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그날 이후로 엘렌은 며칠이 지나도록 밖으로 나오는 일이 없었다.
엘렌이 자신의 방 안에 짱박힌 사이 블루핸드 성과 안타리아 관문에서 도착한 병력들과 함께 아리아 장벽 안의 병력들을 재편성하고, 보급품을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나와 클로에가 테이블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와중, 마침내 클로에가 입을 열어 내가 하고 싶던 질문을 던졌다.
“도대체 엘렌 양은 언제쯤 밖으로 나오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다.”
내일 오전 중으로 쿠르스트 산맥에서 출발한 국경 수비대의 병력이 아리아 장벽에 도착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엘렌은 아직도 자신의 방에서 나올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엘렌 양에게 아침 식사를 가져다준 병사 말에 따르면, 사람의 몰골이 아니라고 하던데요.”
이전에 성역화 마법을 변형해 달라는 요구를 수행할 때도 사람의 몰골이 아니긴 했지. 대충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상상이 간다.
어쩌면…….
“이미 망했는데 자존심 때문에 못 나오는 거 아니야?”
그렇게 큰소리를 떵떵 쳤는데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면 나 같아도 쪽팔려서 밖으로 나오기가 무서울 것 같은데. 세상 사람들이 막 다 자기를 비웃는 것 같을 테니까.
내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팍, 하고 문이 열렸다.
“무슨 개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쪽이 뭐?”
문을 열고 들어온 자의 상태를 확인한 나는 잠깐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리고 응당 던져야 하는 질문을 던졌다.
“……누구세요?”
“엘렌 리버플로우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다소 퉁명스러운 엘렌의 대꾸가 돌아왔다. 엘렌이라는 건 알고 있다. 대충 흡사하게 생겼으니까.
“불과 며칠 사이에 굉장히 역변했는데. 누가 얼굴에 쟁기질이라도 한 거야?”
내 말에 엘렌이 혀를 한 번 차고는 뭔가를 꺼내서 턱 하니 테이블 위에 올렸다.
“신발이잖아.”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신발이 아니야. 제대로 만든 물건이라고. 내가 얼마나 개같이 고생했는데.”
“그래서, 구체적으로 무슨 기능을 가지고 있는 건데?”
“일단, 밖으로 나가서 한번 신어 봐.”
엘렌의 재촉에 나는 건물 옆의 공터로 나가 신발을 신었다.
“착용감이 좋네.”
따로 무슨 마법 같은 걸 걸어놓은 모양인지. 딱 봐도 통풍 성능을 기대할 수 없는 디자인인데도 불구하고 발이 상쾌하다는 느낌이 있다. 근데 설마, 신발에 이런 기능 하나 달자고 그 긴 시간과 귀한 재료를 소모한 건 아니겠지.
“신발 쪽으로 마력을 불어넣어봐.”
시키는 대로 하자 신발에서 작게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자, 이제 한번 살짝 뛰어봐.”
나는 그 말에 점프했다. 그리고 곧장, 내 몸이 훅 하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으어!?”
다시 착지하자마자 또다시 튕겨지듯이 내 몸이 튀어 오른다. 마치, 트램펄린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혹시나 싶어 신발에 밀어 넣고 있던 마력을 차단하자 다시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리고 발의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어때, 써먹을 수 있겠어?”
나는 그 말에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건 조금 적응이 필요하겠는데.”
다리 힘을 몇 배나 더 강하게 낼 수 있다는 건 분명 도움이 된다. 하지만, 거기에 맞게 몸이 적응하지 못하면 아무 의미 없다.
“그건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그 상황을 구경하던 클로에의 말에 나는 응? 하는 소리를 내고 그녀를 바라봤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방금 전에 보여주신 점프는 제가 싸울 때 하는 움직임이랑 비슷해 보이던데요.”
클로에의 능력이 힘을 흡수한 다음 방출하는 거였지. 이 신발로 해낼 수 있는 움직임과 클로에의 능력은 확실히 닮아있다. 잠깐 고민하던 나는 그 신발을 클로에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배울 게 아니라, 네가 쓰면 되겠네.”
클로에가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왜 그렇게 놀라?”
“비싼 물건이에요. 재료도 흔히 찾아낼 수 있는 게 아니고, 게다가 엘렌 양은 뛰어난 마법사잖아요. 그런 사람이 한동안 밤을 새우면서 공들인 물건이잖아요.”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모르겠네. 이 신발에 내가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하지만, 너는 그럴 필요 없다는 거잖아.”
나는 효율적인 선택을 한 것뿐이다. 세상 좋은 장비는 전부 내가 가져야만 한다는 식의 생각은 가져 본 적도 없다.
사람이 쓸데없이 욕심을 부리면 일을 그르치는 법이라지. 나 말고 이 신발을 활용하기에 적절한 사람이 없다면 모를까,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굳이 그걸 무시하고
“잘은 모르지만…… 이런 물건은 큰 돛 세 개가 달린 범선 서너 척은 사고도 남아요.”
“이야, 좋겠네. 비싼 장비 쓰게 돼서.”
클로에의 다소 격양된 목소리에 나는 싱거운 대답을 돌려주고 엘렌을 바라봤다.
“나 말고, 클로에가 사용해도 괜찮지?”
만들어준 사람의 성의와 노력을 생각해보면, 그녀에게도 사용자를 선택할 권리는 있다. 내 말에 엘렌이 픽 웃고는 손을 휘휘 저었다.
“두 사람 중에 누가 써도 나는 상관없어.”
말을 마친 엘렌이 클로에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다.
“하지만, 팔 생각은 하지 마.”
결정이 났으니. 나는 곧장 엘렌을 향해 말했다.
“신발 크기를 좀 조절해야 할 것 같은데. 가능하겠어?”
“문제없지. 그 정도는 순식간에 끝낼 수 있으니까 잠깐 기다리고 있어.”
엘렌은 클로에의 발 크기를 확인한 다음 다시 신발을 들고 돌아갔다. 클로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
“지금 말씀을 번복하셔도 괜찮아요.”
“됐어. 한 번 한 말을 뭐하러 바꿔?”
주기로 했으면 준 거다. 하품을 한 나는 성벽 위의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걸 확인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국경 수비대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오호, 하는 소리를 냈다.
“뭐야. 생각했던 것보다 빨리 왔네.”
내일 오전이라고 들었는데. 클로에 쪽으로 시선을 옮긴 나는 턱짓을 했다.
“가자.”
지원군이 도착했는데 여기에서 계속 멍하니 있을 수는 없으니까. 성벽 위로 올라간 나는 다가오는 병력들의 숫자를 보고 작게 감탄했다.
“엄청나긴 하네.”
여기에 있는 병력들까지 싹 다 합치면 10만은 가뿐히 넘을 것 같은데.
소식을 듣고 성벽 위로 올라온 미로스가 아리아 장벽 앞에 모여있는 병력들을 확인한 다음, 아군이 맞다는 확신이 서자 입을 열었다.
“성문을 열고 아군을 받아들여라!”
둔중한 소리와 함께 성문이 열렸다.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국경 수비대 사령관.”
열린 성문 앞에서 미로스가 국경 수비대의 사령관을 마중했다. 말에서 내린 사령관이 미로스에게 경례한다.
“쿠르스트 국경수비대 칠만 오천. 국왕 폐하의 명을 따라 아리아 장벽으로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오느라 고생 많았군. 마음 같아서는 그대들의 노고를 생각해 며칠의 휴식을 주고 싶지만, 그럴 시간이 없는 게 안타깝다.”
미로스의 말에 사령관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제국 놈들이 국경을 넘어온 상황 아닙니까. 행군 과정에서 적당히 휴식을 취했습니다. 염려 놓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그래도 오늘 하루 동안은 부족하나마 병력들의 고단함을 덜어주는 데 집중하겠네.”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 병력들의 도착은 우리의 예상보다 빨랐고, 덕분에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휴식여건을 보장해 줄 수 있었다.
국경 수비대 사령관과 미로스는 함께 지휘실로 향했고, 그 사이 아리아 장벽을 지키던 병사들은 무사히 당도한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의 병력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 수고스럽겠지만 간부들은 바로 지휘실로 향해주게.”
미로스의 말에 사령관이 고개를 끄덕이고 모여있는 아리아 장벽의 간부들을 슥 훑어보다가 내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는 웃었다.
“마틴 레드우드.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의 자랑이 여기 있었군그래.”
나는 사령관을 보고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나고 나면 제7수색대 병력들이 머무르는 곳으로 안내해줄 테니. 잠깐이나마 쌓인 회포를 풀도록 하게.”
“배려에 감사합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우리는 지휘실로 향했다.
“이거, 자리가 꽉 차는군.”
쿠르스트 국경 수비대의 간부들까지 모이자. 다소 빈자리가 있던 지휘실에 남는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람이 꽉꽉 들어찼다.
“시간이 없으니 바로 회의를 시작하지.”
간부들이 모두 자리를 찾아 앉을 걸 확인한 미로스가 박수를 한 번 친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지도를 가리켰다.
“우리의 첫 번째 목표는 코랄린 관문의 탈환이다.”
곧바로 국경 수비대 사령관이 입을 열었다.
“미로스 기사단장님. 아군의 역습 시점은 제국 놈들도 이미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그 말에 미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의 역습 시점을 제국군이 특정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선택지가 없었네.”
미로스의 말을 들은 국경 수비대 사령관이 살짝 혀를 찼다.
“코랄린 관문 수복은 소모전이 될 확률이 높은데…….”
저 친구가 별로 밝지 않은 표정을 짓는 건 당연하다. 미로스가 그런 국경 수비대 사령관의 표정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코랄린 관문에서 극심한 소모전을 펼치는 것은 아군이 의도한 바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모인 간부들은 각자 심사숙고해서 괜찮은 생각이 있다면 제안해보도록.”
미로스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를 슬쩍 바라봤다. 아이디어라. 대단할 건 없지만 효과적인 건 하나 알고 있지.
“코랄린 관문은 왼쪽에 바다를, 오른쪽에는 꽤나 험준한 돌산을 끼고 있습니다. 단순한 소모전으로 큰 성과를 내기는 힘들 겁니다.”
내가 입을 열자, 일단 아리아 장벽에서 함께 싸웠던 간부들과 미로스가 관심을 보였다. 자연스럽게, 그런 모습을 확인한 쿠르스트 국경수비대의 간부들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마틴, 괜찮은 생각이 있는 모양이군.”
“코랄린 관문이 끼고 있는 산은 제법 험하지만, 애초에 하이랜더들은 고산지대에 터를 잡고 있던 종족입니다. 지도에 기록된 정보가 맞다면, 하이랜더들은 충분히 그 산을 극복하고 코랄린 관문의 뒤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뒤로 돌아간 하이랜더들은 코랄린 관문으로 향하는 보급로를 끊어버릴 수 있다. 코랄린 관문은 바닷가 근처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우물 같은 자급할 수 있는 식수 공급원은 없다. 보급이 끊긴다면 오래 버티지는 못할 거다.
내 말에 미로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글쎄…… 하이랜더가 아군이 보유한 전력 중에 가장 뛰어나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걸세. 그런 병력이 산을 타고 뒤로 돌아간다면, 제국군이 도리어 성문을 열고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을 앞세워 아군을 공격할 가능성이 너무 높아.”
미로스의 말을 받아 다른 간부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게다가 코랄린 관문의 뒤로 돈다는 뜻은, 그 이후 보급을 받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마틴 님은 이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