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은 헤로스가 입을 열자 그대로 멈춰버렸다. 언데드의 썩은 살점 사이로 흘러내리던 체액까지도 뭔가에 붙들린 것처럼 멈춰있다. 마치, 이 공간이 얼어붙기라도 한 것처럼. 시야가 하얗게 변했다, 검게 물들었다.
살점이 타오르는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찌른다.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온갖 것들의 고통에 찬 절규와 비명이 귀를 쑤신다.
나는 정신을 차렸다. 다시 회복된 시야에 잡힌 것은, 이전에 봤던 그 숯덩이의 형태를 한 거대한 대검을 짚은 채 잿빛의 권좌에 앉아있는 헤로스였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재와 불티 사이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남은 해골의 텅 빈 눈두덩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긴…….”
내가 입을 열자, 권좌에 앉아있던 헤로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의 지옥이다. 매일같이 펼쳐지는 일만 팔천의 전장 속에서, 이 땅에 머무르는 모든 것들이 싸우다 죽기를 반복하는 땅이지.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헤로스는 대검을 자신의 옆에 박아넣고 나와 눈을 마주쳤다.
― 지금 네 녀석이 마주한 전장은 패배로 확정되었다.
나는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대가리 위로 몽둥이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올리비에가 언데드를 통제하고 있다면 죽지는 않겠지만, 모든 것이 끝나기 일보 직전이었다. 헤로스의 말에 거짓은 없다. 녀석의 시선은 내 손등에 남은 흉터를 향해있다.
― 그 표식은 너를 위해서 남긴 것이 아니었다. 내가 눈여겨보고 있다는 증거지.
“무엇을 위해?”
내 말에 헤로스가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확 일어난 불티가 서로 엉겨 붙더니, 누런 양피지로 변한다.
― 계약을 위해서.
계약이라. 그 순간, 엘렌이 이전에 말해주었던 내용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악마는 크게 두 종류로 나뉜다. 태어날 때부터 악마였던 태초마.
그리고, 그런 태초마와 계약해서 악마로 변한 계약마. 이 상황을 마주하고도 헤로스가 무슨 의도로 계약이라는 단어를 꺼냈는지 모를 수는 없다.
“애초부터 이럴 생각이었군.”
― 그 표식이 가진 힘은 소유자를 전장으로 향하게 하지.
전쟁이 일어나기 전 승패를 알 수 있다. 패배가 정해진 전장은 피하고, 승리가 정해진 전장에 참가한다. 백전불태의 힘을 손에 넣은 자가, 전장을 멀리할 수는 없다. 심지어, 헤로스의 표식을 받기 위해서는 뛰어난 전사거나, 뛰어난 전사가 될 자질이 있어야 한다.
뛰어난 전사가 이런 힘을 가지게 되면 가게 될 곳은 전장 말고는 없다.
― 전사가 전장을 배회하다 보면 반드시 이겨야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전장을 대면하게 되는 법이다.
“지금처럼?”
내 말에 헤로스가 긁어 올린 것 같은 웃음을 흘렸다.
― 그래. 지금처럼. 그리고, 그 순간이야말로 내가 표식을 건네준 자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순간이지.
이겨야 하지만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악마라는 호칭은 괜히 달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만화나 영화 같은 거 보면 악마랍시고 튀어나온 머저리들이 귀엽고 깜찍한 장난을 치곤 하는데. 이 친구는 머리통이 불타는 두개골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귀여운 종류의 악마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 나는 강요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너의 자발적인 선택이다.
녀석이 손에 들고 있던 계약서가 허공에 떠올라 내 앞에 멈췄다. 지장을 찍으면 된다.
나는 내 영혼을 넘겨주는 대가로 이 전장에서 패배 대신 승리를 거머쥐게 될 것이다. 그것도, 지금 이 상황에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태의 승리가 약속되어있다.
“올해 겨울, 왕도에 첫눈이 내리는 순간이라.”
헤로스가 나의 영혼을 가지러 오는 건 파이크 왕국의 왕도에 첫눈이 내리는 시점이다. 1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올해 겨울이 찾아오면 내 영혼은 헤로스의 소유가 되고, 나는 태초마 헤로스의 계약마가 되겠지.
하지만 지금 이 전장에서 패배하면 클로에와 엘렌를 비롯해, 지금 나와 함께 싸우는 모든 사람과 하이랜더들은 죽게 될 것이다.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올리비에의 장난감 신세가 된다. 이 계약서에 지장을 찍으면 최소한 그 상황은 면할 수 있다.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 사실상 협박과 다를 게 없군.”
― 내가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네가 처한 상황이 강요하는 것이지.
눈앞에 떠오른 계약서를 몇 번이고 확인한 나는 검을 들어 내 엄지에서 피를 낸 다음, 계약서 위에 지장을 찍었다.
“알아먹었다. 그러니 나에게 승리를 내놔.”
헤로스는 양피지 위에 찍힌 내 지장을 확인한 다음 웃음을 흘렸다.
― 거래는 성립했다. 이 전장에서, 너에게 승리 있으리. 부디, 영혼을 팔아넘길 정도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길 빈다.
손등에 남아있던 흉터가 꿈틀거리며, 그 형태를 바꾼다. 보통의 흉터처럼 보이던 헤로스의 표식은, 이제 확연히 어떤 문양의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헤로스의 땅에서 희미하게 흔들거리던 전장의 화염이 서서히 거세져 시야를 가린다. 화염이 잦아들었을 때, 나는 다시 코랄린 관문의 전장에 서 있었다.
언데드 하이랜더가 휘두른 몽둥이가 내 머리를 때렸다.
“…….”
애초에, 기절시킬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잠깐 시야가 흔들리던 나는 머리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훔쳤다.
“크흐.”
혈관을 타고 빨갛게 달궈진 숯덩이가 날뛰는 것 같은 고통이 퍼진다. 빨간 불티와 잿가루가 내 몸 주변에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박살 나 바닥에 흩뿌려진 검은 칼날의 조각들이 내가 쥐고 있던 칼자루에 엉겨 붙어 다시 형태를 갖췄다. 그리고, 그 칼날 위로 시뻘건 화염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좋아.”
몸속에서 날뛰던 뜨거움이 서서히 시원함으로 변한다. 마치, 굉장히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담근 것 같은 기분이다. 나는 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만으로, 내 앞에 서 있던 언데드가 숯덩이가 되어 박살 났다. 숨을 한 번 몰아쉬자, 달궈진 공기가 불티 몇 조각과 함께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으아아아아!”
검을 들어 올려 전방을 향해 휘두르자, 검에 엉겨 붙어있던 화염이 파도처럼 뿜어져 나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언데드를 휩쓴다. 적어도, 이백의 언데드가 방금 전 한 번의 휘두름으로 숯덩이로 변했다. 아군은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방금 전 참격으로 피해를 입는 건 언데드로 한정되어 있었으니까.
“네 녀석…….”
로베르가 당황한 표정을 하고 나를 응시한다. 녀석에게 달려들어 검을 내려찍었다. 내 검과 닿은 로베르의 검이 순식간에 시뻘건 쇳물로 변해 녹아내린다. 검에서 쏟아진 화염이 로베르의 몸으로 옮겨붙었다.
“크아아아아아아!”
로베르의 몸에 엉겨 붙은 화염은 죽을 때까지 꺼지지 않을 거다. 마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회복과 화상을 번갈아 경험하든지…… 아니면 능력의 사용을 중단해 죽음을 선택해야 한다. 녀석을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돌려 아직도 전장에 서 있는 언데드들을 확인하고, 달려들었다.
5분 정도가 지났을까.
헤로스는 약속했던 것처럼, 현 상황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승리를 건네주었다.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삼천의 언데드가 모두 시커먼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절대로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적들이, 불구덩이에 던져진 휴짓조각처럼 신속하게 이 세상에서 지워져버린다.
헤로스와 계약한 다음, 죽은 아군은 아무도 없었다. 적은 전멸했다.
“완벽한 승리라.”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겁던 내 몸이 다시 차갑게 식었다. 들고 있던 검을 바닥으로 던진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끝이다. 나는 약속되었던 몫을 받았고, 이제 남은 건 헤로스가 자신의 몫을 받으러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엘렌과 클로에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먼저 입을 연 건 엘렌이었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엘렌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내 손등으로 향했다. 선명하게 찍혀 있는 문양을 확인한 엘렌이 침을 삼켰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대답했다.
“헤로스와 계약했어.”
엘렌이 울컥한 표정으로 뭐라고 말하려다가 이내 눈을 꽉 감고 시선을 돌렸다.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걸 함께 밤을 꼴딱 지새우며 싸웠던 엘렌이 모를 리가 없다.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엘렌 리버플로우. 영혼을 넘긴 건 나야.”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열 받은 건 나다. 내 말에 엘렌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손수건 같은 거 있어?”
엘렌의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손수건을 꺼내서 엘렌에게 건네주었다. 엘렌은 곧장 그걸로 내 손등을 감쌌다.
“그 문양은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마. 그것만으로 네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 깔렸어.”
나는 멍하니 손등을 감싼 손수건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축해드릴게요.”
클로에는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복잡한 표정으로 내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빌려주었다. 나는 그녀의 부축을 거절하지 않았다.
“저 텐트로 가지.”
안에 누가 있을지는 뻔하다. 클로에는 나를 부축한 채 텐트로 향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그렇죠?”
클로에의 질문에, 엘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클로에는 다시 어두운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우리는 조용히 텐트 앞에 도착했다.
“기다리고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옆으로 물러났다. 나는 천막으로 손을 뻗었다.
텐트의 천막을 젖히고 진입하자 올리비에가 텐트 안에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 눈에 잡힌다. 나와 눈을 마주친 올리비에가 싱거운 어조로 말했다.
“안녕.”
잠깐 그녀의 모습을 위아래로 살피던 나는 근처에 놓여있던 의자를 가져와 거기에 앉았다.
올리비에는 책상 밑에서 뭔가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손에 쥔 검에 힘을 넣으며 만약을 대비하고 있으려니, 올리비에가 테이블 위에 뭔가를 턱 하니 올렸다.
“이건?”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 물어보지 마.”
체스판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독특하게 생긴 기계도 하나 놓여있다.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에 놓인 술병을 꺼내던 올리비에가 나를 슬쩍 바라봤다.
“너는 술을 못 마시는 나이지.”
그렇게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잔을 하나만 챙겨서 체스판이 놓인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았다.
“뭐 하자는 거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잔에 술을 따르며 대답했다.
“한판 두자.”
“미안하지만 너는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족속에는 포함되지 않아.”
내 거절에 올리비에가 눈웃음을 지으며 잔에 든 술을 홀짝이고는 대답했다.
“착수까지 제한시간은 10초로 할 거야. 5분 안에 끝날 테니 걱정하지마.”
300초라. 그 정도 시간은 낼 수 있지. 나는 자리에 앉았다.
“시작.”
생각할 시간도 거의 없이 부지런히 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끝. 내가 이겼네.”
올리비에의 말대로, 체스는 순식간에 끝났다.
“네가 이겼다고?”
“응.”
나는 잘 모르겠는데. 명확히 불리해 보이기는 하지만 아직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내 말을 들은 올리비에가 잔에 얼마 남지 않은 술을 쭉 들이켜고 나서 대답했다.
“코랄린 관문에서의 싸움도 이 체스랑 마찬가지였어. 내가 이겼어. 승기를 잡은 게 아니라 승리를 거머쥔 상황이었지.”
그렇게 중얼거린 올리비에는 체스판 위에 올려져 있는 자신의 왕을 검지로 툭 쳐 쓰러뜨렸다.
“근데 이렇게 되어버렸네.”
올리비에의 승리가 확정된 싸움에서, 올리비에가 패배했다. 이 말을 하고 싶어서 체스를 두자고 한 건가.
“설마 이제 와서 다시 한번 싸워보자는 소리를 떠들진 않겠지.”
이쪽은 영혼을 팔아넘겨서 얻은 승리다. 재도전의 기회를 줄 생각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