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얇고 길게 펼쳐져 있던 언데드 하이랜더들의 진형이 서서히 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포위할 생각인 모양이다.
“포위군.”
뚫고 나가야 할 텐데. 대처법을 생각하던 와중, 코앞에 들이밀어진 시미터가 뺨을 핥고 지나간다. 곧바로 발로 배를 차서 로베르를 뒤로 밀어낸 나는 얼굴을 구겼다.
“아 좀. 지금 생각 중이잖아.”
머리가 복잡하다. 포위를 뚫고 나가야 한다. 포위를 뚫는 건 당연히 한 점에 힘을 집중해서 가장 얇은 곳을 두들기는 게 정석이다. 배를 얻어맞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났던 로베르가 나를 노리고 스틸레토를 던진다.
그 공격을 막아낸 것은 클로에였다.
“제가 상대할게요.”
“가능하다면 그래 줘.”
우리의 대화를 들은 로베르가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했더니, 마틴 레드우드의 밑에 붙어먹은 년이군.”
클로에가 손에 쥔 레이피어를 한 바퀴 돌린 다음 대답했다.
“댁은 그 정신 나간 황녀 밑에 달라붙은 놈이시고.”
말을 마친 클로에의 신발 아래에서 작게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녀의 몸이 엄청난 속도로 튀어 나가 로베르에게 바짝 붙는다.
“?!”
급하게 휘둘러진 로베르의 검이 클로에의 레이피어를 때린다. 검이 레이피어를 때린 소리는 나지 않는다. 대신, 클로에는 로베르의 배에 자신의 손을 가져갔다. 투쿵, 하는 소리와 함께 로베르의 몸이 확 떠서 뒤로 쭉 날아간다.
“괜찮겠네.”
클로에가 로베르의 발을 붙잡아 놓고 있는 동안, 나는 이 상황에 빨리 대처해야 한다.
“산으로 가는 길의 포위를 두텁게 할 모양인데.”
이건 포위해서 끝장내겠다는 움직임이 아니다. 일부러 바다 쪽으로 향하는 포위는 얇게 만들고, 산으로 향하는 포위는 지독할 정도로 두텁게 쌓을 생각이다. 단순히 포위를 뚫을 목적이라면 얇은 쪽을 뚫어내야 하지만, 그럼 포위를 벗어나는 데 성공해도 바다를 등지게 된다.
“이러면 옆구리를 노려야지.”
속이 빤히 보이는 얇은 곳이나, 대놓고 들어오면 혼날 거라고 말하는 것 같은 두터운 곳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그러니 어중간한 곳을 뚫고 들어가야 한다.
“코랄린 관문을 등져야 하니까.”
싸움이 길어지게 되면, 관문 안에 있는 병력들과 관문 밖으로 나온 병력들이 서로 연합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하이랜더 전원, 싸움을 멈추고 가리킨 방향으로 돌격해. 엘렌도 가서 도와줘!”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들이 군말 없이 내 지시에 따라 공격을 중단하고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수색대는 나와 함께 하이랜더들의 뒤에 따라붙는 녀석들을 막는다!”
옆구리를 뚫으려는 시도를 올리비에가 좋아할 리가 없다. 하이랜더들에게는 엘렌을 붙여두었으니, 내 도움이 없어도 충분히 언데드 하이랜더들을 뚫을 수 있을 거다. 문제는, 뒤에 따라붙는 녀석들이다. 제7수색대에게만 맡겨놓아서는 불안하니, 나도 거기에 참가해야 한다.
하이랜더들의 뒤로 돌아간 나는 눈앞에 보이는 언데드 하이랜더의 모가지를 분신으로 잘라냄과 동시에 다른 녀석의 배를 검으로 갈랐다.
그때, 슝 하면서 뭔가가 날아와 바닥을 구른다. 로베르다.
“이야, 이게 누구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녀석의 가슴에 칼을 한 번 쑤신 다음 무시하고 다른 하이랜더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크으…….”
그사이에 회복을 마친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검을 휘두르려고 했지만, 따라붙은 클로에에 의해 공격이 막혔다.
“신발이 잘 맞는 모양이네. 계속 좀 부탁하자.”
“문제없어요.”
대답을 마친 클로에가 다시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로베르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말 그대로 날아다니는데? 능력 대신 스피나의 탄성을 통해 가속할 수 있게 된 클로에의 움직임은 내가 보기에도 굉장히 빠르고 강렬했다. 저렇게 움직이는 클로에와 내가 싸운다면 승부를 보기가 힘들 것 같은데. 주길 잘했다. 로베르를 상대하면서 주변을 제대로 파악하기는 많이 힘들었을 테니까.
내가 뒤에서 밀려오는 하이랜더들을 막아내고 클로에가 로베르를 물고 늘어지는 사이, 엘렌의 마법이 뚫기로 마음먹은 장소를 지키는 언데드의 머리 위에 쏟아진다. 그리고, 나를 비롯해 함께 싸우던 수색대의 병력들은 서서히 뒤로 물러나기 시작한다.
좋은 일이다. 우리가 뒷걸음을 친다는 건, 하이랜더들이 포위를 착실히 뚫고 있다는 뜻이니까.
“다만, 이러면…….”
슬쩍 하늘을 확인했다. 역시, 아직도 헤로스의 머리통은 아군 위에 떠 있다. 이게 문제다. 관문의 적과 언데드를 분리시켜 놓은 것까지는 좋은데. 이러면 결국 지구전을 하게 된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은 절대 밀리지 않겠지만.”
포위의 옆구리를 뚫게 되면 산과 바다를 사이에 낀 좁은 길목을 끼고 눌러앉는 데 성공한다. 그럼 숫자가 적은 우리도 대등한 싸움을 펼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아군이 지치기 전까지만 가능한 일이다.
“차라리 산 정상에서 포기하고 돌아갈 걸 그랬나.”
도리안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지금보다 크게 나을 것도 없었을 겁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애초에 코랄린 관문의 수복을 포기하고 바로 정전 협상에 들어가는 거였는데…….
올리비에 하나 조지겠다는 일념으로 여기까지 와서, 그 수많은 전통까지 포기한 하이랜더들이 휴전 소식을 듣고 '아, 그렇습니까? 저희는 그럼 이제 돌아갈까요?' 같은 소리를 할 리가 없잖아. 이 자식들이 무슨 자원봉사단체냐?
그런 소리를 꺼내면, 제국과 휴전에 성공한다 해도 하이랜더들과 치고받는 상황이 확실하게 벌어진다.
제국과의 전쟁을 막 끝낸 왕국군이 하이랜더들과의 싸움에서 이길 확률은 얼마나 될까? 나는 없다고 보는데.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당연히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 자리는 물 건너간다.
그 순간, 저 멀리 테네스 공국에서 우리에게 지원해주었던 엔리코가 엿을 바가지로 퍼먹는다. 상인이 손해를 보게 생겼는데 그냥 있을까?
코랄린 관문으로 향하지 않는다는 건 내 입장에서는 애초에 선택지에 올릴 수도 없는 물건이다. 올리비에와 나, 여기에서 지는 사람이 누가 되었건 그 사람은 전부 잃게 되는 거다.
정리하고 지시를 내리며 뒤를 치는 하이랜더들을 막아내는 사이, 앞으로 밀고 나가던 하이랜더들이 마침내 포위를 뚫는 데 성공한 모양이다.
포위를 뚫고 나오자, 곧바로 언데드 병력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한다. 그 꼴을 확인한 나는 쓰게 웃었다.
“망할 자식들이. 안 올 생각이군.”
마주하고 있는 언데드 병력들은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인다. 니가 와 플레이를 시전하고 있는 언데드를 보고 있으려니 속이 쓰리다. 이대로 주야장천 서로 얼굴 맞대고 시간을 보내는 건 우리에게 좋을 게 없다.
미로스가 지휘하는 본대가 코랄린 관문에 대한 공세를 중단하면 코랄린 관문에서 문을 열고 우리 뒤를 감쌀 거다. 거기까지 진행되면 끝이다. 그 전에, 치고받아서 마주한 언데드를 지워버려야 한다. 그럴 생각으로 온 거니까.
“마틴.”
옆에 서 있던 도리안이 내 이름을 불렀다. 나를 보고 있는 건 도리안뿐이 아니었다. 제7수색대는 전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눈빛에는 아직 싸울 의지가 남아있지만, 여기에서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저 투지까지도 꺾인다.
“이길 수 있습니다. 할 만해요.”
어려운 싸움, 쉬운 싸움. 그런 거 생각할 필요 없다. 어차피 여기에서 둘 중 하나는 전멸해야 한다. 클로에와 격돌하던 로베르도 뒤로 빠져, 언데드들과 함께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올 생각이 없다면 우리가 나아가면 된다.
말을 마친 나는 포위를 뚫는 데 성공한 하이랜더와 수색대를 보고 외쳤다.
“여기서 둘 중 하나는 끝장난다, 그게 우리가 되지는 않을 테니. 돌격해!”
말을 마친 나는 아군 병력들과 함께 달려들어 적을 들이받았다. 우리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헤로스의 머리는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싸우지 않으면 변수도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든, 싸워서 생겨나는 틈을 노려야 한다. 달려든 하이랜더들이 자신들의 선조를 향해 무기를 휘두르고, 하이랜더들의 선조는 그런 후손들을 향해 기괴한 소리를 내며 달라붙는다.
그리고, 로베르가 다시 검을 들고 나에게 달려든다. 다시 한번, 재격돌.
“정말로 네가 올리비에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로베르는 비웃는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녀석의 표정을 보던 나는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이미 여기까지 밀어붙였어, 이겨 먹지 못할 이유는 또 뭔데?”
내 말에 로베르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자신을 노리고 내질러진 클로에의 레이피어에 가슴팍이 꿰뚫렸다. 가슴에 박힌 레이피어에서 충격파가 뿜어져 나온다. 로베르의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내가 상대할게.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도와줘.”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슬쩍 나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몸조심하세요.”
클로에는 순순히 내 지시에 응해 언데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가슴에 뚫린 구멍을 순식간에 다시 메꾼 로베르가 나를 향해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그 공격을 막아내고 흘려내며, 엘렌을 향해 외쳤다!
“엘렌, 적의 왼쪽에 쏟아 넣어!”
엘렌이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양손의 연결점을 빛낸다. 하늘에서 쏟아진 벼락이 내가 가리킨 위치를 지키는 언데드를 향해 쏟아진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나는 곧이어 외쳤다.
“하이랜더들은 뚫고 들어가!”
50마리 정도 되는 하이랜더들이 내 목소리에 반응해 엘렌의 마법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로 밀려들었다.
밤이 찾아온다. 그리고, 찾아왔던 밤이 다시 돌아가고 아침이 찾아온다. 아침이 물러나며 하늘 위에 피처럼 붉은 석양을 드리운다.
싸움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도 못한 채 우리는 뭔가에 씐 것처럼 눈앞에 서 있는 적을 공격하고 있었다. 강건한 정신이 육체를 초월해 움직이는 한편, 쇠약해진 육체 또한 강건한 정신을 좀먹고 있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이어지는 전투. 휴식은 물론이고, 물도 한 모금 제대로 마시기 힘든 상황 속에서 날카롭게 갈려 있는 정신력은 결국 육체와 함께 서서히 그 예리함을 잃고, 녹슬어가기 시작한다.
“…….”
남아있는 하이랜더는 약 700, 제7수색대는 이제 열 명 남짓이 남은 상황이다. 아군 병력을 반 토막 내면서, 만들어낸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삼천 정도.”
남은 언데드는 삼천이다. 적은 일만 이천 정도가 이 자리에서 갈려 나갔다. 하이랜더 팔백을 희생해서 일만 이천의 언데드를 갈아버렸으면 분명히 대승이지만…… 숨을 몰아쉬던 나는 순간적으로 찾아온 현기증에 눈앞이 번쩍거려 걸음을 멈추고 땅에 검을 박아넣었다.
저 삼천은, 도무지 이길 방법이 없는 삼천이다. 여전히 헤로스의 머리통은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우리의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종이 한 장 차이인데!”
나는 검에 의지해 숨을 몰아쉬다가, 몸을 부르르 떨고 그렇게 외쳤다. 딱 100마리. 아니, 50마리만 더 있었어도 이길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교환비를 생각해보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결국, 변수를 만들어내는 데 실패했다. 틈이 생긴 걸 확인하고 내가 병력을 움직이려고 하면 곧바로 언데드가 움직여 그 틈을 막아버린다. 그렇게 이어져 오던 싸움이었다. 틈을 만들어내기 위해 발악하고, 적은 그 틈을 막기 위해 발악한다.
내가 조금 더 잘했거나, 올리비에가 실수했다면 이 싸움은 충분히 이길 수 있었다.
“결국, 그 여자가 맞았다는 거군.”
올리비에는 자신이 이길 거라고 생각해서 이 판을 벌였다. 나도, 내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 판에 뛰어들었다. 누가 더 이 상황을 제대로 읽었는가.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왔다.
바닥에 검을 박아넣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내 머리를 노리고 언데드가 몽둥이를 휘두른다. 바닥에 박아넣은 검을 뽑아 들어 그 몽둥이를 막았다.
몽둥이를 막아내는 데 성공한 순간, 헤로스가 건네주었던 검이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유리처럼 박살 났다.
이 검의 내구도는 내 투지에 비례한다. 이 검이 박살 났다는 건…… 결국 나도 투지를 상실했다는 뜻이다.
끝을 직감하고 하늘로 시선을 올리자, 지독하도록 원망스러운 헤로스의 머리통이 보인다.
“씨팔 놈의 해골.”
그때, 헤로스의 머리통이 나를 바라봤다. 그 순간, 모든 것이 멈췄다.
― 승리를 원하나?
하늘에 떠 있는 헤로스의 머리통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