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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164화 (164/275)

164화

며칠 뒤, 아직 해가 제대로 얼굴을 들이밀지도 않은 새벽.

하이랜더들의 고함이 들려왔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저 의미 없는 외침으로 들렸겠지만, 내 귀에는 명확하게 그 말을 이해했다.

적이 온다. 일어나라.

그 외침을 듣자마자 나는 자리에서 팍 하고 일어나 갑옷과 검을 챙겨 밖으로 튀어나오며 외쳤다.

“전원 기상! 적의 공격에 대비해라!”

말을 마친 나는 수통을 꺼내 얼굴에 물을 쏟아 정신을 차리고, 곧장 성벽 위로 달려 올라갔다. 성벽 위에 올라서자, 어슴푸레한 새벽하늘 아래로 진영을 잡은 적의 병사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말 그대로 공세를 시작하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다.

“맞게 본 건가?”

옆에 서 있는 하이랜더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는데? 믿고 맡기길 잘했어.”

말을 마친 나는 잠에서 깬 병사들을 보며 외쳤다.

“빨리 움직여 이 자식들아! 각 구역별로 배당된 병력은 빨리 성벽 위로 올라오고, 성문 앞에 대기할 병력들은 성문 앞에! 발리스타와 투석기에 붙을 병력은 빨리 붙고, 끓이고 있던 타르와 물의 상태를 확인해!”

빠르게 밖으로 나온 기사들과 미로스도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서 병사들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13번 구역으로 화살 빨리 옮겨줘!”

“투석기 담당, 빨리 올라와!”

적과 아군이 서로 부지런하게 움직이며 한쪽은 공격을, 다른 쪽은 방어를 준비한다.

“적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렇게, 새벽 일찍부터 다시금 시작되려 하는 전쟁을 앞두고 긴장이 팽팽하게 자리 잡은 가운데. 적군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뭘 하려는 거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쩍 벌렸다. 제국군이 정면에 앞세우고 있는 건 어제와 마찬가지로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였다. 문제는, 아군의 사거리가 닿지 않는 곳 앞에 앞세운 언데드 하이랜더들을 딱 멈췄다는 거다. 나는 긴장한 표정으로 녀석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이런 씨팔 새끼들이.”

이어진 장면에 우리는 할 말을 잃었다. 동행하고 있던 제국군 병사들이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의 면상에 소변을 보며 낄낄대는 장면이었다. 나는 급하게 고개를 돌려 성벽 위를 지키던 하이랜더들의 표정을 봤다.

눈에 실핏줄이 터지는 게 문제가 아니다. 지금 당장이라도 성벽 아래로 뛰어내려 적을 향해 달려갈 표정을 짓고 있는 하이랜더들의 모습이 보인다.

성 밖으로 하이랜더들을 끌어내려는 거다.

“알고 있겠지만, 도발이야. 냉철하게 생각해.”

하지만 하이랜더들은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제국 병사들이 선조들의 시체 위에 하는 개짓거리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으직, 하는 소리가 들려서 확인해보니 성벽의 난간을 잡고 있던 하이랜더의 손안에서 난 소리였다. 녀석이 손을 치우자, 박살 난 난간의 부스러기가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우리가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 거냐. 저런 행위까지 참아야 하는 건가?”

옆에 있던 하이랜더가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말했다. 그 목소리의 떨림 속에는 배 아래에서 끌어올린 것 같은 지독한 분노가 자리 잡고 있었다.

“미안하다. 참아라. 이 성벽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된다.”

내 말에 하이랜더가 손을 휘둘러 바닥을 쿵 내려찍고 소리 질렀다.

“으아아아아!”

그 고함을 들은 제국군들이 키들거리면서 지들끼리 얼굴을 마주치고 으아아아! 하는 소리를 낸다. 대놓고 놀리는 중이다. 이건 별로 좋은 상황이 아닌데.

하이랜더들이 저 꼴을 보고 성벽에서 뛰어내려 버리면 답이 없다. 제아무리 하이랜더라고 해도 적의 숫자가 너무 많다.

“게다가…….”

나는 수정구를 붙잡고 엘렌을 불러 녀석들을 확대해서 보여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가능하지만, 오래는 힘들어. 제국 마법사들이 방해할 테니까.”

“가슴털이 복실거리는 남정네들이 시체에 소변 보는 장면이잖아. 오래 볼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어.”

아침 식사도 하지 못했는데 밥맛부터 떨어뜨릴 생각은 없다.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이 마법을 사용해 녀석들의 모습을 확대했고, 나는 빠르게 녀석들을 살폈다.

복장은 일반적인 제국군 병사의 표준 복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영양 상태와 근육의 발달 상태가 굉장히 좋다. 게다가 턱수염 근처나 겨드랑이, 머리를 긁은 흔적도 없다. 몸에 이가 없다는 뜻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옆에 서 있는 하이랜더를 보고 말했다.

“뛰쳐나가서 저 짓거리를 멈추고 싶나?”

내 말에 옆에서 있던 하이랜더가 소름 끼칠 정도로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질문 같지도 않은 질문이군.”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너희들은 복수를 위해 이 자리에 모였다.”

내 말에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복수를 위해서는 참아야 한다는 건가? 그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우리는 뛰쳐나가지 않고 있는 거다. 필사적으로 견디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저 행동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만들어낸 자를 산채로 씹어먹는 거니까.”

이성과 지성, 논리로 참고 있는 게 아니다. 복수라고 하는 목표가 바로, 하이랜더들로 하여금 저자들에게 달려나가는 것을 참게 하는 원동력이다.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한 가지 조건에만 동의한다면 우리는 나가서 싸울 거다.

내 말에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듣고 있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우리는 바로 싸움을 중지하고 성벽으로 후퇴해야 한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몸을 움찔했다.

“지금 네가 하는 말을 알고 떠드는 거냐.”

“하이랜더의 긍지와 명예, 신념과 전통을 버리라는 말이지. 알고 있어.”

내 말에 하이랜더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그런 녀석을 보고 말을 이었다.

“이례적인 상황에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법이지. 오멘티오라는 것 자체가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잖아?”

이미 하이랜더들이 어긴 자신들의 전통은 한둘이 아니다.

뭉쳐서 다니지 않는다, 다른 종족들과 협조하지 않는다.

이미 저 두 가지 전통을 어겼다면, 한 가지를 더 어기는 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내가 신호를 보내면, 후퇴해야 한다. 그 조건이 아니라면 눈앞의 작은 분노 때문에 너희들은 여기까지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될 거야.”

하이랜더들이 죽을 각오로 달려든다면 제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겠지만, 결국 하이랜더들은 전멸할 거다. 제국군의 숫자와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의 숫자를 고려해본다면, 그건 필연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방어작전을 성공한 후, 역공을 가해야 한다. 하이랜더는 그 역공 작전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것이다.

여기에서 전멸시킬 수는 없으니, 결국 싸우다가 퇴각해야 할 것이다.

“내가 신호를 보내면 성벽으로 도망쳐. 지금 이 자리에서 저 광경을 바라보는 모든 하이랜더들이 이 조건에 동의하고, 맹세와 함께 오른팔을 걸어. 그게 아니면, 우리는 절대로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어. 하이랜더의 전통대로 퇴각 없이 싸운다면 너희들은 전멸할 거다.”

말을 마친 나는, 나를 내려다보는 하이랜더와 눈을 마주쳤다.

“여기에서 전멸하기 위해서 그 먼 길을 온 건 아니잖아.”

“……그렇다.”

나는 그 말에 녀석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전통과 관습, 긍지와 명예 같은 건 잠깐 잊어. 우리의 적은 지금 승리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어. 그렇다면, 우리도 수단과 방법을 가리면 안 돼.”

내 말을 듣고 있던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다른 하이랜더들과 말을 나눠봐야 할 것 같다.”

그런 대답을 남긴 하이랜더가 허공을 향해 크게 외쳤다. 할 말이 있으니, 하이랜더들은 전원 성벽 아래로 내려오라고. 내가 한 말이 아니었고,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내려오라는 것이었기 때문에, 하이랜더들은 얼굴에 지독한 분노를 머금은 채 성벽 아래로 내려왔다.

그렇게, 천오백의 하이랜더가 한자리에 모였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다가 속으로 희미하게 웃었다.

이러면 나쁘지 않은데. 하이랜더의 운용 중 가장 까다로운 게 운용 과정에서 후퇴를 전제하면 안 된다는 점이었는데. 이번에 한 번 예외를 만들어 놓고, 잘만 설득하면 하이랜더 운용의 최대 단점을 지워버릴 수 있다.

“눈치는 빠른 편이라니까.”

올리비에도 내가 하이랜더들과 함께 아리아 장벽으로 향했을 때부터 하이랜더는 공격 후 퇴각이라는 형식으로 운용할 수 없다는 점을 눈치챈 게 확실하다. 그러니 이런 도발을 걸어오지.

“여기서 하이랜더들이 끝까지 전투 중 후퇴라는 개념을 용납하지 못한다면…….”

올리비에가 상정한 상황대로 흘러가게 된다. 말로는 절대 허락할 수 없다고 했지만, 하이랜더들이 과연 선조의 시체에 가하는 모욕을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결국 하이랜더들은 뛰쳐나갈 것이고, 싸우다가 전멸할 것이다. 그럼, 가장 중요한 전력을 잃어버린 이후 진행되는 아리아 장벽 수성전의 끝에는 패배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지겠지.

“제발.”

올리비에는 내가 하이랜더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쪽에 판돈을 올리고, 승부수를 던졌다.

이대로 공방을 이어간다면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에서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이 싸움을 끝내기 힘들다고 판단한 거다. 왕국군과 하이랜더는 여태 동안 잘해주고 있었지만, 한 번의 판단으로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

얼마 뒤, 하이랜더들이 성벽 위로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하이랜더들을 불러모았던 녀석이 나를 바라봤다.

“미안하지만, 그 조건은 수락할 수 없을 것 같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눈을 감고 침을 삼켰다. 이런 망할. 결국, 올리비에의 예상대로 흘러가는 건가.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건 어때.”

약간 떨리는 내 목소리를 들은 하이랜더가 대답했다.

“이미 전원의 의견을 듣고 나서 내린 판단이다. 번복할 생각은…….”

그렇게 말하면서 성벽 너머의 적을 바라보던 하이랜더가 하던 말을 멈췄다. 나는 그때 수상함을 느끼고 옆에 있던 하이랜더가 바라보는 장소로 시선을 던졌다.

언데드로 변한, 여성 하이랜더가 병사들 쪽으로 끌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녀석들이 그 여성 하이랜더를 향해 저지르는 짓거리는 다른 하이랜더들을 향해 저지르던 행위와는 그 궤를 달리하는 미친 행위였다.

이전에, 산맥에서 겨울걸음의 아내를 봤을 때 했던 생각이 있다. 이 정도면 그냥 덩치를 키워놓았을 뿐이지 인간의 미적 감각으로 봐도 상당히 아름다운 외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

내가 했던 생각을 저 새끼들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 결과 벌어진 것은 차마 입으로 담을 수 없는, 토악질이 올라오는 더러운 행위다. 자신들이 직접 한 것은 아니다.

언데드 하이랜더 둘을 이용해, 전장 한가운데에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지른 말도 안 나오는 짓거리.

그 장면의 역겨움에 몸을 떨면서도, 내 머릿속 한편에는 순간적으로 희망이 자리 잡았다.

어쩌면…… 저 장면을 보게 된다면 하이랜더들이 이미 내린 결정을 번복할지도 모른다.

그 모습을 보던 하이랜더의 입이 열렸다.

“번복하겠다! 다른 자들은 어떻게 생각하나. 용납하지 않는다. 저 새끼들을 상대할 때만큼은, 하이랜더로서 지키고 있던 모든 긍지와 명예, 오랜 시간 지키던 관습과 전통을 모두 버릴 것이다!”

그리고, 성벽 곳곳에서 하이랜더들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같은 생각이다! 라고 하는 외침. 모든 하이랜더들이 한마음으로 외친 다음, 하이랜더들이 손에 쥐고 있던 무기를 들어 올리고 일제히 외쳤다.

내 말에 틀림 있다면 죽는 그 날까지, 이 손은 무기를 쥐는 일 다시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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