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77화 (177/275)

177화

나는 그 말에 쓴웃음을 지었다. 이 인간은 한 나라의 세자에다가, 서른이 넘은 주제에 말도 안 되는 떼를 쓰고 있군. 어쨌든, 저러는 걸 보니 내가 죽게 되면 요청은 들어줄 것 같다.

“저에게 약속되었던 자리가 있는 걸로 압니다.”

―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로 임명하는 걸 말하는 거겠지.

“네, 테네스 공국의 엔리코라는 상인과 한 거래 때문에, 저는 그 땅의 영주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당장 직접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로 부임해서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는 상황이다. 따라서, 내 일을 대신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제가 목숨 연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돌아다니는 동안은, 제 어머니가 영주 대리를 해주셨으면 합니다.”

― 그래, 현재로서는 그게 최선일 것 같군.

내 어머니가, 나중에 내가 돌아왔을 때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 자리를 나에게 돌려주지 않으려고 들리는 없다.

“더 자세한 요청사항은, 정리해서 나중에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 그러도록 하게.

잠깐 침묵하고 있던 세자는, 연락이 끊기기 전에 한마디를 덧붙였다.

― 죽지 말아라, 마틴 레드우드. 이 나라의 세자이자, 장차 왕이 될 자는 네가 필요하니.

그걸로 연락은 끝났다. 밖으로 나오자. 나는 앞에 서 있는 하이랜더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고생했다.”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 텐트 안에 있던 여자가 조상의 시체를 모독한 원흉이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그거 다행이네. 혹시 증명하지 못하면 어쩌나 걱정했거든. 엘렌이 무사히 성공한 모양이다.

“너는 네 맹세에 대한 의무를 다했다. 우리 또한 그럴 것이다. 여전히 나는 네 말을 존중할 것이고, 이후 네 후손에게 자격 있음이 밝혀진다면 그 후손의 말 또한 존중할 것이다.”

나와 하이랜더들이 서로 했던 약속이다. 애초에 단체 생활을 하지 않는 하이랜더라서 나는 네 말을 존중한다고 표현했지만. 저건 사실상 지금 이 자리에 모여있는 하이랜더 전원의 의견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돌아갈 건가?”

내 말에 하이랜더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생각이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아직 저 돌벽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녀석들에게는 항복을 받아내지 못했어.”

저 녀석들까지 항복한다면, 그 이후에는 일사천리다. 어차피 언데드가 된 하이랜더를 다 잃어버린 제국 입장에서는 더 이상 파이크 왕국을 압박할 수 없다. 하이랜더의 숫자도 굉장히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이 친구들은 숫자가 줄어든다고 해서 그 강력함이 훼손되는 건 아니거든.

“다시 싸워야 한다면, 그리하겠다.”

그리고 하나 더 미리 결정해두어야 하는 일이 있다.

“나는 이번 일을 기회 삼아 하이랜더들과 조금 더 긴밀해지고 싶은데.”

내 말을 들은 하이랜더가 작게 콧김을 뿜어내고는 대답했다.

“나는 너와 같은 적을 두고 함께 싸웠다. 이 이상으로 긴밀해지는 길은 없다.”

“서로 연락할 수단이 필요하다.”

하이랜더 한 명 정도를 따로 정해서, 주기적으로 내가 받게 될 영지와 하이랜더들 사이를 교류하도록 해야 한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도 앞으로의 교류가 예상되면 연락처를 교환하잖아. 하이랜더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말뜻은 알겠다. 따로 생각해둔 것이 있느냐.”

“겨울걸음. 아직 살아있나?”

가장 처음 교류를 시작한 하이랜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가 목숨을 빚진 마당에 이런 부탁까지 하는 건 염치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한 명을 뽑으라고 하면 그 친구가 좋을 것 같다.

“물어보겠다.”

말을 마친 하이랜더가 몸을 돌려 하이랜더들이 모여있는 장소를 향해 걸어갔다. 잠깐 겨울걸음과 대화를 나눈 하이랜더가 돌아왔다.

“겨울걸음은 네 말에 동의했다.”

만족스러운 대답이네. 이제 해야 할 건…… 코랄린 관문에서 내가 할 일은 더 이상 없어 보인다.

알아서 정전 협상에 들어가겠지. 그리고 그 협상 테이블 위에서는 파이크 왕국이 베로나 제국을 압박해서 충분히 많은 이득을 뜯어낼 수 있을 거다.

저 멀리에서, 그사이 목욕을 마쳤는지 약간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비며 엘렌이 다가왔다.

“올리비에의 시신은?”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더 늦기 전에 보존마법을 걸었어. 이유야 어찌 되었건, 제국 황녀의 시체가 훼손되면 이런저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잖아?”

어쨌든, 제국으로 보내서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

“언데드로 되살아나고 그러는 거 아니야?”

내 말에 엘렌이 픽 웃었다.

“되살리든가. 저 황녀가 무서운 이유는 강인한 육체 때문이 아니잖아. 으어어어 하는 여자 시체 한 구 정도야 굳이 우리가 나설 필요도 없지.”

하이랜더들도 이미 죽은 시체에 화풀이하는 성미는 없어 보인다. 사실, 저 여자가 하이랜더들에게 저지른 일을 생각해보면 시체에 대고 분노를 풀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미 죽은 시체에 화를 푸는 전통은 없는 모양이지.

잠깐 나를 바라보던 엘렌이 억지로 표정을 밝게 한 다음 내 등을 탁탁 치며 말했다.

“최소한, 오늘만큼은 너도 맛있는 걸 좀 먹고 푹 쉬도록 해. 시간제한이 있긴 하지만, 어차피 준비에는 제법 시간이 필요하잖아?”

“말하지 않아도 그러려고. 클로에한테 내 텐트로 좀 와달라고 해줘.”

당일치기 여행을 가는 것도 아닌데, 당장 짐 싸서 제국으로 떠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준비해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까.

잠시 뒤, 클로에가 내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가짜 신분이 필요할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외모도 위장해야겠죠. 세간 사람들의 눈을 속일 거짓 일정도 필요해요.”

제국으로 향해야 한다는 점이 정해졌다. 클로에는 원래 첩보부 소속이었으니, 몰래 국경을 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빠삭한 편이었다.

“사람들의 눈을 속일 일정은 나도 생각해뒀어.”

내 말에 클로에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한번 들어보고 싶은데요.”

“쿠르스트 산맥에 대한 대대적인 지질 조사와 측량이 필요할 예정이잖아?”

하이랜더들의 터전을 빼앗을 생각은 없다. 쿠르스트 산맥의 모든 것이 내 손으로 들어올 일은 없을 거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 국경 수비대가 지키고 있던 군사 구역은 이제 내 손에 들어올 것이다. 당연히, 적절한 개발과 자원 채굴을 위해서는 측량과 지질 조사를 빼놓을 수는 없다.

하루 이틀이 걸리는 일이 아니다. 올해 겨울이 오기 전까지는 절대 끝나지 않을 거다.

“지질 조사와 토지 측량은 테네스 공국에 머무르는 엔리코의 도움을 받을 거야. 물론, 필요한 자금은 우리가 지원할 생각이고.”

어차피 엔리코 입장에서도 향후 거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다. 그 녀석도 군말 없이 사람을 보낼 것이다.

“엔리코가 보낸 사람들이라면, 도움을 받아서 우리가 지질 조사와 토지 측량을 하는 중이라고 속일 수 있겠네요.”

자세한 사정을 말하지 않아도 일단 엔리코는 내 요청에 협조해줄 거다.

“그 일을 하기 위해서 한동안 쿠르스트 산맥에 머물러야 할 테고, 그사이에 영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은 어머니에게 일임하는 형식이 되겠지.”

“그렇네요. 아, 레드우드 부인께는 말씀을 드릴 생각인가요?”

나는 그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은 다음 고개를 저었다. 벌써부터 걱정하게 만들 생각은 없다.

“알겠어요. 그럼, 필요한 조치를 준비하도록 할게요. 아 참, 엘렌 리버플로우 양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죠, 동행인가요?”

“그건 엘렌에게 물어봐야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의사는 제가 확인해볼게요.”

“고맙다. 그리고, 미안하지만 약속했던 휴가는 조금 뒤로 미뤄줘.”

내 말에 클로에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마틴 님 아래에서 일하다 보니 쉬는 것보다는 뭐라도 하고 있는 편이 마음이 편하더라고요. 때 되면 알아서 가겠다고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오늘은 쉬세요.”

“그럼 자장가라도 좀 불러주고 가는 게 어때.”

내 말에 클로에가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될까요? 불러드리다가 잠드시면 베개로 얼굴을 꽉 눌러드릴게요.”

암살이라. 나는 그 말에 혀를 차다가 히죽 웃었다.

“어차피 시한부 인생이니까 상관없어. 부하 손에 죽으면 그것도 그것대로 나쁘지 않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다소 불편한 표정을 지었다.

“당사자가 그걸 농담 삼으면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웃기가 힘든 농담인데.”

“내가 또 분위기 조져놓는 건 선수거든.”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나는 곧장 침대로 기어들어 가 눈을 감았다.

“어으.”

하도 개고생을 했더니 허리가 아파서 제대로 눕지를 못하겠네. 나는 모로 누워서 눈을 감았다.

자다가 발소리가 들려서 눈을 떴다. 텐트 밖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마틴 님, 주무세요?”

“니가 깨웠다.”

클로에였다.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천막이 들춰질 때 밖을 확인했는데 꽤나 밝았다. 그대로 아침까지 때려 잔 모양이네.

잠이 덜 깨서 몽롱하지만, 푹 쉬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컨디션이 좋아졌다.

“무슨 일이야?”

“코랄린 관문에서 엘렌 양이 보낸 전문에 답을 돌려주었어요. 순순히 포로가 될 생각인 모양이에요.”

올리비에가 죽고 언데드 하이랜더가 전멸한 지금 저 녀석들이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그것뿐이었으니까.

“자랑스러운 우리의 조국이 제국으로부터 삥땅 칠 수 있는 돈이 더 많아졌네.”

사로잡힌 포로는 돈을 받고 풀어주는 게 일종의 관습이다.

“아니면, 그냥 풀어주고 외교적으로 이득을 더 가져올 수도 있어요.”

그거야 뭐, 왕국의 높으신 분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하겠지.

“아, 사실 그런 것보다는 식사를 하셔야 하지 않나 싶어서.”

클로에는 그런 말과 함께 천막 밖으로 나가서 음식이 담긴 접시를 챙겨 다시 돌아왔다.

소시지와 햄, 달걀 요리와 구운 감자 같은 것들이 접시 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댤걀이라니. 전장에서 먹기 힘든 물건을 용케 구했네. 넌 식사했냐?”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밖에 접시 하나 더 있는데, 들고 들어올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하면서 들어두어야 할 이야기도 있으니까.

“베로나 제국에서는 첩보국의 도움을 어느 정도는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어요.”

첩보국의 주 활동무대니까.

“그렇다고 해도 왕국에서처럼 도움을 받기는 힘들겠지.”

“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누가 뭐라고 해도 적국이고, 우리는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하니까요.”

그래도 활동에 필요한 자금이나, 우리가 따로 시간을 투자해서 긁어모으기에는 가성비가 영 좋지 않은 정보 정도는 첩보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거다.

“지금은 일단 왕도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겠지.”

“네, 제국으로 몰래 들어가기 위한 준비가 아직 진행 중이니까요.”

그사이 나는 왕도로 돌아가 국왕 폐하에게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 자리를 인정받을 생각이다.

“세자 저하도 이미 내 사정을 알고 있으니,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주실 거야.”

지금 내가 승전에 취해서 낭비할 시간이 없다는 건 세자도 알고 있다. 처리는 빠를 테고,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는 내 어머니인 로델린이 영주 대리로서 행동하게 될 것이다.

“레드우드 부인이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어머니라면 괜찮을 거야.”

수완이 나쁜 사람이 절대 아니다. 레드우드 영지에서 머무를 때는 단순히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아내일 뿐이었지만, 이후에 보여준 모습은 그냥 불행한 귀부인 같은 게 아니었으니까.

“레드우드 부인에게 혼담 제안이 들어올 수도 있어요. 사실, 신분위조 관련해서 첩보국의 도움을 받으며 슬쩍 물어봤거든요. 혼담을 검토하고 있는 귀족들이 꽤 있다고 들었어요.”

그녀는 사실상 이혼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다른 귀족들이 로델린이 현재 처한 상황을 모를 리는 없다.

원래, 이혼한 여자에게 혼담이 오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로델린은 아직 젊은 편이고, 아들인 내가 워낙 왕국 안에서의 입지가 튼튼해진 상황이다.

다른 귀족들 입장에서는 이혼한 여자라고 하는 흠결을 감수하고라도 혼담을 넣어볼 만한 상황이 되었다.

“어머니가 괜찮은 상대를 만나서 재혼을 원한다면 나는 상관없어.”

“문제는, 레드우드 부인의 성격이라면…….”

나는 그 말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혼담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그녀는 나를 위해서 정략결혼을 생각할 확률이 높다.

“왕도에 가면 확실히 말씀드려야겠지.”

나는 내 어머니가 별로 마음도 없는 상대와 결혼하면서까지 입지를 강화해야 할 정도로 무능력한 찌끄레기가 아니다.

“그럼, 하이랜더들은 다시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게 하고, 저희는 오늘 중으로 왕도로 출발하는 걸로 알고 있으면 될까요?”

“그래.”

뭐 승전 행사랍시고 참전했던 병력들을 위로하고, 죽은 병사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오늘부터 열릴 예정이긴 하지만…… 지금 내 발등에 용암이 쏟아지려는 상황이니까.

우리는 아침 식사를 마치는 대로 빠르게 짐을 싸서, 사람들의 양해를 구하고 왕도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