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71화 (171/275)

171화

나는 차분하게 계획을 말해주었다.

“코랄린 관문 옆의 산을 넘는다라.”

그렇게 중얼거린 도리안이 작은 단도로 닭고기의 살을 발라내며 고민하는가 싶더니 입을 열었다.

“지금 병력을 지휘하는 미로스 기사단장님에게 제7수색대 대장의 의견을 좀 전달해줬으면 한다.”

“……따라붙으실 생각입니까?”

내 말에 도리안이 대답했다.

“산을 타는 일이라면 우리는 남들에게 지지 않아.”

그 점은 부정하지 않는다. 수색대는 쿠르스트 산맥의 험한 산세를 돌아다니던 병력들이다. 게다가, 수색대는 하이랜더들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내가 하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수색대의 병력은 그렇게 많지 않으니까, 보급품의 조달 걱정도 그렇게 크지 않으니까. 수색대 하나 정도는 우리와 함께 움직여도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실에서 수색대의 인원 중 일부를 데려가겠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하이랜더와 싸우던 수색대의 병력들이, 하이랜더들과 함께 합을 맞춰 움직이는 게 힘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이랜더들이 동행하는 일입니다. 괜찮겠습니까?”

내 질문에 도리안이 함께 둘러앉아 있는 병력들을 살피며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는 제7수색대에서 한솥밥을 먹은 전우였다. 또한, 이 친구는 왕국에 검을 겨누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이야기를 들어보니 왕국의 적을 격멸하는 데 있어 가장 핵심적인 일을 하려고 하는군.”

말을 마친 도리안이 입에 물고 우물거리던 닭뼈를 바닥에 뱉은 채 웃었다.

“동행하고 싶지 않다면 말해라.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도리안의 말에 앉아있던 사람들이 잠깐 침묵했다. 그 와중에, 부대장인 피터가 입을 열었다.

“다른 녀석들이야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는 따라붙을 거요.”

피터의 말에 이내 다른 병사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아, 그럼 이제 내일부터는 또 발바닥이 터져라 걸어야 할 테니. 잔뜩 처먹고 잠이나 때려 자자고.”

밤이 깊어지고,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내일부터 다시 이어질 싸움을 위해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바로 잠을 잘 수 없었다.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 * *

그 후, 코랄린 관문에 도착하기 위해서 우리는 며칠을 이동해야 했다.

“바다 냄새.”

그리고 마침내 오늘 저녁, 우리는 목적했던 관문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에는 바다의 짠내가 뒤섞여 있지만. 그사이에 또 다른 냄새가 섞여 있다. 시체가 썩는 고약한 냄새.

흙바닥을 기어 다니는 벌레 중에는, 바다에 살지 않는 녀석들도 보인다. 각종 딱정벌레는 물론이고 이미 구더기가 변해서 만들어진 파리도 심심치 않게 주변을 날아다니는 중이다. 그리고, 시커먼 날개를 펼치고 대낮에도 하늘을 배회하는 까마귀까지.

“삭막하기 짝이 없는데.”

코랄린 관문에서 있었던 격전의 흔적은 아직 완전히 씻겨나가지 않았다.

“꽤나 유명한 휴양지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변해버렸네요.”

바다라, 놀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 만하지. 어차피 대부분이 귀족이었겠지만. 그리고, 그 시체 썩는 냄새와 비린내가 뒤섞인 바다를 옆에 끼고, 저 멀리에 자리잡은 게 바로 우리의 1차 목표인 코랄린 관문이다.

“이야, 배 타고 뭘 해보는 건 무리겠네.”

슬쩍 시선을 돌려 바다 쪽을 바라보니, 딱 봐도 장난 아니게 물살이 사납다.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다. 저 바다 아래는 암초가 드글드글 할 것이다. 들어가 보지 않아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어도 딱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다.

“괜히 여기에 관문을 지었겠어?”

엘렌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클로에를 바라봤다.

“신발은 적응했나?”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응이고 뭐고 할 것도 없었죠. 지금 당장 실전에서 사용해도 전혀 문제없어요.”

다행이네. 나는 시선을 돌려 하이랜더들을 보며 말했다.

“준비하자.”

내 말에 하이랜더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착한 즉시 우리는 바로 산을 타기로 했다. 이후 본대와의 연락은 수정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적의 뒤통수에서 내가 뭘 하건 그건 내가 알아서 판단한다.

“어디 보자.”

잠깐 눈을 가늘게 뜨고 우리가 타야 하는 돌산을 확인했다.

“딱 봐도 험해 보이는데. 병력들이 저 산을 넘는 건 굉장히 어렵겠어.”

엘렌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밥이랑 사이다 싸서 하이킹 갈 만한 난이도는 절대 아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지리산이라기보다는 설악산의 강화판 같은 느낌이군. 산이 엄청나게 높은 건 아니지만, 경사가 심하고 대부분이 돌로 이루어져 있어 등산이라는 단어보다는 등반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방패에 창 끼고 짐 바리바리 싼 보통 병사들이 저 산을 올라 코랄린 관문 뒤통수로 들어가는 건 불가능하다. 보급도 예상했던 것처럼 기대할 수 없을 테고.

“하지만 그건 적도 마찬가지야. 언데드 말고 다른 병력을 저 위에서 대기시킬 수는 없어.”

저기에 적이 숨어 있다면, 백퍼센트 언데드다.

“그 펑 하고 터지는 육괴 같은 것도 숨어 있겠죠?”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썩는 냄새가 진동할 텐데, 숨어 있어 봤자지. 흙에 파묻어 놓을 수 없는 이상, 냄새를 숨길 수는 없어. 준비하자고. 하이랜더와 제7수색대를 집합시켜줘. 나는 미로스 기사단장님에게 보고할 테니.”

말을 마친 나는 필요한 것들을 챙긴 다음 미로스에게 향했다.

“출발하나?”

“그렇습니다. 등반해도 크게 문제가 없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습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잠깐 걱정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이랜더라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혀를 차고는 대답했다.

“이 사람아, 하이랜더도 걱정이지만 자네도 걱정이야. 내가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나도 이 전쟁을 끝으로 슬슬 은퇴를 준비할 생각이라네.”

미로스는 그런 말을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뒷짐을 진 채 입을 열었다.

“왕궁기사단장님을 포함해, 내가 친하게 지내는 대부분의 기사들은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있어. 이 왕국에는 분명히 새로운 인재가 필요한 시점이 다가올 것이고, 내가 보기에 자네만 한 인물은 이 왕국에서 찾아보기 드물다네.”

“그렇게 평가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내 말에 미로스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조금이라도 문제가 있겠다 싶으면 미련 없이 내려오도록 하게. 불리한 상황에서 싸움을 고집하는 건 필부의 만용이지, 전장의 기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니야. 실패로 인한 책임은 내가 책임지고 덮어줄 테니.”

나는 그 말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가능한 일을 억지로 해내려고 드는 취미는 없습니다.”

길이 있으면 그 길을 걷고, 길이 없으면 다른 길이 없나 찾아볼 거다. 지금 하는 등반이 잘못된 선택이라는 계산이 서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려올 것이다.

“제국의 버러지들이 지나친 욕심을 부렸다는 걸 확실히 알려주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왕국의 영토를 넘본 일을 후회하게 해주자고. 이 전쟁에 걸린 판돈을 잊지 말고, 신중하게 처신하게.”

“명심하겠습니다.”

파이크 왕국과 베로나 제국 사이의 전쟁은 사실 나와 올리비에 사이의 단순한 신경전 따위가 아니다.

제국은 황녀의 땡깡을 받아주기 위해 이 전쟁을 벌인 게 아니다. 이번 기회에 파이크 왕국을 완전히 자기 아래로 복속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 단순히 조공을 바치는 수준을 넘어, 아예 속국으로 삼으려는 거다.

마찬가지로, 파이크 왕국은 아예 이번 기회에 베로나 제국의 입김을 왕국 안에서 싹 걷어낼 생각으로 이 전쟁을 계속하고 있다.

“파이크 왕국의 선왕들이 그토록 바라던 순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어. 아직 멀어 보이지만, 우리의 목표는 사실 그렇게 멀리 있는 것 같지만은 않네.”

그래, 얼마 남지 않긴 했다. 여기에서 이기는가, 아니면 패배하는가. 나는 가져온 두루마리를 미로스에게 내밀었다.

“이후 코랄린 관문을 마주하고 있는 본대가 취해주셨으면 하는 행동을 전부 여기에 적어두었습니다. 부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아 주셨으면 합니다.”

미로스가 두루마리를 펼치자, 그 두루마리의 끝이 바닥에 닿는다. 내용을 천천히 읽어보던 미로스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마주쳤다.

“걱정하지 말게, 무운을 비네. 건강히 돌아왔으면 좋겠군.”

“미로스 기사단장님도, 무운을 빕니다.”

대화를 마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이미 저녁이 끝나고 서서히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몰래 산 타기에는 딱 좋은 순간이다.

하이랜더들과, 제7수색대의 병력이 모두 모여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전원 모였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제7수색대의 병력을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산 타기 전에 말 많이 하면 힘 빠진다. 마찬가지로, 산 타기 전에 너무 긴 서론을 들으면 모두가 지치겠지. 그러니 짧게 한마디만 하겠다. 우리가 이길 거다.”

하이랜더들에게는 따로 할 말이 없다. 애초에, 굳이 말로 사기를 북돋울 필요도 없을 녀석들이니까. 말을 마친 나는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문 열어라!”

말을 마친 나는 병력들 앞에 선 채로 산을 향해 나아갔다.

* * *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던 올리비에가 노크와 함께 사령관이 들어오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수색대는 포함되었나요?”

“……그렇습니다.”

뭔가 보고하려고 하던 사령관은 올리비에의 말에 몸을 잠깐 움찔하고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정말로, 산에 올라가는 마틴 레드우드를 저지하지 않아도 괜찮겠습니까? 이대로 두면…….”

올리비에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새로 제작한 투석기 중 두 개가 균형이 약간 안 맞더군요. 돌아가서 최대한 빨리 고치세요.”

“올리비에 황녀 저하.”

“책상 위에 올려진 두루마리를 가져가서 읽어두고, 적혀 있는 대로 행하세요.”

사령관은 뭔가 더 말을 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상황이 이렇게 되었다는 것 정도는 그도 자각하고 있었다. 결국 사령관은 말을 잇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위에 올려진 두루마리를 손에 들었다.

“이건…….”

두루마리를 풀자, 둘둘 말려있던 양피지가 풀리면서 그 끝이 바닥을 툭 때린다. 손에 들고 있는 두루마리가 바닥을 때릴 정도로 긴 두루마리 위에는 글자가 빼곡했다. 그 내용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령관이 이내 정신을 차린다.

“반드시, 이대로 조치하겠습니다.”

“그럴 거라고 생각해요.”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이불 속에 손을 넣더니 편지를 한 통 꺼내 내밀었다.

“이건.”

“축하드려요. 따님의 약혼이 확정되었어요. 날짜는 아직 정하는 중이라네요. 별 탈 없다면, 문제없이 황족의 외가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어요. 약혼이 결혼으로 이어진다면, 사장어른이라고 불러드려야겠네요.”

칠색 내각의 머리 중 하나인 대도서관의 관장과 그녀의 시녀인 레티시아가 손을 써서 이루어낸 일이다.

이자에게 약속했던 건 이번 전쟁에서 사령관으로 임명해주는 것과 황족의 외가 지위였다.

“죄송하지만, 약혼이 아니라 결혼을 약속하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올리비에는 그 말에 헛웃음을 지었다. 당돌하기도 하지. 사람 욕심이라는 건 언제나 이런 식이다. 자신에게 유리한 것만 기억한다.

“맞아요. 당신이 이번 싸움에서 제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다는 전제하에 드린 약속이었죠. 하지만 당신은 실수를 했어요. 결혼이 약혼으로 변한 정도로 처리해 주는 걸 다행인 줄 아세요.”

아리아 장벽에서 그 소동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코랄린 관문까지 밀려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감사합니다.”

올리비에의 말에 사령관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양손으로 편지를 받아 조심스럽게 소매 안에 집어넣고 최대한 공손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올리비에는 눈을 감았다.

코랄린 관문을 뚫는 데 성공하면 파이크 왕국에서는 슬슬 협상에 대한 논의를 준비할 것이다.

파이크 왕국이 협상을 위한 자리에서 요구할 내용을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전쟁 배상금. 조공 제도의 폐지 및 왕국 내에 파견되어있는 베로나 제국 외교관들의 특권 전면 철폐. 현재까지 합의한 열네 건의 불평등조약 완전 무효화. 그리고…….

올리비에 황녀 자신의 신병을 파이크 왕국으로 양도할 것. 다른 것들은 다소의 양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올리비에의 신변 양도 만큼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거다. 왕국에 볼모로 잡혀간 이후 그녀가 당하게 될 일은 뻔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올리비에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서로 가장 중요한 걸 올려놓고 한번 해보자.”

올리비에가 이긴다면 당연히 마틴 레드우드가 전범으로서 베로나 제국으로 넘어오게 된다. 상대가 제시한 판돈이 꽤 적절해 보이니, 응해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

침대 아래에서 은잔을 꺼내 만지작거리던 올리비에는 이내 혀를 차고는 다시 침대 아래에 휙 던져넣었다.

“여기에서 지면, 내가 진 거야.”

그러니, 다음을 대비할 필요는 없다. 올리비에는 판돈으로 자신의 목숨을 올렸다. 앞으로 이어질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자존심이 다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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