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79화 (179/275)

179화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묘한 표정을 짓더니 클로에 쪽으로 슬쩍 시선을 주나 싶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했다.

“하긴, 어지간한 여자가 어디 네 눈에 차겠냐만.”

무슨 의미인지는 정확하게 알겠는데, 별로 반응해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잡소리가 점점 길어지는 걸 보니, 꼭 나눠야 하는 중요한 이야기는 끝난 모양이네.

“첩보국장은 지금 왕도에 머무르고 있습니까?’

“그래. 자신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을텐데, 보러 갈 생각인가?”

“그렇습니다. 나눠야 할 이야기가 있어서.”

내 말에 세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내주지. 내궁에 쉴 곳을 마련해 둘 테니, 볼일을 마치고 나면 세 명 모두 돌아와서 쉬도록 하게.”

“감사합니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를 걸어가고 있으려니 창문을 닦고, 바닥 청소를 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옆으로 비켜선다.

이 친구들, 예전에는 이 정도로 공손하게 굴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그린모스 늪지대나 쿠르스트 산맥보다 직접적으로 와닿는 이야기잖아요.”

왕국의 완전 독립. 왕도에 사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저 멀리 구석탱이 산간벽촌에서 일어난 일은 그러려니 하면서 넘어갈 수 있지만, 왕국이 독립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사람이라고 하는 타이틀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공물을 바칠 시기가 되거나, 무슨 행사가 있을 때마다 제국에서 파견된 사신들이 거들먹거리는 꼬라지를 두 눈으로 봤을 테니까.

궁 앞에는 마차가 준비되어있었다.

“이거,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는 건 정말 간만인 것 같은데.”

“얼굴을 보고 이야기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겁니까.”

너 그 얼굴 가짜잖아? 알버트는 저택에 머무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거다.

“마틴 레드우드. 어서오게. 차 한 잔 하겠나?”

알버트의 말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오랜만입니다, 첩보국장님. 차는 지금 막 마시고 오는 길이라. 냉수 한 잔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래? 알겠네.”

후릅, 하는 소리가 들린 다음 알버트는 눈을 빛내며 나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요청하는 것들에 대해 최대한 편의를 봐주라는 국왕 폐하의 지시가 내려졌어.”

“그렇습니까.”

아무래도, 헤로스와의 계약에 대한 이야기는 첩보국장에게도 비밀에 부친 모양이다.

“베로나 제국으로 몰래 들어가고 싶어 한다는 건 이미 클로에가 말해줘서 알고 있어.”

클로에가 알버트의 말을 듣고 살짝 시선을 돌렸다.

“가는 이유에 대해서는…… 슬프게도 자신의 상사인데도 불구하고 전혀 말해주지 않더군.”

“죄송합니다.”

클로에의 말에 알버트가 픽 웃고는 대답했다.

“국왕 폐하는 물론이고, 세자 저하께서도 비밀에 부친 내용이다. 자네가 나에게 말해주지 않는 게 실례일 수는 없지.”

알버트가 이야기를 이어갈수록 클로에가 약간씩 움츠러드는 게 보인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로 미안하긴 한 모양이지. 나는 그런 두 사람을 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진행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클로에에게서 시선을 떼고 나를 향해 웃으며 서류를 내밀었다.

“신상정보입니까?”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베로나 제국에 은밀하게 진입하는 일은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지. 준비는 아무리 많이 해도 모자라지 않아.”

가짜로 위조한 신분에 대한 정보가 담겨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고, 가족관계는 어떻게 되고, 직업과 고향 같은 것들. 나는 그것들을 훑어보면서 대답했다.

“테네스 공국의 소규모 보석 상인이라.”

위조 신분에 적힌 사람들은 테네스 공국 출신으로 되어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양국 간의 전쟁이 이제야 막 끝난 참 아닌가? 위조 신분이 파이크 왕국으로 되어있으면 여러가지로 마찰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

맞는 말이다. 전쟁이 막 끝났는데 파이크 왕국 출신의 위조 신분을 가지고 있으면 검문을 받아도 더 세밀한 조사가 진행될 테고, 그러면 들킬 가능성도 그만큼 늘어나니까.

“나는 네 누나로 되어있네?”

엘렌이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누나라기에는 사실 내가 더 정신적으로 성숙하지만.”

내 말을 들은 엘렌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뜻이야 그건 또.”

“……저는 마틴 님의 아내로 되어있군요.”

클로에의 중얼거림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 되나?”

클로에가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다만, 보석상이라고 하는 직업은 나름대로의 전문지식이 있어야 하는데……”

올리비에의 말에 나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 정도의 지식은 있어.”

내 말을 들은 엘렌과 클로에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뭘 그런 표정을 지으실까. 나는 알버트에게 인사를 건넸다.

“적당한 신분인 것 같습니다.”

너무 평범한 신분이라면 굳이 자신이 살던 고향을 떠나 베로나 제국으로 향할 이유가 없고, 너무 높은 신분이라면 베로나 제국에서 수상하게 여길 수 있다.

보석상이라고 하면 돈은 충분히 많지만 신분은 그렇게 높지 않다. 게다가, 굳이 테네스 공국을 떠나 베로나 제국으로 향하는 이유도 설명이 되겠지.

“상인은 다른 사람들과 자주 교류하는 직업입니다. 게다가 상인과 상인 사이의 교류가 대부분일 테니, 거래 기록도 남아있어야 정상이죠.”

위조 신분을 제대로 만들고 싶다면 그러한 기록들도 남겨두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보처에서 테네스 공국을 조금만 조사해 본다면 신분이 가짜라는 건 어렵지 않게 탄로 날 것이다.

“자네는 테네스 공국의 엔리코라는 상인과 꽤나 긴밀한 관계지. 첩보국에서는 그쪽의 협조를 구해서 위조 신분을 만들 생각이야.”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렇군요.”

엔리코가 첩보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나와 거래했다는 기록을 위조해준다면 제국의 눈도 어느 정도 속여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알겠습니다. 위조 신분이 완성되면 바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내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를 바라봤다.

“신분이 완성되는 동안, 왕도에서 일어나는 큰 파티 중 하나에 참석하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에 머무르고 있다는 증거를 남겨야 하니까요. 알겠습니다.”

“그뿐이 아니야.”

나는 그 말에 알버트를 바라봤다.

“자네가 참석하게 되는 모임에, 세자 저하도 참석하실 걸세. 그리고 그 자리에서 자네를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로 임명한다는 것을 밝힐 거야.”

“비공식석상이지 않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대답했다.

“세자 저하의 발언이네. 그 누구도 세자 저하의 발언을 무시할 수는 없어. 그리고, 자네에게는 시간이 없지 않나.”

나는 세자가 알버트에게 듣는 편이 좋을 거라고 말해주었던 계획을 마침내 들을 수 있었다.

순서는 다음과 같다.

큰 규모의 파티에 참석한다 → 세자도 참석한다 → 해당 파티에서 세자가 나를 영주로 임명한다는 사실을 밝힌다 → 그 이후, 위장 신분이 준비된다

위장 신분이 준비되는 즉시 세자가 나에게 쿠르스트 산맥의 지질조사 및 토지 측량을 명한다 → 나는 그 길로 베로나 제국으로 떠난다.

정식 임명식에는 황명을 받들어 쿠르스트 산맥으로 먼저 떠난 내 사정을 고려해, 어머니가 대신 참석해 국왕 폐하로부터 대리 영주의 자격을 허락받는다.

“좋네요, 지금 상황에서 부작용 없이 가장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방법 같습니다.”

본래라면 정식 임명식을 마친 다음 로델린에게 대리 영주의 자격을 내가 넘겨주어야 하지만. 이렇게 하면 내가 임명식이 열릴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다.

“레드우드 가문에서 제 어머니가 영주 대리가 되는 것에 대해 불만을 표시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있는데 어째서 레드우드 부인이 대리 영주로 임명되냐는 식으로. 내 말에 알버트가 하하하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걱정하지 말게. 자네와 레드우드 가문의 관계는 아주 잘 파악하고 있어. 설마하니 불만을 표시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고 해도 적당히 무마시키겠네.”

대화를 마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왕궁으로 돌아갔다.

“어머니를 보러 가실 건가요?”

“그래야지. 두 사람은 숙소에서 쉬고 있어.”

마차는 왕궁을 통과해 내궁까지 그대로 쭉 들어갔다.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그 길로 헤어졌다.

“마틴 레드우드가 왔다고 전해줘.”

복도를 청소하고 있던 하녀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마틴 레드우드 님이라면…….”

그렇게 중얼거린 하녀가 황급하게 말을 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바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하녀는 꾸벅 인사하고 빠른 걸음으로 문으로 다가가 노크했다.

“레드우드 부인, 마틴 레드우드 님이 만나 뵙기를 청합니다.”

말이 끝나자마자 문 너머에서 로델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들게 해주련?”

문이 열리고, 나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 어머니 로델린은 테이블 근처에 앉아서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내 아들.”

“어머니. 오랜만에 뵙습니다. 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으셨나요?”

내 말에 로델린이 대답했다.

“아들이 전쟁터에 있는데 어찌 불편하지 않게 생활했겠니.”

나는 그 말에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나는 베로나 제국으로 가게 된다. 거기에 더해서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또다시 편히 쉬기는 글렀겠지. 역시 비밀로 해두기로 정하길 잘했네.

“방이 많이 좋아졌네요.”

“훌륭한 아들을 둔 덕분에 자격도 없는 어미가 호강하는구나.”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흘렸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로델린이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책상으로 향했다. 서랍을 잠깐 뒤적거리던 로델린이 뭔가를 한가득 꺼내서 내 앞으로 가져왔다.

“이건…….”

“편지란다. 요 며칠 사이에 이렇게나 많이 왔어. 너를 보고 싶다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던지.”

그렇게 말을 던진 로델린이 손을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마틴, 강요하는 건 아니란다. 하지만, 너도 이제 결혼에 대한 생각을 진지하게 해봐야 하지 않겠니?”

“……따로 마음에 두고 있는 사람이라도 있으신가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저었다.

“네가 곁에 두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 관계잖니. 내 의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아직 생각이 없다고 하면 그 또한 괜찮단다.”

나는 그 말에 한번 떠보자는 식으로 대답했다.

“제가 평민이 좋다 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내 말에 로델린이 선선히 대답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그리해라.”

나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런 말이 돌아올 줄은 몰랐다.

“레드우드 가문의 평판이라는 것도 있을 텐데요.”

내 말에 로델린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천한 신분과 결혼했다는 식의 추문이야 돌겠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더냐.”

말을 마친 로델린이 내 손을 꽉 잡고 말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어떤 신분이어도 상관없다. 상대의 가문 같은 건 고려 할 필요 없어. 이 사람과 결혼해서 얻게 되는 이득 같은 것도 생각하지 마라. 아무것도 필요 없어.”

이야기하는 로델린의 표정은 다소 어두웠다.

“그냥, 네가 마음에 든다면 그걸로 족하다. 나를 보렴.”

나는 그 말에 약간 장난기가 돌아 질문을 던졌다.

“제가 남자를 좋아한다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는 괜찮다. 하지만 후사는 걱정되니, 첩이라도 들이는 게 어떻겠니?”

나는 그 말에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 내 눈치를 보던 로델린이 작게 중얼거렸다.

“하지만, 동물은 안 된다? 그건 이 어미도 감당할 자신이 없어.”

잠깐만, 지금 내 엄마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황당한 표정을 짓고 로델린을 바라봤다.

“저는 사람 여자가 좋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내 말에 로델린이 밝은 웃음을 흘렸다.

“가만히 보니 네가 이 어미를 놀리는 기색이길래, 나도 너를 한 번 놀려주었다.”

잠깐 웃고 있던 로델린이 슬쩍 쌓여 있는 편지 쪽으로 눈길을 주었다. 나는 그 편지들을 살펴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알버트는 내가 모임 같은 곳에 얼굴을 드러내는 편이 좋다고 했다.

“가게 된다면, 여기가 좋을 것 같습니다.”

편지를 살피던 나는 초대장 하나를 골라 로델린에게 건네주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