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내가 고개를 젓자, 클로에가 나와 눈을 마주친다.
“적게 잡아도 오천 이상의 목숨이 걸린 일이야. 진다고 해도 나에게 해가 될 일은 없겠지만, 가능하면 이겼으면 하는 바람이 더 커.”
오천의 목숨이 걸린 일이다. 만약 일이 잘못된다면 그 사람들 중 대부분이 죽게 될 거다. 그걸 그냥 '하하하, 죽으면 어때. 그 이후에는 내가 하는 말이라면 다들 뻑갈 텐데. 다 죽어버려라!' 같은 생각을 하면서 신나게 키들거리기에는 나도 아직 인간성이라는 게 남아있긴 하다.
심지어 적도 아니고 아군이잖아. 아무리 그래도 아군이 죽는 거 보고 웃는 건 좀 심하지 않냐.
“그건 그렇죠.”
“거듭 말하지만, 말리지 않은 게 아니라 못 말린 거야. 그리고, 가능하면 그 사람들이 전공을 올리고 돌아왔으면 좋겠어.”
“그렇군요. 알겠어요.”
말을 마친 클로에는 식사를 마친 그릇을 마저 챙겨서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클로에가 나가고 난 다음, 잠깐 문을 바라보던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잠깐 창밖을 바라봤다.
“오늘 밤, 아니면 늦어도 내일 새벽이겠지.”
이미 정한 일을 뒤로 미루지는 않을 테니까.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잠깐 있던 나는 에이, 하는 소리를 내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섰다.
“추격전을 지휘하기로 되어있는 기사를 만나고 싶은데.”
밖으로 나온 나는 병사에게 물어 지휘실에서 추격전에 앞장서겠다고 한 기사를 찾아갔다.
“무슨 일이십니까?”
녀석은 자신의 방에서 갑옷을 손질하고 있었다.
“추격전, 조심해서 진행하셔야 할 겁니다.”
내 말에 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겠지요.”
“진심입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점이 보인다면 일단 멈추고, 소수의 병력을 활용해 전방의 정찰을 우선하셔야 합니다.”
기사는 기름에 적신 고운 모래를 갑옷에 비비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추격전의 의미가 없습니다. 나간 이상, 적에게 유효한 타격을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게다가 적은 큰 실수를 범해 병력의 사기가 바닥을 때린 채 퇴각하는 중 아닙니까. 도망치면서 뭔가를 준비하기는 힘들 겁니다.”
나는 그 말에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병력의 선두가 아니라 후방에 있으셔야 합니다.”
지휘관이 사망한다면 병력들은 뭘 해야 하는지 하달받지 못한다. 우왕좌왕하는 병력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내 말을 들은 그가 하하하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제가 앞장서지 않는다면, 다른 누가 앞장서겠습니까.”
나는 그 말에 눈가를 잠깐 문지르다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노련하고 경험 많은 기사 한 분을 후방에 배치하시는 걸 추천합니다.”
네가 죽은 이후에도 병력을 지휘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내 말을 들은 기사가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마틴 레드우드 님은 전장에서 보여주시는 모습과는 다르게 굉장히 신중하시군요. 하긴, 그러니 전장에서도 그 정도의 공을 세우실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함께 전장에 선 시간은 짧지만, 많은 것을 배우는 것 같습니다.”
그런 소리 하지 말고 인마.
“조언해주신 내용은 명심하고 실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따로 청을 드렸던 기사분이 계십니다. 여러 번의 국지전은 물론이고, 꽤나 큰 규모의 전쟁도 다섯 번 이상 겪어보신 분입니다. 그분을 후방에 배치해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달라고 하겠습니다.”
그 대답을 들은 나는 잠깐 복잡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조심하겠습니다. 하지만, 병력의 운용에 있어 지나친 신중함은 외려 독이 되는 법입니다. 적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밀어붙인다면, 적이 어떤 준비를 해놓았다고 해도 능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뭐, 병귀신속인가 뭔가 하는 거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을 향해 인사했다.
“알겠습니다. 무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마틴 님도 무운을 빕니다. 시간을 내서 여기까지 와주신 점에 감사합니다.”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간 나는 잠에 들었다.
* * *
깊은 밤, 제국군이 퇴각의 움직임을 보인다는 소식을 들은 기사는 말 위에 올라 열리는 성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할 수 있다.”
스스로를 향해 그렇게 중얼거린 기사는 침을 삼키고 자신과 함께 하는 병력들을 향해 말했다.
“제국 놈들이 꼬리를 말고 퇴각하고 있다. 마틴 레드우드와 하이랜더들은 그들의 자격을 증명했다. 그렇다면 왕국의 자랑스러운 장병들이여, 그대들도 보여줘야 하지 않겠는가.”
말에 탄 기사와 병사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깊은 밤에 진행되는 추격전에서 쓸데없는 소음은 금물이니까. 하지만, 어둑한 밤 속에서도 빛나는 장병들의 눈이 외침을 대신하고 있었다.
“가자. 도망치는 제국군에게 왕국의 땅을 침범한 대가를 치르게 하자.”
할 수 있다. 해내지 못할 리가 없다. 마틴 레드우드가 저 어린 나이에 그 정도의 전공을 쌓고 유명세를 떨쳤다. 그렇다면 내가 못할 리가 없다. 기사는 그런 생각을 되뇌면서 완전히 열린 성문을 확인하고 검을 뽑아 들었다.
“가자!”
성문을 나와 말들이 달리기 시작한다. 성벽 앞에 쌓여있는 무수한 전장의 흔적 위로, 금속 편자를 박아넣은 말들이 질주하기 시작했다.
“이랴, 이랴!”
투레질과 함께 병사를 태운 말이 근육을 꿈틀거리며 서늘하게 식은 밤공기를 가르고 질주하기 시작한다.
“진형을 갖추는 걸 잊지 마라!”
그냥 무턱대고 달리는 게 아니다. 서서히 서로 속력을 조절하며 기병들은 단순히 앞을 보고 달리는 본능적인 질주를 넘어서, 하나의 살아있는 생물이라도 된 것처럼 나아간다.
“이미 진지를 비운 모양입니다.”
주변을 살피던 병사의 말에 기사가 혀를 차고는 말에서 내려 화톳불에 쌓인 재 위로 손을 올려본다.
“아직 온기가 남았군.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서둘러 이동한다!”
다시 말에 오른 기사가 병력을 이끌고 나아가기 시작한다.
“저기, 퇴각 중인 병력들이 보입니다! 후방에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을 배치하고, 이동 중에 있습니다!”
약 30분 뒤, 마침내 왕국의 추격대는 퇴각하는 제국군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었다. 횃불을 들고 이동하는 긴 행렬.
“좋아, 드디어 찾았군. 적이 우리를 파악한 것 같나?”
기사의 말에 병사가 대답했다.
“아직 파악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만간 발견되기는 할 겁니다.”
별다른 조명도 없이 어두운 밤을 달리는 중이다. 기사는 그 말에 웃었다.
“이곳은 대대로 파이크 왕국의 땅이었지.”
어두운 밤이라고 해도 약간의 조명만 갖춰진다면 이동에 큰 문제는 없다. 눈을 가늘게 뜨고 적진을 살피던 기사가 희미하게 웃었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 이번에는 지나치게 신중했던 모양이군.”
신중함은 미덕이지만, 가끔은 그게 오히려 발목을 잡을 때도 있는 법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적은 추격하는 병력에 대한 대비가 되어있지 않아 보였다.
“좋아, 전원, 진형을 갖춰라. 나팔수는 내 신호에 맞춰 나팔을 불어라. 첫 나팔 신호와 함께 돌격하고, 두 번째 나팔 신호와 함께 쐐기진을 갖춘다.”
“알겠습니다. 추가 정찰은 필요 없겠습니까?”
병사의 질문에 기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다. 적이 저렇게 무방비로 퇴각하는데 추가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지. 한바탕 휘저어주자.”
“지시를 따릅니다.”
병력이 빠르게 진형을 갖췄다. 어두운 밤, 말들이 투레질하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마침내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격하라!”
“으랴아!”
왕국의 기마병들이 우렁찬 소리와 함께 돌진하기 시작했다. 퇴각하던 제국군의 후방이 왕국군의 나팔소리를 듣고 크게 요동치기 시작한다. 급하게 종소리가 울려 퍼지고, 병력들이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제국군 간부들의 다급한 호령 소리가 들린다.
“이미 늦었어, 자식들아! 나팔수, 불어라!”
두 번째 나팔이 울려 퍼졌다. 기병들이 서로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서서히 진형을 쐐기진의 형태로 바꿔가기 시작한다.
제국군은 제대로 진형을 갖추지 못했다. 빠르게 달린다면, 적이 제대로 대기병진을 갖추기 전에 도착할 수 있다.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한 기사의 눈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귀가 찢어질 것 같은 폭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기병을 태운 채 달리던 말들이 공포에 질려 급작스럽게 투레질을 하며 걸음을 멈춘다.
“이건?!”
땅 아래가 폭발하며, 시뻘건 내장과 살덩이, 뾰족하게 부러져 나간 뼛조각들이 솟구치며 진형을 바꾸던 기병들을 휩쓸었다. 그제서야, 병력을 지휘하던 기사는 주변 땅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었다. 여기저기, 땅을 파내고 뭔가를 묻은 흔적들이 보인다.
“돌격 중…….”
급하게 돌격을 중지시키려던 기사는 근처의 땅 아래에서 일어난 폭발에 휩쓸렸다. 생의 마지막 순간 폭발에 머리가 부서지기 직전 기사의 머릿속에 울려 퍼진 말은 금일 찾아왔던 마틴 레드우드가 그에게 해주었던 조언이었다.
그 장면은, 제국군의 진형에서도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올리비에는 말을 타고 이동하다가 뒤에서 울려 퍼지는 굉음에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굉장합니다. 오천이 넘어가는 적의 기병이……!”
옆에서 사령관이 경악한 표정을 지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별다른 감흥 없다. 애초에 그 남자였다면 여기에 오지도 않았을 테고, 설사 왔다고 해도 저런 너절한 개수작에 넘어가지도 않았을 거다. 흥미 없는 일이다. 애초에, 이런 일로 저렇게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안 그래도 감흥 없던 마음이 더 가라앉는다.
“왕국의 추격대가 수상하다고 느낄 수 있었던 순간은 많았어.”
“……그렇습니까?”
올리비에는 슬쩍 사령관의 얼굴을 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화톳불의 재가 아직 따뜻한데 30분이나 넘게 추격해서야 제국군을 만나는 데 성공한 점.
후방을 지키기 위해서는 당연히 언데드 하이랜더를 뒤로 빼두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점.
이미 만들어 놓았을 육괴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는 의문점.
잠깐이라도 수상함을 느꼈다면 수색을 위해 소수의 병력을 먼저 보냈을 테고, 폭발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깊게 파묻지 않았던 육괴들은 당연히 수색 과정에서 들킬 수밖에 없었을 거다.
“천 명 정도를 추려서 적의 잔여 병력을 처리해. 나머지 병력은 서둘러 코랄린 관문까지 이동시켜.”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계속해서 말을 움직였다. 멍하니 폭발 후의 광경을 바라보고 있던 사령관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올리비에가 지시한 일을 빠르게 수행하기 시작한다.
제국의 병사들은 왕국의 추격군에 피해를 입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섣부르게 뒤쫓았던 왕국의 추격대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몇 시간 뒤, 말을 타고 이동하던 올리비에 쪽으로 급하게 다가온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거의 전멸이나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파악된 기병의 숫자는 약 오천에, 기사와 마법사도 제법 있었습니다. 하지만, 살아 돌아가는 데 성공한 자는 오십이 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이걸로 한풀 죽은 병력들의 사기도 약간이나마 회복되었을 거다.
“그렇지, 차라리 퇴각 대신 지금 이 기세를 타고 되돌아간다면……!”
사령관의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 흥분에 차 말을 이어가려고 하던 사령관이 움찔했다.
“죄송합니다. 코랄린 관문까지의 이동을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주겠어?”
그걸로 끝이었다. 제국군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계속해서 이동하기 시작했다.
추격대의 전멸에 가까운 피해는, 곧바로 아리아 장벽에 머무르고 있던 미로스 기사단장에게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