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그 뒤, 서둘러 전장을 떠난 우리는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왕도에 도착했다.
진입하는 거대한 성문 앞에 다다르자 성벽 위의 병사가 내 얼굴을 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 도착하셨다!”
그 외침과 동시에 성벽 위에 있던 병사들이 일제히 나팔을 불기 시작했다. 단체로 뭐 하는 거야. 나는 다소 황당한 마음을 억누른 채 둔중한 소리를 내며 열리는 성문을 바라봤다.
열린 성문 너머에는 왕도에 있는 사람들이란 사람들은 죄다 몰려있는 것 같이 거대한 규모의 인파가 자리 잡고 있었다.
“해내신 일이 있으니까, 당연한 대접이잖아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입맛을 다셨다. 하긴, 이제 이 나라의 완전 독립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업적을 이루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건 나다. 사람들이 미쳐 날뛰는 것도 이해되긴 한다.
“그거 참.”
성문 안으로 진입하는 것도 굉장히 부담스러운데, 내가 안으로 들어서자 무슨 모세가 홍해 앞에서 지팡이를 내려찍은 것처럼 사람들이 쫙 갈라지더니 뭔가를 꺼내서 뿌리기 시작한다. 연한 분홍빛을 띤 종이들이 바람을 타고 휘날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그 사이에도 우렁차게 내 이름을 외치고 있었다.
“마틴 레드우드 님. 저는 왕도의 북쪽 성벽관리를 맡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모시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바로 왕궁으로 향하시는 겁니까?”
나는 그 말에 그에게 인사를 하고 대답햇다.
“국왕 폐하와 세자 저하께 인사를 올리는게 우선이니까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내 말에 그가 경례와 함께 대답했다.
“짧은 거리지만, 최선을 다해 불편함 없이 모시겠습니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공손한 대접을 받으면서, 나는 왕궁까지 안내받았다.
“마틴 레드우드 님. 들어가시면 됩니다.”
왕궁의 문 앞을 지키던 병사들이 나를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양옆으로 비키더니 그대로 경례를 올린다.
“검문은?”
“폐하께서 마틴 레드우드 님 및 그 일행에 한해 검문을 생략하라는 어명을 내리셨습니다.”
원래 당연히 진행해야 하는 왕궁 앞에서의 검문까지 깔끔하게 생략되었다. 문자 그대로 나라의 영웅 대접 하나만큼은 톡톡히 받아내는 중이군.
“그런가? 알겠다.”
프리패스를 시켜준다는데 캐물을 필요는 없겠지. 나는 병사의 말에 순순히 동의한 다음 왕궁으로 진입하는 입구를 넘었다.
“국왕 폐하와 세자 저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응접실로 드시지요.”
마중 나온 사람의 안내를 받은 나와 클로에, 엘렌은 곧바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오라. 고생이 많았다지.”
응접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당연히 꽤나 노쇠한 파이크 왕국의 국왕과, 이미 얼굴을 마주 본 적이 꽤 많은 세자였다.
“국왕 폐하를 뵙습니다.”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국왕이 인사를 받아주었다. 간단하게 인사를 마치자 문이 열리고 시종들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고 들었다.”
차를 마시고 있으려니, 갑자기 국왕이 서론을 뜯어먹고 본론을 내밀었다. 그래,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편이 좋다. 왕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일부러 이런 식의 화법을 선택한 거겠지. 그나저나…… 이 왕이라는 양반은 지금 내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까지 알고 있는 걸까.
찻잔을 내려놓은 왕이 나에게 시선을 던졌다. 왕과 눈싸움을 하는 건 당시 왕의 기분에 따라서는 교수형까지 갈 수 있는 사건이기에 나는 자연스럽게 눈을 깔았다.
“과인은 이 나라의 왕이지만, 떠도는 풍문을 억누르는데에는 한계가 있다. 시간이 없다 해도 너는 이를 명심하여 이후 운신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라.”
제대로 알고 있는 모양이군. 세자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돕기 위해서는 국왕의 협조가 필요하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자리를 비울 명분은 있느냐.”
나는 국왕의 질문에 미리 질문했던 대답을 돌려주었다. 내 대답을 옆에서 듣고 있던 세자가 턱을 쓰다듬었다.
“측량과 지질조사라. 확실히, 쿠르스트 산맥은 미개척지다 보니 가장 기본적인 조사조차 진행되지 않은 상태지.”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랜더들에게 공격받지 않고 무사히 조사를 마치기 위해서는 제가 꼭 동행해야 할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국왕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와 세자를 번갈아 바라본 다음 흐뭇하게 웃었다.
“상세한 계획에 대해서는 그와 함께 상담하는것이 좋으리.”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왕은 잠깐 수염을 쓰다듬으며 나와 세자를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왕이 문을 나서고,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베로나 제국 황제는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올리비에 황녀를 죽인 자가 자신의 권역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제국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 전부를 너 하나 잡자고 보낼 수도 있는 미친놈이지.”
“그런 황당한 친구가 지금까지 잘도 황제 자리에 있었군요.”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베로나 제국은 그런 머저리가 연달아 두 번 정도 더 황제로 있어도 문제없이 돌아갈 정도로 국가 기반이 튼튼한 나라야.”
“왕국은 어떻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자식이 암군이면 위태로워지겠지.”
중국의 명나라가 망하기 위해서 네 명의 암군이 필요했다던가. 원래,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수가 국가의 힘을 잴 수 있는 모든 척도는 아니다.
그렇게 치면 호주는 상비군이 대충 6만이 조금 안되는 수준이니까 북한보다 더 불안정한 나라게?
관료체제, 법, 경제적인 성장 정도…… 국가의 힘을 재기 위한 기준은 굉장히 많다. 동원할 수 있는 군대의 규모가 비슷하다고 같은 수준의 나라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단, 황제라는 친구가 자기 딸인 올리비에에게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기 힘든 규모의 사랑을 쏟아 넣었다는 건 알았다.
“장담하는데, 제국 정보처는 자네에게 굉장한 관심을 보일 거다.”
황제의 지휘를 받는 조직이다. 정보처는 황제가 관심을 보이는 정보를 수집한다.
황제가 올리비에의 죽음에 관여한 나에게 관심을 보이면, 제국 정보처는 자신의 주인이 원하는 사냥감을 찾아내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
“첩보국에서 제국에 공작을 펼치기는 쉬워질 것 같습니다.”
제국 정보처는 이 나라의 첩보국처럼 사냥개다. 사냥개는 주인이 잡아 오라 명한 사냥감을 물어온다. 그 사냥감보다 더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사항이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들의 판단 영역도 아니다.
제국 정보처가 나에게 집중하면, 왕국의 첩보국은 제국에서 대외공작을 펼치기가 훨씬 수월해 질 것이다.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그러다 자네가 죽게 된다면 교환비가 나빠.”
나는 그 말에 찻잔을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세자 저하께서 집중적으로 대비하셔야 하는 건 제 목표의 달성 여부가 아닙니다.”
내가 성공한다면, 그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 내가 실패한다면,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세자는 나를 돕는 동시에 다음을 생각해두어야 한다.
내 말에 세자가 잠깐 턱을 쓰다듬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에 일리가 있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에가 대답했다.
“첩보국에서 베로나 제국으로의 밀입국에 필요한 준비를 하는데 각별히 공을 들이고 있다 들었습니다.”
클로에의 말에 세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공해 줄 수 있는 건 위조 신분과 위급할 때 잠깐이나마 몸을 숨길 수 있는 은신처, 활동 자금 지원 정도야. 그 이상을 하려 들면 되려 자네에게 화를 부를 수도 있으니까.”
큰 움직임은 흔적을 찾아내기 쉬운 법이니까.
“움직이는 인원은 몇 명 정도로 예상하고 있나?”
나는 그 말에 짤막하게 대답햇다.
“두 명, 만약 엘렌이 저에게 호의를 배푼다면 세 명 정도를 예상하고 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엘렌이 바로 대답했다.
“빼고 갈 생각하지마. 마법이 장애물이 되면 어쩌려고.”
나, 클로에, 엘렌. 이렇게 세 명 정도면 충분하다. 그 이상을 움직여야 할 이유가 없는데 무리 지어 다닐 필요는 없다. 내 말을 들은 세자가 잠깐 신중한 표정을 거두고 가볍게 농담을 던졌다.
“자네는 목숨이 경각에 달렸는데도 양손에 꽃을 쥐고 나아가려 하는군.”
나는 세자의 말에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제가 처한 상황을 아는 사람의 숫자를 늘리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두 사람은 유능하고, 신뢰할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따라다니는 숫자가 많아진다고 안전해지는 건 아니지. 그럼 그렇게 알고 안배해두도록 하겠네.”
말을 마친 세자가 벽에 걸려 있는 왕국의 지도를 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 주제. 구체적으로 받고 싶은 영지의 크기를 말해보게.”
나는 그 말에 지도를 살피다가 대답했다.
“록밸리 마을과 그 인근의 작은 촌마을 다섯 곳, 그리고 쿠르스트 산맥 정도를 원합니다.”
협상의 여지는 없다. 세자가 나에게 신뢰를 보내고 있는 상황에서, 땅 몇 뼘 더 얻자는 욕심에 흥정을 시도하는 건 도리어 손해다.
“쿠르스트 산맥을 제외한다면, 꽤나 소박하군.”
“핵심은 쿠르스트 산맥이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세자가 한동안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영주임명식은 꼭 필요한 절차이고, 약식으로 진행한 전례가 없어. 자네 마음이 급하다는 걸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나는 그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제 마음이 급하다고 해도 밟아야 하는 절차는 진행해야겠죠.”
내 말을 들은 세자가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약식으로 진행한 전례가 없으니, 전통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다소의 준비가 필요하니, 잠시 기다려달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야.”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하지만, 정식으로 영주임명식을 치르는 것보다는 훨씬 빠르게 일을 진행할 수 있을 거다. 그게 아니라면 세자가 저런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으니까.
“자세한 이야기는 첩보국장에게 듣도록 하게. 그나저나…….”
세자가 말꼬리를 끈다. 뭔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말을 끈다는 느낌은 아니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저러는 걸까.
“레드우드 부인이 꽤나 골치가 아프겠어.”
“네?”
로델린이 골치가 아플 일이 뭐가 있지. 잠깐 생각하던 나는 이내 대답했다.
“제 결혼 이야기겠군요.”
내 말에 세자가 빙글빙글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요 며칠 사이 받아본 연락만 스무 건이 넘는 걸로 아는데.”
세자의 말을 들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결혼은 무슨 망할 놈의 결혼.
“1년 뒤에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녀석이 결혼을 생각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물론 로델린에게 연락을 넣은 귀족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자꾸 연락을 넣는 거다.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떠보는 것처럼 한 마디를 툭 던졌다.
“혹시 모르니, 마음 맞는 사람이 있다면 늦기 전에 후사를 남겨놓는 게 어떤가?”
후사 같은 소리 하네. 나는 그 말에 간단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자식이 아비 없이 자라게 만들 생각은 없습니다.”
자식은 낳는다고 만사가 아닌 법이다. 하다못해 개를 키울 때도 책임감이 필요한 법인데, 사람이면 오죽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