 나도 확인했다. 지금 밀려오는 저 수레들이지?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지금 우리 쪽으로 향하고 있는 공성탑 보이십니까?”

총 다섯 대다.

― 그래, 나도 확인하고 있다.

“두 대가 유달리 움직임이 무겁습니다. 뒤편의 수레는 시선 끌기일 뿐이에요. 중앙에 하나, 그리고 제일 왼쪽의 하나입니다.”

병사를 옮기고 있다면 다섯대 중에 두 대만 저렇게 유달리 속도가 느릴 리가 없지.

진짜는 저 두 대의 공성탑이다. 안에는 육괴가 터질 준비를 하고 있겠지.

― 알았네, 마법사 전원에게 지시해 해당 공성탑들을 바로 요격하도록 하겠네.

미로스의 대답을 들은 나는 씽 하고 날아오는 화살을 살짝 피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수정구를 통해 무너질 위험이 있는 구역을 확인하고, 해당 장소로 움직였다. 잠시 뒤, 마법사들의 집중 포격이 공성탑을 향해 쏟아졌다.

제국의 마법사들도 그 두 개의 공성탑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는지 쏟아지는 마법들을 방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다른 공성무기들과 병사들을 향한 마법 포격을 포기해가면서 전력으로 쏟아 넣은 마법들은 결국 두 대의 공성탑을 때리는 데 성공했다.

“소름끼치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두 대의 공성탑 안에 들어있던 육괴들이 충격으로 인해 시뻘건 폭발을 일으켰다. 내장과 살점, 뼈가 공성탑의 외벽을 박살 내며 뿜어져 나온다.

두 대의 공성탑은 순식간에 흔적도 제대로 남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박살 났다. 그 힘이 얼마나 강력했던지, 폭발로 인해 부서진 공성탑의 기둥을 구성하던 굵직한 나무 기둥들이 로켓처럼 사방으로 날아갈 지경이다.

“하, 일 크게 조질뻔했잖아.”

마법을 이용한 집중 포격이 조금만 늦었어도 성벽도 저 폭발의 반경 안에 들어갈 뻔했다. 저런 게 근거리에서 터졌으면 제아무리 아리아 장벽이 튼튼하다고 해도 저 공성탑이 들이받은 곳은 그대로 무너졌을 거다. 그럼 적은 무너진 성벽으로 병력을 집중했겠지.

이게 저들이 노리고 있던 비장의 수단이었나?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다.

― 전 군에 보고합니다. 적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수성 성공입니다! 반복합니다, 적이 퇴각하고 있습니다, 수성 성공입니다!

저들이 준비했던 비장의 수단까지 무력화되었다. 녀석들이 내린 이후 행동이 퇴각이라는 건 꽤나 뻔한 이야기였다.

수정구를 통해 울려 퍼지는 적군의 후퇴 소식. 적들은 자신들이 돌진했던 것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후퇴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미로스의 목소리가 수정구를 통해 들렸다.

― 상황을 수습하고 사상자를 파악한다. 사상자 파악이 끝나면 잔여 병력을 재편성해서 다음의 공세를 대비해야 하니, 민첩하게 움직이도록.

한번 저물기 시작한 해는 빠르게 가라앉아 어둠이 찾아오고, 그 사이 적의 공세를 막아낸 아군은 사상자를 확인하고 손실된 병력들을 재편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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