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육괴의 위력을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어쨌든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데 성공한 왕국군의 간부들은 막사에 모여서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합니다. 일정 숫자 이상이 접근에 성공해서 폭발하게 된다면…… 성벽을 무너뜨리는 건 문제도 아닌 것처럼 보였습니다.”
공성탑의 폭발 장면은 모두가 인상 깊게 보았던 모양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입을 열었다.
“밤에 몰래 보낼 가능성도 있습니다. 야습 대비를 철저히 하지 않는다면 아차 하는 순간에 성벽이 무너질 겁니다.”
문제는 아군 병사들이 상당히 지쳐있기 때문에, 야습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한다면 그만큼 누적된 피로의 해소에 시간이 필요해진다는 점이다.
“어쩔 수 없습니다. 병사들의 피로는 분명히 추후 방어전에 문제가 되겠지만, 그 육괴들의 폭발은 아예 아리아 장벽을 뚫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한 간부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병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모두가 함께 힘든 싸움을 더 이어나가야 할 것 같군.”
대충 그렇게 합의가 되어가던 와중에, 밖에서 병사 하나가 들어왔다.
“하, 하이랜더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목적은…… 자기들의 언어로 뭐라고 하기는 했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어서.”
병사의 말을 들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무슨 일이야?”
내 말에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너희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들었다. 우리 또한 이 돌벽을 지키는 자들일진대, 어찌 우리를 빼놓는 거냐.”
그야, 말이 안 통하니까 그랬지. 게다가 까딱 말실수 한 번 잘못하면 니들이 폭주할까 봐 걱정되는 점도 있었고.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하다. 생각이 짧았다. 함께 이야기를 나누지.”
복잡한 이야기가 오가기 시작한다면 카일의 도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나는 엘렌에게 부탁해서 수정구를 카일과 연결시키고, 현 상황을 미로스에게 보고했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군. 하이랜더들의 조력이 없었으면 아리아 장벽을 이토록 온전히 지킬 수는 없었을 테니. 오히려 진작 부르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이전까지는 단순히 괴물이었을지 모르겠지만, 함께 성벽을 끼고 싸우면서 하이랜더에 대한 간부들의 이미지도 완전히 아군으로 굳어져 있었기에 반발은 따로 없었다.
나는 지금까지 이어졌던 논의를 카일의 도움을 받아 해석해서 하이랜더에게 말해주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녀석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자기 가슴을 쿵 하고 두들겼다.
“그렇다면 밤에는 우리들만 성벽 위를 지키겠다.”
카일이 그 말을 해석해서 사령부 안의 간부들에게 전하자, 모두가 놀란 표정을 짓고 하이랜더를 바라봤다. 그 표정을 살피던 하이랜더가 입을 열었다. 말하는 내용은 즉시 번역되어 간부들에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아직 쌩쌩하다. 밤을 지키는 일이라면 모든 하이랜더가 나설 필요가 없으니 서로 돌아가며 하면 되겠지.”
말을 마친 하이랜더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더니 사타구니를 긁으며 나를 향해 턱짓했다.
“이 성벽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이 녀석에게 들어서 충분히 이해했다. 중요한 곳이니, 지쳐서 비실거리는 녀석들에게 맡겨두고 싶지는 않다.”
하이랜더의 말을 들은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러면 부탁한다.”
왕국의 병사들이 휴식을 취하는 동안, 하이랜더들이 성벽을 지킨다. 대충 이야기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나쁘지 않은 일이다. 아직 기력이 잔뜩 남아있는 하이랜더들이 경계를 서준다면 그만큼 병력들이 취할 수 있는 휴식시간은 길어질 테니까.
“경계를 서는 법은 알고 있겠지.”
미로스의 말에 하이랜더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성벽 밖의 버러지들이 무기를 들고 성벽으로 다가오려 들면, 네 녀석들을 깨우면 되는 거 아닌가. 어려울 것도 없는 일이다.”
종소리 같은 건 필요 없을 거다. 어차피 하이랜더들이 고함을 치기 시작하면 수면 마취라도 당한 게 아닌 이상 일어날 수밖에 없으니까.
다음 주제는 물자 소모 상황이었다.
“예정보다 더 많은 물자를 소모했습니다.”
화살은 물론이고, 발리스타에 끼우는 창과 투석기가 사용한 돌덩이. 거기에 더해서 성벽 위에서 쏟아낸 타르까지. 성안에 준비해 놓은 물자는 상당한 양이었지만, 이번 전투에서 소모된 양도 상당했다.
“제국군이 그 언데드 괴…….”
간부가 이야기를 잇다가 잠깐 옆에 앉아있는 하이랜더를 흘긋 본 다음 큼, 하는 소리를 냈다.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의 선조들을 앞세워 화살을 비롯한 소모품을 받아내며 전진하는 방식으로 물자가 빨리 소모됩니다.”
확실히,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은 화살을 받아내는 능력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탁월하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왕국에서 보급품의 전달은 언제 이루어진다고 하던가?”
미로스의 말에 간부 하나가 서류를 살펴보고는 그닥 밝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천상,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의 병력들이 도착한 이후에나 추가 보급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미로스가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량은 그때까지 버틸 양이 충분히 있다. 문제는 소모품인데. 여건이 허락하는 상황이라면 병사들이 조준 후 사격을 하도록 전파하지.”
조준 후 사격을 한다고 해도 큰 변화는 없을 것이다. 애초에, 밀려오는 적을 생각해보면 화살은 그냥 눈 감고 하늘로 쏴 올려도 성벽 아래의 누군가가 맞을 정도로 많으니까. 정조준이 문제가 아니라, 화살 백 발 정도는 맞아야 쓰러지는 언데드 하이랜더들의 맷집이 문제의 핵심이다.
“기사들의 역할이 중요하겠군. 간부들도, 병사들의 지휘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 선 안에서라면 적극적으로 언데드 하이랜더들을 처리하도록.”
“알겠습니다.”
미로스는 곧이어 앉아있는 하이랜더를 보고 말했다.
“하이랜더들도, 우선적으로 언데드가 된 선조에게 안식을 선사하는 데 집중해 줬으면 한다.”
사실, 대처법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빈약한 편이긴 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가 수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치였다.
“마법사들은 언제나 주의 깊게 전장을 살피고, 오늘 수성전에 있었던 공성탑의 폭발 같은 사태가 성벽 근처에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방지해야 한다.”
엘렌이 미로스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지시가 온다면,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대응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사상자의 숫자.
“중상 560, 경상 1513, 사망 770입니다. 또한, 교전 중 하이랜더 13명이 전사했습니다.”
그 무수한 공세를 막아낸 것치고는 명확하게 적은 사상자다. 물론 죽은 사람들과 하이랜더들은 추모해야겠지만, 이 정도의 병력 손실로 저 정도의 공세를 막아냈다는 건 분명히 긍정적인 소식이었기에, 보고하는 간부의 표정도 그럭저럭 밝은 편이었다.
“적은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추산됩니다. 보급품의 조달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후 교전에서 보급품의 소모량을 줄이는 데 집중한다면 충분히…….”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이후에 이어지는 공습은 지금처럼 피해가 적을 수는 없을 겁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틴 레드우드의 의견이 맞다. 적은 이번 공습에서 성벽 앞의 공호를 메꾸는 데 성공했어.”
사실상, 이번 싸움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병사나 하이랜더들이 아니라, 성벽 앞에 파여 있던 공호였다. 적은 이 호를 메꾸기 위해 막대한 인력을 소모했고, 결국은 그 호를 채우고, 공성병기가 지나갈 수 있는 도로를 까는 데 성공했다.
“발생한 사상자의 대부분은 공호가 메꿔진 다음 발생했습니다.”
공호가 메꿔진 다음 적의 공세는 약 2시간 동안 이어졌고, 공호를 메꾸는 데 소모된 시간은 거의 9시간에 달한다. 적의 공세가 진행된 시간을 다 합치면 약 11시간이다.
공호가 메꿔진 이후 진행된 2시간 사이의 공습으로 그 정도의 피해가 발생했다 공호가 메꿔진 지금, 또다시 10시간 이상의 공세가 이루어질 경우…….
“다섯 배 정도의 사상자가 발생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물론, 실제로 다섯 배의 차이가 생기지는 않겠지만 지금보다 큰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 한다.
“내일 교전 상황을 확인하고 판단해야겠지만, 어쩌면 제2성벽으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릅니다.”
성벽은 세 개다. 현재 우리가 방어하고 있는 건 첫 번째 성벽이다. 뒤로 물러나면 다시금 적은 두 번째 공호를 극복하고 다시 두 번째 성벽을 두들겨야 한다. 미로스가 내 말에 대답했다.
“벌써 제2성벽으로 퇴각할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제1성벽에서 적어도 두 번의 공세는 더 막아내야 한다.”
미로스의 말을 들은 간부가 재빨리 대답했다.
“제1성벽에서 막아야 합니다.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에서 향하고 있는 지원군을 고려해본다면, 성벽은 하나도 내어주지 않는 편이 추후 작전 전개를 고려해보면 무조건 득이 됩니다.”
저 말은 사실이다. 적이 제1성벽을 점령하면, 굉장히 까다로운 그림이 그려지게 된다. 적이 제1성벽을 낀 상황에서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의 병력들이 당도하게 되면, 우리와 도착한 지원군은 제1성벽을 포위하고 제국의 병력을 두들겨야 한다.
공성과 수성의 입장이 뒤바뀌게 되는 것이다.
“저 말이 맞습니다. 치명적인 수준의 피해를 각오하고서라도 제1성벽을 끼고 있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를 보호하던 공호는 우리가 극복해야 하는 장애물이 되고, 우리를 적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제1성벽은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난의 벽으로 변모한다.
“만약, 우리가 계속 밀려서 제2성벽까지 내주고 제3성벽으로 후퇴하게 된다면 그때는 도착한 지원군이 그 의미를 크게 상실합니다.”
제1성벽만 내준 상황이라면 우리와 지원군이 같은 성벽을 포위하고 두들기는 형세라도 만들 수 있다.
하지만 제2성벽까지 제국군에게 내주게 되면 지원군과 주둔군이 서로 다른 성벽을 두들겨야 하는 상황으로 변한다. 아리아 장벽을 다시 수복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아군 피해가 굉장해질 거다. 물론, 이미 한 번 무너진 성벽이기에 성문이나 피해를 입은 성벽을 완전히 복구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그래도 성벽은 성벽이니까.
“일단, 의견 자체는 제1성벽을 포기하면 안 된다는 쪽으로 굳어진 것 같군. 그럼 향후 작전 방침도 그에 맞춰 조정해야겠어.”
그 말에 나는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교전 중 퇴각은 사실상 불가능할 겁니다. 하이랜더들이 수긍하지 못할 겁니다.”
말을 마친 나는 슬쩍 자리에 앉아있는 하이랜더를 바라봤다. 내 말을 통역받은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적을 마주하고 무기를 부딪치는데 뒤로 빠질 수는 없다!”
봐, 저러잖아. 하이랜더들이 그나마 납득해 줄 수 있는 아군의 후퇴 시점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난 다음이다.
승전, 즉 적이 공세를 포기하고 물러난 다음에는 뒤로 빠지는 것으로 하이랜더를 설득해 제2성벽으로 빠질 수 있을 거다.
안타리아 관문 방어전 성공 이후 이동하는 것에 대해서는, 하이랜더들이 불만을 표시하긴 했지만 어쨌든 수긍해주었으니까. 하지만, 교전이 일어난 상황에서 뒤로 빠지는 건 절대 하지 않을 녀석들이다.
“그렇군. 결국 적의 공세를 막아낸 다음 잔여 병력을 파악해서 향후 제1성벽에서의 농성이 가능할지를 파악해야 한다는 건가.”
미로스는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었다.
“알았네. 퇴각 시점에 대해서는 마틴 레드우드의 조언을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어.”
말을 마친 미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가장 좋은 상황은 지원군의 도착 전까지 제1성벽을 내주지 않는 것이다. 모두 당면한 과제의 달성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수고를 아끼지 말고, 지금은 다음 적의 공세에 대비해 병력에게 충분한 휴식을 보장하도록. 꼭 필요한 작업 이외에는 병력을 헛되이 동원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말을 마친 미로스가 하이랜더의 앞에 서서 고개를 약간 숙였다.
“또한, 아군의 휴식여건을 보장해주기 위해 고된 일을 마다하지 않는 하이랜더들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보낸다.”
그 말을 통역받은 하이랜더가 흠, 하는 소리를 냈다. 회의는 이걸로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