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산을 오르는 동안, 우리는 이상할 정도로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다.
“마치 올 테면 오라고 말하는 것 같군.”
조용한 산속에서 검을 뽑고 주변을 살피며 앞으로 나아가던 도리안이 혼잣말을 했다.
“틀린 표현은 아니네요.”
올리비에는 우리가 산으로 진입하는 걸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아마, 산 아래로 내려가기 전까지도 별다른 방해를 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올리비에의 속셈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한 다음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쿠르스트 산맥에서 올리비에가 남겨두고 갔던 편지다. 나는 거기에 글을 썼다.
[여기서 끝을 보자고? 네 입장에서 굳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건 올리비에가 불리한 싸움을 하는 거다. 나와 동행하고 있는 하이랜더들이 패배해도, 미로스가 코랄린 관문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면 파이크 왕국이 이긴다.
마찬가지로, 미로스가 코랄린 관문을 점령하는 데 실패해도 우리가 성공하면 결국 파이크 왕국이 이긴다.
반면, 올리비에는 두 싸움을 전부 이겨야 한다. 대놓고 불리한 선택을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편지에 글을 쓰자, 잠시 뒤에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이 돌아왔다.
[이미 승패가 확정된 체스도 두는 사람이 더 경기를 끌고 싶다면야 끌 수 있지만, 패배라는 결과가 변하지는 않잖아.]
올리비에는 여기에서 사실상 승부가 결착난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구글의 인공지능이 한국의 바둑기사와 둔 첫 번째 대국에서 승리를 선언하기 30분 전에 이미 승리했다고 확정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잖아.
이미 승부가 났다면 그 이후에 시간을 끄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여기에서 밀리게 되면 그 이후 올리비에가 할 수 있는 일은 버티는 것 정도가 전부다.
[우열을 가리는 분야는 두 개를 생각해두었어. 얼마나 멀리까지 보고 계획할 수 있는가. 그리고 얼마나 빠르게 즉흥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 미로스 기사단장에게 뭔가 따로 지시 내린 게 있어? 나는 제국군 사령관에게 해놓은 참이거든.]
바둑으로 치면 몇 점 깔고 시작하게 해준다는 건가. 그거참 눈물 나게 고맙군그래. 나는 편지를 바라보다가 그래, 라는 글자를 써넣었다.
[기특해라. 아, 그 편지는 그냥 버리지 말고 태워버려.]
나는 병사가 들고 있는 횃불에 편지를 가져갔다. 확 하고 불이 옮겨붙은 편지가 검게 변색되다가, 이내 재가 되어 흩어진다. 그 꼴을 보고 있던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코랄린 관문 쪽은 언데드 하이랜더들을 걱정할 필요가 거의 없겠네.”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들의 대부분은 올리비에가 끌고 와 산 아래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거다.
몇 시간 뒤,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확인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랄린 관문의 뒤편으로 내려가는 산어귀에 빼곡하게 자리 잡은 언데드 하이랜더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온다.
저기를 뚫지 못하면 코랄린 관문의 뒤로 돌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게다가…….
“하이고. 내가 저 대가리를 한 번에 두 개나 보게 될 줄이야.”
헤로스의 머리통 두 개가 하늘에 떠 있었다. 하나는 파이크 왕국군의 본대 위에 자리 잡았다.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산 정상에 있는 우리와 산어귀에 있는 적군의 머리 위를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본대에서 변수를 만들 수는 없겠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머리를 긁었다. 이미 미로스 기사단장에게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상황들을 적어넣은 두루마리를 넘겨주었다. 이 상황에서 아군의 머리 위에 헤로스의 머리통이 떠 있다는 건, 본대가 이길 확률이 없다는 뜻이다.
헤로스의 머리통 위치를 바꿀 수 있는 건 지금 산 정상에서 언데드 하이랜더와의 싸움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다.
산어귀와 정상을 왔다 갔다 하는 헤로스의 머리통이 산 정상에 자리 잡은 우리에게 고정되어버리면, 결국 올리비에의 승리로 끝나게 될 거다.
나는 시선을 돌려 도리안을 바라봤다.
“일단, 여기에서 하루 숙영한 다음 내일 오전 중으로 산을 내려가도록 하죠.”
내 말에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병사들로 하여금 숙영 준비를 하게 했다. 그사이 나는 뚫어져라 산어귀에 자리 잡은 언데드 하이랜더들을 살폈다.
우리의 장점이 병력의 질이라면, 올리비에의 장점은 병력의 양이다.
“분명히 승산은 있어.”
그러니까 헤로스의 머리통이 왔다 갔다 하는 중이다. 고지대에서 저지대를 향해 달려드는 건,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전략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소의 불안감은 여전히 뒷목에 엉겨 붙어있다. 해가 완전히 저물 때까지 산어귀의 병력들을 바라보며 계속 머리를 굴리던 나는 눈가를 주무르면서 텐트로 돌아가 누웠다.
“…….”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내가 미로스에게 건네준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은 알고 있다. 새벽까지 적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코랄린 관문을 공격해라. 그 뒤로 이어서 진행해야 하는 병력의 운용에 대해서도 미리 이야기를 해두었다.
그리고, 우리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다. 클로에로 하여금 하이랜더들과 수색대의 병력들을 모두 모이게 했다.
“잘 주무셨습니까?”
텐트 밖으로 나온 나는 기지개를 켜는 도리안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도리안이 나를 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잠은 잤는데, 푹 자지는 못했어.”
바로 앞에 싸움을 두고 있는데 푹 잘 수 있을 리가 없지. 고개를 돌려 산 아래를 바라보니, 저 멀리 보이는 왕국군의 진영이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전부 모였어요.”
클로에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모여있는 하이랜더들과 제7수색대의 병력들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도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 도리안 대장.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다음으로는 하이랜더들이다. 나는 그들을 보고 입을 열었다.
“오래 기다렸다. 이번에 승리한다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다.”
선조의 시체를 이 꼴로 만든 자가 마침내 손에 들어온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주먹을 꽉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산어귀 쪽으로 돌렸다.
“무기를 들고, 정신을 바짝 차려라. 이겨야 한다. 우리는 산어귀에 자리 잡은 적을 박살 내야 한다.”
말을 마친 나는 검을 뽑아 들고 병력들과 함께 산 정상에서 산어귀를 향해 내려갔다. 우리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산어귀에 자리 잡고 있던 언데드 하이랜더들도 서서히 움직인다.
“겨울에 시작된 악연이 봄이 되어서야 끝나려 하는군.”
내 중얼거림을 들은 엘렌이 대답했다.
“우리에게 좋은 쪽으로 끝내자고.”
“당연히 그래야지.”
이 싸움에서 패배한다면 그 끝에 기다리고 있는 건 목에 쇠사슬을 걸고 전범 취급을 받으며 베로나 제국으로 끌려가는 일밖에 없다. 당연히, 지금 이 자리에 함께하고 있는 제7수색대의 병력과 엘렌, 클로에의 처우도 안 봐도 훤히 짐작이 간다.
그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올리비에 황녀는 볼모로 잡히겠지만, 무력화시킬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슬쩍 그녀를 바라봤다.
“구체적으로?”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세자 전하께서는 부작용이 심한 약을 다량 투여해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로 만드는 걸 고려 중이에요. 거의 30년 동안 시행되지 않은 처벌이죠. 물론, 은밀하게 실행될 테고.”
어쨌든 제국에서 볼모로 넘긴 것이기 때문에, 올리비에 황녀의 숨통을 끊을 수는 없다. 하지만, 무력화할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일정량 이상 투여하면 이후 합리적 판단을 내릴 수 없게 되는 건 물론이고, 단기 기억과 미래계획 능력의 손실 같은 심각한 증상을 유발하는 모양이다.
대충 증세를 들어보니, 전두엽이 맛탱이가 가는 게 확실하다. 화학적 전두엽 절제술이라고 해야 하나.
“하이랜더들도 만족할 만한 결과겠군.”
산 정상에서 산어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 진을 치고 기다리는 언데드 하이랜더들이 보인다.
비척비척 몸을 흔들며 서 있는 시체는, 이 거리에서 보면 별로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사파리 투어에서 차 너머로 바라보는 사자나 호랑이도 마찬가지다.
“코랄린 관문 쪽이 소란스럽네요.”
공성전을 시작한 모양이다. 나는 입에 피리를 물고, 크게 분 다음 외쳤다.
“돌격한다!”
그 신호와 동시에, 하이랜더들과 제7수색대의 인원들이 산어귀에 자리 잡은 언데드를 향해 질주한다.
언데드들이 천천히 움직여 우리를 마중할 진형을 갖추기 시작하고, 그들 사이에 숨어있던 로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 원터솔져. 네가 없으면 섭하지.”
눈사태에 파묻혀 통째로 얼어붙어 죽는 게 정상인 녀석이, 참 질기게도 지금 이 순간까지도 살아남아 있었다. 아마, 대외적으로는 지금 이 언데드 군세를 이끄는 사람이 올리비에가 아니라 저 자식으로 되어있겠지.
푸른 빛이 도는 갑옷을 입고, 한 손에는 시미터, 다른 손에는 스틸레토를 든 녀석이 살벌한 눈빛을 한 채 언데드의 돌격에 맞춰 나를 향해 달려든다.
“표정 펴고 웃어 새끼야. 노려보는 걸로 죽는 사람은 없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주변의 공기가 폭발한다. 나와 로베르는 서로 검을 부딪친 다음 뒤로 훌쩍 뛰었다.
“이전까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네 녀석을 반드시 막을 것이다.”
녀석의 표정과 목소리가 다르다. 엉덩이에 침 맞은 망아지처럼 날뛰던 예전과는 다르게, 목소리도 가라앉아있고, 그 움직임도 굉장히 신중하다.
“황녀가 처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들었나 보지? 그 여자, 유서는 써 놓은 건지 궁금하네.”
내 말에도 녀석은 전혀 분노하지 않고 진중한 자세로 나를 응시한다. 나를 여기에 붙들어 놓을 생각인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이미 손등에 남겨놓은 헤로스의 흉터가 이전처럼 효과를 발휘하며 주변의 언데드를 약화시키는 중이다.
“제7수색대 자냐!?”
도리안의 외침과 함께 수색대의 병력들이 투창기를 꺼내 들고 언데드 하이랜더를 향해 창을 던진다. 쏘아진 창이 언데드의 몸에 박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때, 클로에의 외침이 들렸다.
“마틴 님! 적이 너무 얇게 자리 잡고 있어요! 이대로는 어렵지 않게 뚫을 것 같긴 한데, 이상하지 않아요!?”
클로에의 외침을 들은 나는 로베르를 억지로 밀어낸 다음 하이랜더들에게 소리쳤다.
“돌진을 멈추고 자리를 지켜!”
일부러 뚫리기 쉽도록 진형을 얇게 만든 거다. 저걸 뚫고 나가면 산어귀에서 바로 코랄린 관문 뒤편과 이어진 길이 나온다.
그리고, 그 길의 옆에 쭉 펼쳐진 바다를 마주하게 된다.
올리비에는 일부러 우리가 자신들의 진형을 뚫고 코랄린 관문의 뒤편에 도착하게 한 다음 우리의 뒤를 칠 거다.
이후, 바다를 등지게 된 우리를 천천히 밀어붙여 바다에 쏟아 넣으려는 생각이다.
“알고 있으면, 반대로 우리가 써먹을 수도 있어.”
지금은 산어귀에 자리 잡은 언데드들이 바다를 등지고 있는 상황이다. 뚫으려고 하지 말고, 천천히 나아가면 오히려 우리가 언데드들을 바다로 밀어 넣을 수 있다.
내 외침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돌진을 멈춘 채,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언데드를 때려잡기 시작했다.
허리를 젖혀 로베르의 검을 피하면서, 나는 헤로스의 머리통이 떠 있는 위치를 파악했다.
“좋아.”
적진에 떠 있다. 이 판단이 맞다는 뜻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귀신처럼 그 머리통이 다시 아군의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번에는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저 해골바가지는 지조 없이 우리 머리 위에 달라붙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