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68화 (168/275)

168화

제국군이 곱게 퇴각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 바깥이 칠흑같이 어두운 새벽, 급하게 회의가 소집되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지휘실로 향하는 내 머릿속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추격대가 사실상 전멸했다. 생존해서 복귀에 성공한 건 47명. 전원 임무 수행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사실상 전멸이 아니라. 그냥 전멸이다. 그 이야기를 전해 받은 지휘실 간부들의 표정은 굉장히 어두웠다. 죽은 기사와 친분이 있던 자들은 특히 더 표정이 어두웠고, 그렇지 않은 자들도 이번에 입게 된 피해의 규모 때문에 밝은 표정을 지을 수 없었다.

“제국군의 피해는 얼마나 있었다고 합니까?”

한 간부의 질문에 미로스는 잠깐 몸을 떨고는 대답했다.

“……전무하다.”

그 말까지 듣자, 모두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병사들의 진술을 종합한 결과, 기병들의 이동 경로에 육괴를 잔뜩 묻어놓고 있다가 터뜨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지휘계통이 무너진 추격군을 향해 마법과 화살이 쏟아졌고, 아군은 대응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결국, 마틴 레드우드의 말이 맞았군.”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쏠렸다. 나는 어두운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휘관이 조금 더 신중하게 움직여, 정찰대를 보냈다면 밤 중이라고 해도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을 겁니다.”

올리비에에게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게다가, 육괴의 폭발을 이용할 생각이었다면 땅을 깊게 팔 수도 없었겠지. 정찰병을 운용해서 주변을 파악했다면 이동 경로에 자리 잡은 위협을 알아챘을 거다. 그렇다면 차라리 추격을 포기하고 복귀를 선택했을 거다.

최소한, 그랬다면 기사와 마법사, 그리고 오천의 병력은 보존할 수 있었겠지.

“조금 더 강하게 반대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한 간부의 말에 나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팍 구겼다가 다시 억지로 표정을 폈다. 그냥 푸념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괜히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 없다. 하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지.

“출정하기 전에 따로 찾아가서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운용하고, 만약을 대비해 후방에 노련한 기사 한 명을 두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병력의 지휘권을 넘겨받을 수 있게 하라고.”

내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결국, 두 가지 중 하나라도 들었다면 아군 병력이 전멸하는 일은 없었을 거다. 이건, 전적으로 추격전에 병력을 대동하고 나간 지휘관의 실책이다.

그리고, 그 실책에 대한 대가는 전사라고 하는 뼈아픈 형태로 그에게 찾아왔다. 폭발로 인해 박살 난 시신은 수습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

내 말이 끝나고 나자 다시 한바탕 불어온 침묵. 잘 달리던 차가 갑자기 퍼지기라도 한 것처럼 어색한 적막이 이어졌다.

“젠장, 차라리 지원군을 보내지 않았다면 그 육괴들은 쓸모가 없어졌을 텐데.”

간부 한 명의 중얼거림에 나는 따로 첨언을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올리비에는 그 육괴들을 전부 폭발시켰을 것이다. 폭발로 갈아엎어진 땅은 병력들은 물론이고, 보급물자를 수송하는 마차들도 넘어가기가 쉽지 않았을 테니, 그만큼 아군의 전진 속도도 늦춰졌겠지.

추격해오지 않았다면 작은 이득을 보는 거고, 추격하면 큰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다. 나는 박수를 한 번 쳤다.

“너무 울적해져 있을 필요는 없습니다. 비록 큰 손해를 봤고, 용맹한 병사들과 기사, 마법사들을 잃기는 했지만…… 어쨌든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더욱 선명해진 건 사실이잖습니까?”

내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어 작전을 역습 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군은 전략적인 이득을 챙기는 데 성공한 거다. 간부들은 지나치게 침울해져서 안 그래도 다소 흔들리고 있을 병사들의 사기를 더 꺾어놓는 일이 없어야 할 거다.”

말을 마친 미로스가 잠깐 숨을 가다듬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우리들 중에 이번 상황에 대해서 유일하게 경고한 자가 마틴 레드우드다. 앞으로는 그의 제안과 조언을 지금보다 더 주의 깊게 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다.”

간부들 중에 그 말에 반대하는 자들은 없었다. 결국, 내가 생각했던 대로 이 사령부 안에서 내 입지는 확 높아지기는 했다.

그 아래에 아군 시신 오천이 깔려있다는 점은 씁쓸하지만.

“결국 아군의 반격 방향은 코랄린 관문이겠군요.”

바다를 옆에 끼고 있는 관문이라.

“일단, 이렇게 된 형국이니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의 지원군들이 도착한 다음, 바로 움직이지 말고 쿠르스트 산맥의 국경 수비대까지 합류한 다음 움직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성전에서 공성전으로 수행해야 하는 임무가 변했다.

“준비해야 할 것도 많기 때문에, 그러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우리도 공성탑이나 공성망치, 사다리차 같은 제대로 된 공성 병기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건 박수 한 번 치고 땅 짚는다고 맨땅에서 쑥 하고 올라오는 물건들이 아니라, 시간을 들여 제작해야 하는 물건들이다.

“심지어, 적이 이미 한 번 숨겨놓은 육괴의 폭발로 재미를 봤으니, 수성전에서 같은 수작을 부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육괴의 운용으로 얻을 수 있는 성과는 그 기대치가 굉장히 높다. 살과 뼈로 이루어진 폭탄은 필연적으로 뭉칠 수밖에 없는 냉병기 시대의 병력들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르지 않은 무기니까.

“땅에 묻어놓는 식으로 운용한다면…….”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만약 그런 개짓거리를 한다면, 아군 마법사를 활용해 땅을 후려 까면서 나아가면 됩니다.”

어차피 투석기로 날려 보내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충격에 민감한 녀석들이다. 마법으로 땅을 까버린다면 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폭발할 테고, 하나가 폭발하면서 전달되는 충격으로 나머지도 연쇄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 뭐냐, 도리깨 달고 회전시키며 나아가는 지뢰 제거용 전차들도 그 처리 방식은 결국 그 도리깨로 충격을 줘서 지뢰를 터뜨리는 거잖아? 크게 다를 건 없다.

“괜찮은 방법 같습니다.”

간부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정리하던 미로스가 입을 열었다.

“우리도 아리아 장벽에서 쉽사리 나올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지금은 필요한 공성 장비 제작과 병력의 정비에 초점을 맞추며 남은 시간 동안 역습에 대해 심사숙고하도록 하지.”

역습은 적이 방어 준비를 굳히기 전에 빠르게 쳐들어가야 하지만, 코랄린 관문의 탈환은 쿠르스트 산맥에서 출발한 국경 수비대가 모두 도착하기 전까지는 진행할 수 없을 거다.

당장 얼마 뒤에 도착할 안타리아 관문과 블루핸드 성의 원군들이 모두 도착하더라도 우리가 숫자에서 밀리니까.

“죄송합니다. 보고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회의를 하고 있던 와중 병사 한 명이 노크를 하고 들어와 미로스에게 서류를 넘겨주었다. 서류를 확인한 미로스의 표정이 한결 나아졌다.

“테네스 공국의 거상 중 하나가 파이크 왕국의 편을 들기로 한 모양이다. 조만간 지원 물자가 아리아 장벽으로 도착하게 될 모양이다. 생각하지도 못한 곳에서 도움을 받게 되었군.”

그래, 엔리코가 보냈던 물자들이 마침내 도착한 모양이다. 미로스는 우리에게 관련 서류를 공유해주었다. 간부들이 그 내역을 확인하고는 미로스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 정도의 지원이라니.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테네스 공국 녀석들에게 큰 빚을 졌군요.”

빚이라고 할 건 없지. 자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이 친구들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다.

“이 정도면, 공성 병기의 제작은 물론이고, 소모한 물자도 상당 부분 보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견적을 내고, 작업에 착수하겠습니다.”

수성전 성공 후 꽤나 길게 이어지던 회의는 부드러운 분위기 아래에서 끝날 수 있었다.

지휘실을 나오자, 곧바로 클로에가 내 옆에 따라붙어서 작게 속삭였다.

“엔리코 씨가, 마틴 님을 위해서 따로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그래?”

선물이라. 포장만 그럴듯하게 해놓은 벽돌 따위만 아니라면야 언제나 선물을 받는 일은 즐겁다.

“엔리코 씨 말로는, 엘렌 양과 함께 확인해보는 편이 좋을 거라고 하던데요. 따로 부를까요?”

“시키는 대로 하는 편이 좋겠지.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마.”

말을 마친 다음 나는 숙소에서 클로에를 기다렸다. 잠시 뒤, 클로에가 엘렌과 함께 내 방에 들어왔다.

“그래서, 그 선물이라는 건?”

“잠시만요…….”

엘렌의 말에 클로에가 주변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하나 꺼내 들었다. 상자의 크기는 기껏해야 보석함 정도의 크기였다.

“뭐, 반지 같은 거야?”

남자한테 받고 싶지 않은 선물 중에서는 순위권에 드는 물건인데. 내 말에 클로에가 어색하게 웃으며 작은 상자를 열었다.

“이게 뭐지?”

안에 들어있는 건 100g 정도 되는 탁한 회색의 금속구였다.

무심한 표정으로 슬쩍 그 상자 안에 담긴 금속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엘렌이 이내 놀란 표정으로 자기 눈을 비볐다.

“잠깐, 이거 설마.”

엘렌이 뭔가에 홀린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천천히 금속구를 쓰다듬다가 나를 바라봤다.

“잠깐, 뭐 좀 실험해볼게.”

엘렌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약간 옆으로 물러났다. 엘렌은 그 금속구를 집어 들더니, 어깨 정도 높이에서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퉁, 하고 바닥을 친 금속구가 다시 튀어 오른다. 그 모습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공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탱탱볼 같은 느낌이었다.

“뭐야 이거. 금속 맞아?”

“쉬이.”

엘렌은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튀어 올랐던 금속구가 다시 바닥으로 떨어진 다음, 다시 튀어 오른다.

별다른 생각 없이 한동안 그 금속구를 바라보던 나도 점점 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저 금속, 몇 번을 다시 튀어 오르는 거야?”

지금 벌써 1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금속구는 바닥을 때리고 다시 튕겨 오르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진짜 스피나잖아. 엔리코라는 상인, 이걸 어디에서 구한 거야.”

“나도 같이 좀 놀라자.”

내 말에 엘렌이 바로 대답했다.

“스피나라고 하는 금속이야. 특정한 절차에 따라 가공하면 금속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탄성을 가져.”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금속구는 튕겨 오르기를 멈추지 않고 있었다.

“이거, 완전히 멈추려면 얼마나 걸리는 거야?”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방금 전에 내가 떨어뜨린 높이라면…….”

약 8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8분도 아니고 80분도 아니고 8시간! 나는 그 말에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금속이라고 생각할 수 없는 탄성이 아니라고? 이건 그냥 이 세상 물질이 아닌 것 같은데.”

무서울 정도네. 금속구를 바라보던 나는 엘렌에게 질문을 던졌다.

“보통은 어떤 용도로 쓰는데?”

내 말에 엘렌이 어깨를 으쓱했다.

“보통 어떤 용도로 쓴다고 정해진 게 없어. 주로 활용되는 용도가 있을 정도로 흔한 금속이 아니거든.”

“저런, 그럼 이걸 어떻게 써먹어야 할까.”

내 말에 엘렌이 곧바로 대답했다.

“내가 다뤄볼게. 어차피 이 금속을 주무르기 위해서는 야금술이 필요한 게 아니니까. 유용한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거야.”

“구체적인 계획이 있는 거야?”

내 말에 엘렌이 아직도 튀고 있던 금속구를 조심스럽게 붙잡으며 대답했다.

“그건 이제부터 생각해봐야지. 기다리고 있어 봐. 어차피 역습까지는 시간이 제법 있으니까. 그 안에 완성시킬 거야.”

어차피 내가 들고 있다고 뭘 할 수 있는 금속은 아닌 게 확실하니까. 나는 엘렌의 요청을 수락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