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성벽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하이랜더들의 외침을 듣고 있던 올리비에는 잠깐 하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사령관. 내가 뭐라고 지시했었죠?”
살얼음이 낀 것 같은 올리비에의 말에 사령관이 잠깐 움찔하고는 대답했다.
“저 행위를 저지른 기사의 신병을 확보했습니다. 바로 재판에 회부해서…….”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잖아요.”
이어지는 말을 올리비에가 잘라버린다. 사령관이 침을 삼키고 나서 입을 열었다.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을 활용해, 성벽 너머에 있는 하이랜더들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극하라고…….”
올리비에가 그 말에 대답했다.
“그건 내가 한 말이 아니야. 나는 정확하게 지시했거든.”
올리비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더 이상 존대가 아니다.
그렇다고 화가 난 것도 아니다. 올리비에의 몸속을 휘몰아치는 감정은 허탈함과 한심함이었다.
“읊어줄까?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를 전방에 내세워 바보 취급하고, 몸에 하이랜더를 비웃는 낙서를 하세요. 움직이는 기색이 없다면 소변을 보는 것도 좋겠네요. 다만, 그 행위를 시행하는 자들은 기사로 한정하죠. 어젯밤 회의를 하고 있을 때 내가 했던 말이야.”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처럼 그때의 풍경과 소리가 조금의 손상도 없이 올리비에의 머릿속에 남아있다. 성벽 너머에 있는 하이랜더들을 온갖 수단을 동원해 자극하라는 식의 자유분방한 지시를 내린 기억은 없다.
올리비에의 말에 사령관이 대답했다.
“저는 그 지시를 듣고 판단하기를…….”
“판단? 그것도 내가 말했던 것 같은데. 내가 지시한 내용에 대해서는 자의적인 판단을 곁들이는 일 없이, 정확히 지시한 행동을 수행하는 데 집중하라고.”
올리비에는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걱정해 미리 경고까지 했다.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인 줄 몰랐습니다.”
“중요한 일이니 꼭 지시대로 수행하라고 말했어. 빠져나가려고 수작 부리지 마.”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이 녀석의 관자놀이에 작살이라도 박아서 아예 생각이라는 걸 하지 못하게 했어야 하는 건가.
“이래서 내가 도무지 정을 붙일 수가 없는 거야.”
거의 다 완성해 놓으면, 슬금슬금 다가와서 전부 망쳐버리는 경우가 생긴다. 그것도, 너무나도 황당하고 멍청한 방식으로 저지른다.
올리비에가 칠색 내각의 머리들을 다룰 때도 몇 번인가 있었던 일이다.
코랄린 관문을 함락시키기 위해 피를 뽑아낸 다음 아직까지도 몸에 남아있는 빈혈 기운이 아니었다면, 모든 일을 올리비에가 손수 했겠지만…….
그녀의 몸 상태는 그런 일과를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되지는 못했었다. 때문에 구체적인 지시를 통해 다른 사람을 시켰지만 결국 이런 꼴이다.
“지시하면 수행한다, 그게 그렇게 어려웠던 걸까.”
올리비에의 말에 사령관은 대답이 없다. 그녀가 키우는 강아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텐데.
아니, 강아지가 아니라 널빤지도 그 정도는 할 수 있다. 불을 붙이면 타오르고, 물에 던지면 떠오른다.
이 녀석들은 꼴에 뭐라도 되는 것처럼 되도 않는 말을 웅앵웅앵 떠들지만, 사실은 나무토막만도 못한 것들이다. 그런 주제에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한심하고, 또한 안타깝다.
“어떻게 처리할지 궁금했는데.”
올리비에가 안타까워하는 이유는, 결국 사령관이라는 작자가 멋대로 올리비에의 말을 판단해서 저지른 일 때문에 정작 기대하고 있던 걸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마틴 레드우드는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보고 싶었던 장면이 싹둑 잘려나가 버렸다. 지금 느끼고 있는 허탈한 감정의 뿌리도 그 점에 기인하고 있다.
“이후……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사령관의 말에 올리비에가 대답했다.
“어머.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더니.”
무심한 올리비에의 말에 사령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죄송합니다.”
올리비에는 그 말을 무시하듯 흘려들으며 말했다.
“하이랜더들이 움직이면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은 뒤로 빼고, 병사들과 기사들로 상대해.”
“하지만, 그럼 피해가 막대해질 겁니다.”
그러라고 하는 거다. 이렇게 된 이상 아리아 장벽을 함락시킬 수는 없다. 거기에 더해서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에서 원군이 올 것이다. 그 원군이 도착하고 난 다음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까지 도착해버린다.
그리고, 역시 이것들은 머리를 왜 달고 다니는지 모르겠다.
“판단 말고, 수행. 방금 전에 말했던 것 같은데.”
“……알겠습니다.”
지금 성벽 위에서 일제히 뭐라고 맹세하듯이 외치는 하이랜더들은 제국군에 어느 정도 피해를 입힌 다음에는 퇴각할 것이다.
제국군은 바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코랄린 관문까지 후퇴해야 한다. 가장 좋은 건 지금 바로 후퇴하는 거지만…….
이 상황에 코랄린 관문까지 후퇴하라고 지시를 내린다면 병사나 간부들이 '왜 싸워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어서 후퇴하는 겁니까?' 따위 불만을 떠들 거다.
고로, 제국군은 여기에서 상당 숫자 죽어야 한다. 그래야 후퇴할 때 안 짖을 테니.
“아, 성문 열리네.”
지금 여기에 있는 건 위험하다. 올리비에는 곧바로 말을 타고 달려 후방으로 빠졌다.
* * *
서서히 열리는 성문 너머에서,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중얼거렸다.
“인간도 아닌 버러지 같은 씹새끼들. 인두겁을 뒤집어쓰고 어떻게 그런 미친 짓거리를 할 수 있지.”
분명하고 명확하게 선을 넘은 행위였다. 물론 덕분에 하이랜더들이 완전히 눈깔이 뒤집혀서 자신들의 전통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긴 했지만, 그딴 짓거리를 한 녀석들에게 감사의 마음 같은 걸 품는 건 반론의 여지 없는 사이코패스지.
“보통, 성문을 열고 나가는 건 미친 짓이라고 알려져 있지.”
실제로, 현 상황에서도 하지 않는 편이 더 좋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하이랜더들이 뛰쳐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해버렸으니까. 그렇다면 최대한 피해를 주고, 최소한의 피해를 입은 채 돌아오는 것만이 상책이다. 성문은 거의 다 열린 상태고, 하이랜더들은 밖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하기 시작한다.
그 사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상하단 말이야. 그 인륜을 벗어난 짓거리를 정말 올리비에가 시켰을까.”
그런 짓을 하면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해서 몰랐을 것 같지는 않다. 실제로 그 선을 넘기 전까지는 하이랜더들도 분노하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성미를 버릴 생각을 하지 않았잖아.
“아래 녀석들이 실수했을 수도 있지.”
어차피 올리비에가 실수를 했건 아니건 변하는 건 없다. 만약 이것까지 올리비에가 노리고 있었다면 적진에 떠 있는 헤로스의 머리통은 그 위치를 바꿔 우리의 머리 위에 떠 있어야 한다. 내가 하이랜더들과 함께 성벽을 뛰쳐나가 한바탕 날뛰는 건 그 여자가 의도한 바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성문을 완전히 개방했습니다!”
성벽 위에서 병사의 외침이 들린다. 나는 곧장 검을 뽑아 들고 하이랜더들을 향해 외쳤다.
“적을 개박살 내다가, 내가 신호를 보내면 퇴각하는 거다. 절대 잊지 마라!”
“으아아아아아!”
우리는 성문 밖으로 뛰쳐나와 적을 향해 질주했다. 건조한 산머리 위에서 아래로 쭉 내리긋는 하이랜더들의 돌진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어난다.
“박살 내주마!”
돌진하는 우리를 향해 제국의 병사들은 화살을 쏴붙인다. 나는 브레이서를 발동하고 날아오는 화살들을 튕겨내며 대응했다. 하이랜더들은 그냥 맞으면서 달린다. 어차피 몸에 박히는 화살은 없다. 그 사이, 병사들은 바닥 부분이 뾰족한 방패를 땅에 박아넣고, 긴 창을 내세워 진형을 갖춘다.
귀엽기도 하지. 그런 걸로 하이랜더들의 돌격을 막을 수 있었다면 카루토스 타카운이 진작에 하이랜더들을 멸종시켰을 거다.
날아오는 화살들을 피하고 막아내며 달려가자 적진의 전방에 세워진 방패가 점점 커지기 시작한다. 거의 다 왔다.
충돌까지 3…… 2…… 1…….
퍼버버버버버버, 하는 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박혀있던 방패들이 비가 내린 뒤 물러진 땅에서 뽑아내는 당근처럼 쑥쑥 뽑혀나가고, 휘둘러지는 온갖 무기들이 방패 뒤에서 창을 들어 올린 채 억지로 공포를 견디던 제국의 병사들을 으깬다.
퇴각 타이밍을 확인해 하이랜더들에게 전달할 의무가 있는 나는, 이번에는 직접 전투에 참여하는 대신 약간 뒤로 물러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미친 녀석들, 성 밖으로 나와서 살아남을 성싶더냐! 전 병력, 거창! 이어서…… 돌진!”
아, 그래. 정면의 모루를 박살 내는 동안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 기마병을 통솔하며 우리의 측면을 노리고 창을 앞세워 돌격한다.
코앞까지 다가온 기마병을 향해 하이랜더가 손을 뻗어 그 머리통을 잡고는, 곧장 땅바닥으로 박아버린다. 들고 있는 무기를 휘두르자 제국의 기마병들이 타고 있던 말의 토막 난 시체와 제국 병사들의 박살 난 팔다리가 서로 뒤엉킨다.
“겨우 이 정도 주제에, 우리의 선조에게 그런 모욕을 주다니!”
하이랜더는 그런 외침과 함께 기마병들을 통솔하던 기사 중 하나를 양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아…… 으아아아아! 살려, 살려!”
으득, 지지직, 하는 소리가 잠깐 들리나 싶더니 기사는 하이랜더의 양손에 꽉 붙잡힌 채 그대로 반으로 찢어졌다. 흘러내리는 내장, 피, 드러난 척추뼈와 쏟아지는 붉은 피.
“후퇴, 후퇴해라!”
“누구 맘대로 후퇴한다는 거냐! 진형을 유지하고 적을 압박…….”
멋대로 후퇴를 외치며 물러나는 병사들을 향해 호령을 이어가던 기사를 향해 하이랜더가 돌격해 무기를 휘두른다.
“이 괴물 같은 자식! 나는 제국의 기사로서……! 크아아아악!”
하이랜더가 휘두른 무기를 막아내기 위해 기사는 방패를 들어 올린다. 하이랜더가 휘두른 무기는 방패 위를 강타했고, 기사는 자신이 하려던 말을 비명으로 끝맺어야 했다. 방패는 박살 나고, 방패를 들고 있던 팔뚝의 뼈는 부서져 살을 찢고 나왔다.
“젠장, 젠장! 난 살아야겠어, 이건 지옥이야!”
어지간한 사람들은 대번에 방광이 활짝 열려 레몬주스를 질질 흘릴 정도로 살벌한 광경이 무수히 이어지고 있었다.
싸우던 병사 중 하나가 저런 꼴로 변해도 사기가 흔들릴 텐데, 심지어 병력을 통솔하던 기사들이 저 꼴이 되었다. 제국의 병사들은 완전히 사기를 잃고, 무기와 방패 따위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살려달라는 외침과 함께 등을 돌리고 도망친다.
“전투라기보다는 복수군.”
약간 뒤에서 이 모든 광경을 바라보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제국군의 진영을 바라봤다. 녀석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 많은 숫자의 장점을 살려서 그대로 포위하려고 하는 모양인데.
“뜰채로 고래를 잡으려는 격이지.”
포위한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다. 하이랜더들은 중세에 떨어진 탱크와도 같은 물건이다. 포위에 성공하더라도 실컷 날뛰다가 포위망 한 부분에 역량을 집중하면 순식간에 뚫어버릴 수 있다.
성벽 밖으로 튀어나온 하이랜더들이 위험해지는 시점은,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이 움직이는 순간이다.
“마법사들의 지원이다!”
뒤편의 적진에서 하이랜더를 노리고 마법이 쏟아진다. 제국의 병사들이 약간의 희망을 가진 채 그 광경을 바라본다. 가장 앞에 서서 피칠갑을 하고 있던 하이랜더의 머리통에 거대한 불덩이가 날아와 폭발한다.
“하, 하하하!”
병사들이 그런 웃음을 흘리며 불안한 표정으로 하이랜더를 바라봤다.
“…….”
폭발과 함께 일어난 자욱한 연기가 산머리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흩어진다. 머리통을 화염구에 얻어맞은 하이랜더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후욱, 하고 콧김을 내쉬자, 그나마 머리 주변에 떠돌고 있던 희미한 연기들이 도망치듯이 흩어졌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병사들도 연기처럼 흩어지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뭐 저런 새끼들이 다 있어!”
그러게 말이야. 뭐 저런 새끼들이 다 있담. 그나마, 뛰어난 기사들 몇몇이 달려들어 하이랜더를 상대하고는 있었지만, 이건 1대1이 성립하지 않는 전쟁이다. 지금 이 자리에 1500명 정도 되는 기사들이 있으면 모를까, 그게 아닌 이상 분노한 하이랜더들의 다구리를 맞고 견딜 수 있는 실력자는 그렇게 많지 않다.
“언데드 하이랜더를 앞세우지 않았다는 건…….”
제국군의 피해를 줄이고 싶었다면 언데드 하이랜더를 앞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그러지 않았다.
“후퇴할 생각이군.”
어차피 여기에서 버텨봤자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의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아리아 장벽을 함락시킬 수 없으니, 차라리 뒤로 빠질 생각인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와중, 저 멀리에서 가만히 서 있던 막대한 숫자의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서서히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여기까지만 한다! 돌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