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내 말에 올리비에가 픽 웃고는 고개를 몇 번 저은 다음 술잔으로 손을 가져갔다.
“재도전? 그럴 생각 없어. 하지만 삼천의 언데드가 순식간에 궤멸했고, 죽이려야 죽일 수 없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던 로베르가 숯덩이로 변했어. 너에게 그런 능력이 있었다면 진작 사용했어야 하거든.”
“그래, 숨기고 있던 건 아니야.”
내 말에 올리비에가 혀를 찼다.
“마음에 들지 않아. 도대체 이게 뭐야.”
지독할 정도로 허무하게 끝난 싸움이다. 영혼을 팔고 얻은 대가는 굉장했고, 올리비에가 기대하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다른 과정을 거쳐 이 결과에 이르렀다. 그녀 입장에서는 이 상황은 과정부터 결과까지 다 실망스러울 것이다.
“세상일이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어? 네 마음에 쏙 들게 되는 일이 없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다리를 꼰 채 나를 슥 훑었다.
“내 말이.”
한숨을 내쉬는 올리비에를 바라보던 나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이전부터 궁금했던 거다.
“애초에, 네가 생각하고 있던 계획은 뭐였지?”
올리비에의 목표가 나의 생포로 바뀐 건 알고 있다. 내가 물어보는 건 그 전에 그녀가 칠색 내각을 통해 세우고 있던 계획이었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낸 다음 손을 휘휘 저으며 싱거운 말을 던졌다.
“별로 대단한 건 아니야. 공간을 격리시켜 나만의 왕국을 건설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잔뜩 옮겨놓은 채 사랑하는 사람과 천년만년 잘 살려고 했던 것뿐이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웃음을 흘렸다. 염병하네.
“그럴 리가 있나. 너 같은 게 이 세상에 좋아하는 게 있을 리 없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
올리비에가 내 말에 눈을 크게 뜨고 한 손을 자기 가슴 위에 올렸다.
“방금 네 말로 조금 상처입은 것 같아.”
“집어치워. 게다가 그 계획은 결국 도망이잖아.”
“어머, 도망이 뭐 어때서. 혹시 몸에 하이랜더의 피가 흐르는 거야?”
약간 도발하는 것 같은 올리비에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그 말에 몸을 약간 앞으로 기울인 채 대답했다.
“자기보다 열등한 너절이들이 싫어서 싸그리 쓸어내는 거라면 몰라도, 도망?”
이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피조물이 그런 선택을 할 리가 없다.
내 대답을 들은 올리비에가 잠깐 눈을 빛내더니,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마침 나도 궁금한 게 하나 있거든. 우리 서로 하나씩 교환할래?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도 사실상 마지막인데. 내가 이런 제안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어.”
나는 그 말에 수긍하는 뜻으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저 여자가 물어보고 싶어 하는 거야 뻔하니까. 내 동의를 확인한 올리비에는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격리시킨 공간에는 남자랑 여자를 잔뜩 가둬놓을 생각이었어. 아이를 만드는…… 일종의 작업장 같은 거지. 최초 목표는 10개월 후 매일 천오백 명 정도의 아이를 출산하는 거였지. 물론, 이후 차차 늘려나갈 계획이었고.”
그 말을 들은 나는 기가 막혀서 멍하니 올리비에를 바라보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잠깐, 왜?”
내 말에 올리비에가 대답했다.
“왜라니, 당연하잖아. 내 마음에 흡족한 사람이 필요하니까.”
“무슨 미친 소리를 하고 있는 거야.”
내 말에 올리비에가 혀를 찼다.
“미친 소리? 내 부모와 형제를 생각해보면, 같은 피를 이어받았다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해. 하지만 그런 사람들의 정을 받아 내가 태어났단 말이야.”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동전 하나를 꺼내 휙 던지고 받았다.
“원하는 일이 발생할 확률이 낮다면, 시행 횟수를 늘리면 될 일이잖아? 나라고 하는 낮은 확률에 당첨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막대한 양의 시행 횟수를 때려 박는다면, 언젠가는 당첨이 뜨겠지.”
사람들이 계속 아이를 낳다 보면, 결국 자기 같은 사람이 하나 더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런, 단순하고 과격한 생각을 품고 계획을 짠 모양이다.
배란유발제로 쓰이는 라하둔 꽃의 가루를 그토록 박박 긁어모았던 이유는 알겠네. 하지만…….
“그럼 그냥 저지르면 되잖아. 왜 굳이 하이랜더를 언데드로 만들면서까지 파이크 왕국을 제국에 복속시키려고 했던 건데?”
내 말에 올리비에가 대답했다.
“바보 같긴. 시설 유지비를 생각해야지. 제국에서 나오는 물자만 가지고는 감당하기 어렵다는 계산이 나왔어. 아, 붉은가지는 언데드를 되살리는 마력원으로 쓸 생각이었고, 성공했다면 십만이 넘어가는 언데드 하이랜더가 파이크 왕국을 짓밟았겠지.”
“정말…… 더럽게 무식하고 정신 나간 생각이군. 태어난 아이가 너와 비슷하다는 건 어떻게 알아내려고?”
내 말에 올리비에가 어깨를 으쓱했다.
“간단한 시험을 몇 가지 고안했지. 모두 내가 태어나서 2개월 정도 지났을 때 통과할 수 있었던 것들뿐이니까. 태어난 아이가 나와 같은 수준이라면 통과했을 거야.”
그때의 기억이 남아있는 건가. 참 여러 가지 의미로 기가 막힌 여자로군.
“계획이 실패해서 정말 다행이네.”
내 말에 올리비에는 뚱한 표정을 지은 채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표정을 펴고 입을 열었다.
“이제 네 차례야. 내 질문은 이미 알고 있으니까, 바로 대답을 들려줬으면 하는데.”
승리가 가능했던 이유. 내가 올리비에에게 건네준 대답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나는 손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풀어 올리비에에게 보여주었다.
“헤로스와 계약했다.”
내 대답을 들은 올리비에가 잠깐 움찔한 다음 나를 바라봤다.
“태초마 헤로스?”
“이 싸움에서 내가 지는 게 확정되었을 때, 헤로스가 나타났지. 나는 이 싸움의 승리를 원했고, 헤로스는 그 대가로 내 영혼을 원했어.”
내 대답을 들은 올리비에의 표정이 갑자기 확 변했다. 방금까지의 무심한 표정이 어디로 달아나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올리비에의 표정은 구겨져 있었다.
“그거. 정말, 짜증 나네. 방금까지만 해도 단순히 허탈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개 같아.”
팍 하고 자리에서 올리비에가 일어났다.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겨누었다. 하지만, 그녀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거의 다 된 상황이었어. 너를 생포하기까지 몇 분 남지도 않은 상황이었는데.”
“너에게 잡히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내 말에 올리비에가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넌, 내 꺼였단 말이야. 네가 못 죽는 상황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어! 알아?!”
그런 외침과 함께 올리비에가 손을 뻗어 자신의 목줄기를 겨눈 검의 칼날을 꽉 붙잡았다.
“다 끝난 상황이었어. 내가 이겼고, 넌 내 전리품이었단 말이야. 그걸 가장 중요한 순간 어디에서 탁 하고 튀어나온 불타는 해골바가지가 휙 하고 가로채다니!”
주르륵, 칼날에 베인 올리비에의 손바닥에서 피가 흘러내린다. 흘러나오는 피의 양을 보니 꽤 깊게 베인 모양인데. 안 아픈가?
한동안 숨을 거칠게 몰아쉬던 올리비에가 다시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수명. 얼마나 남았어?”
저 질문을 던지는 걸 보니, 태초마와의 계약이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올리비에의 말에 나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걸 댁이 궁금해할 이유가 있나?”
“원래 질문은 하나씩 하기로 했지만 너는 여러 개를 했고, 나는 성실히 대답해줬어.”
나는 쯔, 하고 혀를 찬 다음 대답했다.
“왕도에 첫눈이 내리면 가지러 온다더군.”
“그래? 그 악마가 어지간히 몸이 달아올라 있었나 보네. 보통 적어도 5년 정도의 시간을 주는 걸로 아는데.”
내 말을 들은 올리비에는 칼날을 잡고 있던 손을 휙 놓고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서는 웃음을 흘린다. 다시 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다.
“결과를 못 보는 게 아쉽네. 출제자가 채점하지 못하는 문제라니. 뭐, 그것도 나쁘지 않아.”
“무슨 소리야?”
내 말에 올리비에가 피가 흘러내리는 자기 손을 이리저리 훑어보다가 부드러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런 소리지. 태초마와의 계약을 무효로 되돌리는 방법은 분명히 존재해. 내가 본 기억이 있거든. 도덕적인 거리낌 없이 쓸 수 있는 방법이야. 올해 겨울이라…… 내 예상이 맞다면 시간은 충분할 것 같은데.”
내가 맺은 계약을 무효로 되돌릴 방법이 있다고? 나는 그 말에 침을 삼킨 다음 대답했다.
“여전히 사람을 쥐고 흔들려 그러는군. 어차피 네 운명은 안 변할 거다.”
저 여자가 거짓말을 씨불이고 있을 확률이 너무 높다.
그 잠깐 사이에 빠져나갈 구석을 찾아내서 쑤시고 들어가려는 모양인데. 내가 영혼을 판 건 올리비에의 향후 처우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다.
이 여자와의 악연은 여기에서 완전히 끝난다.
“나는 지금 한 조각의 거짓 없는 진실을 말했어. 생각을 좀 해봐. 내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를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야?”
나는 잠깐의 침묵 끝에 대답했다.
“그거, 나를 위해서 해준 조언이 아니군.”
헤로스를 엿 먹이기 위해서 해준 말이다. 올리비에는 목표로 삼았던 나를 거의 다 잡은 상황이었는데, 갑자기 그 해골바가지 새끼가 떡하니 끼어들어 다 된 밥에 설사를 뿌렸다.
당연히 이 여자는 그 해골에게 화가 났고, 그 새끼도 자기처럼 똑같이 엿을 먹었으면 하는 거다.
내 말을 들은 올리비에가 그제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의자에 허리를 묻었다.
“하여튼 둔하긴. 머리를 좀 더 열심히 써.”
“더 자세히 말해.”
내 말에 올리비에가 고개를 저었다.
“싫어.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려주면 무슨 재미가 있어?”
재미라. 이 여자는 사지가 꽁꽁 묶여 파이크 왕국으로 끌려가 백치가 되는 미래를 앞두고도 끝까지 재미를 찾고 싶은 모양이다.
아니, 이건 단순히 재미로 하는 일이 아니다.
의도는 알 것 같다. 올리비에는 이 정도만 알려주면 내가 헤로스와의 계약을 무효로 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약, 내가 성공한다면 그녀가 헤로스를 이긴 거다. 반대로, 내가 실패한다면 헤로스가 그녀를 이긴 거다. 이 여자는 나를 통해 헤로스와 대리전을 펼칠 생각이다.
슬프지만, 나는 그 장단이 맞춰서 놀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올리비에를 향해 말했다.
“한 30분 뒤에는 말하게 해달라고 애원할…….”
말하면서도 생각을 이어가던 나는 순간 하려던 말을 멈췄다. 올리비에는 여전이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너 설마.”
내가 입을 열자 곧바로 올리비에가 웃었다.
“30분? 미안. 1분 뒤에는 뭔 짓을 해도 내 입은 열리지 않아.”
말을 마친 올리비에의 입에서 울컥, 하고 피가 섞인 거품이 흘러내린다. 순간 움찔한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독인가.”
내 앞에서 먹었으면 몰랐을 리가 없다. 이미 먹어두었던 거다. 효과가 늦게 발휘되도록 따로 조치해 두었던 건가.
이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뜻이다. 헤로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더라도, 이 여자는 여기에서 죽을 생각이었다.
그녀는 히죽 웃으며 자기 입가를 훔치고는 기침을 몇 번 하고는, 약간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할지 훤히 보이는데, 왕도로 순순히 끌려갈 거라고 생각했어? 약을 퍼먹고 자기 이름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병신이 되느니, 이 자리에서 죽고 말지.”
나는 잠깐 불편한 표정을 지은 채 그 꼴을 바라보다가 심호흡과 함께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유서 같은 건 없나?”
이 상황에서 아무것도 안 남기고 죽어버리면 내가 의심받게 된다. 내 말에 올리비에가 떨리는 손으로 뭔가를 의자 위에 올리며 중얼거렸다.
“내 무수한 장점 중 하나가 뒤끝이 없다는 점이지.”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지랄도 가지가지 한다.”
뒤끝이 없기는, 가질 수 있었던 걸 다른 녀석이 가로챘다고 엿을 먹이는 주제에 뒤끝이 없긴 뭐가 없어.
유서의 내용을 확인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유서라면 올리비에의 죽음이 타살로 생각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렇게 되면 내 입장에서는 나쁠 거 없다. 이건 타살이 아니라 자살이고, 자살은 내 책임이 없다. 황녀가 자살한 걸 가지고 제국에서 왕국에게 뭐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그녀가 했던 말처럼, 뒤끝이 생길 여지는 모두 지워둔 모양이다. 나는 슬쩍 올리비에의 얼굴을 확인했다.
이 여자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해주는 게 좋을까. 잠깐 말을 고르던 나는 간단한 인사말을 던졌다.
“잘 뒤져라 이년아. 지긋지긋했다.”
저 꼴로 죽는다고 해서 내가 슬퍼할 이유는 없지. 죽게 된 사람들 중에는 불쌍한 사람들도 많지만, 별로 불쌍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는 법이니까.
죽음을 앞두고 있지만 내 말을 못 들을 정도는 아닌지, 올리비에가 고개를 몇 번 끄덕이고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나를 가리키며 힘겹게 말했다.
“죽는 건 나지만, 이긴 건 나야.”
“그건 맞아.”
저 여자가 추잡하게 구는 게 아니다. 나는 졌다.
저 여자 때문에 헤로스에게 영혼을 팔았으니까.
만약, 내가 헤로스와의 계약을 무효화 하는 데 성공해도 그것 또한 저 여자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가며 던져놓은 말 덕분이다.
저 여자가 방법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돌아가서 그 불타는 해골이 내 영혼을 삥땅치기 전에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나 작성하고 있었겠지.
올리비에는 힘겹게 손수건을 꺼내 입가의 피를 훔쳐내더니, 뻘겋게 물든 그 물건을 내 쪽으로 휙 던졌다.
“뭔데 이건.”
“네 패전 기념품.”
올리비에는 피 가래가 끓는 기침을 몇 번 한 다음,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이제 잘 시간이야. 피곤하니까 꺼져.”
부글거리며 피거품을 쏟아내던 올리비에의 움직임이 완전히 멈췄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목을 짚었다. 심장이 뛰지 않는다.
머리카락 하나를 뽑아 코 근처로 가져갔다. 미동도 없다. 10분 정도 그러고 있었다. 사람은 이렇게 오래 숨을 참을 수 없다.
“…….”
그 뒤로도, 나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올리비에를 추모하는 건 아니다. 그저, 확인해야 할 게 있기 때문이다.
마침내, 한 시간 정도 뒤 그녀의 몸을 살피던 나는 등에 생긴 시반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걸로 사망은 확실해졌다. 바닥에 버려진 손수건의 피는 그사이 완전히 변색되었다.
“패전기념이라.”
나는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을 챙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