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87화 (187/275)

187화

파티에 초대받은 손님이 안내를 받고 나면 곧바로 나오는 음료는 환영의 뜻을 담고 있다. 일종의 웰컴드링크 같은 거지. 그런데 웰컴드링크로 나온 게 식초라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엿이나 먹어라 뭐 그런 뜻이지. 별로 기분 좋은 손님 대접은 아니다.

“어떻게, 하녀를 불러올까?”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저 애가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귀족 영애가 눈을 부라리며 명령하니 어쩔 수 없이 한 걸 텐데.”

“나에게 먹일 생각이라고 했으면 하녀도 절대 못 하겠다고 하지 않았을까?”

클로에는 괜찮다고 생각했으니 하녀도 이런 일을 벌인 거다.

“그 점은 반박할 수 없네요.”

어쨌든, 식초로 변한 와인을 받은 당사자가 하녀를 조질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내가 나서서 지랄하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식초 사태의 용의자로 몇 명을 추려낼 수 있는데.”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벌써 찾아내시다니, 어떻게?”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찾아낸 건 아니지.”

용의자일 뿐이다. 클로에가 받아든 식초를 입으로 가져갈 때, 시선이 이쪽에 한동안 고정되어있던 사람이 몇 명 있다.

“남자는 제외해도 괜찮지 않아요?”

나는 그 말에 클로에를 바라봤다.

“왜?”

“그야…… 남자가 저에게 이걸 주었다는 뜻은.”

클로에는 거기까지만 말하고 살짝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지금이 연기 중이라는 것도 까먹고 한숨을 팍 내쉴 뻔했다.

“남자의 누이나 여동생이 나에게 관심을 보일 수도 있잖아.”

내 말에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생각해보니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니면 동성애자일 수도 있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클로에의 가면이 약간 굳는 느낌이 들었다.

“설마.”

“뭐 어때. 남자가 남자 좋아할 수도 있지.”

상호 동의하에 이루어지는 사랑이라면, 취향 같은 건 존중하지 못할 것도 없잖아. 클로에가 내 말을 듣고는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어쨌든, 이것부터 처리할까요.”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잔에 담긴 식초를 쭉 들이켰다. 어이구, 그 신걸 잘도 먹네. 잠깐 클로에를 보던 나는 근처 테이블에 놓여있는 작은 케이크 조각을 가져왔다. 어지간히 입이 작은 사람이라도 한입에 넣을 수 있을 거다.

“자.”

클로에가 내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케이크 조각을 보고 입을 벌렸다. 입 안에 케이크 조각을 넣어주자, 근처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마틴 레드우드!”

걸걸한 외침을 들은 나는 입맛을 다시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리스 핀들턴의 목소리다. 나와 클로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얼굴을 보니 쌩쌩하군그래.”

모리스는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나와 클로에는 그런 모리스를 향해 허리를 굽혔다.

“벌써 오신 줄 알았으면 도착하자마자 찾아뵈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두 명 모두 허리 펴.”

허리를 펴자 곧바로 핀들턴의 얼굴이 보인다. 머리는 하얀 백발이지만, 눈에서 반짝이는 생기는 어지간한 젊은 사람들 이상으로 선명하다. 정정하기도 하지.

“그 사이 또 실력이 부쩍 늘어난 모양이군. 젊은 게 좋긴 좋아, 그렇지 않나?”

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핀들턴 경에게 미치려면 한참 부족합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약간 주며 말했다.

“정말 그런지 한번 확인해보는 게 어떤가. 아직 파티까지는 시간이 꽤나 남아있으니.”

“제가 일부러 일찍 도착한 이유가 뭐겠습니까?”

내 말에 모리스가 크하하하하!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를 손으로 몇 번 두들겼다.

“좋은 마음가짐이야!”

나와 모리스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귀신처럼 클로에의 곁에 몇 명의 귀족 영애들이 다가왔다. 모리스와 이야기하면서 나는 그 사람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있었다.

“어머, 그게 정말인가요?”

한 귀족 영애가 클로에를 보고 감탄한다. 그 사이, 클로에는 침을 삼키면서 다소 부담된다는 표정으로 내 쪽을 흘긋흘긋 본다. 그런 클로에를 보던 귀족 아가씨 중 한 명이 모리스를 보며 말했다.

“핀들턴 왕궁 기사단장님, 클로에 로니세라 경의 기사서임을 직접 하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그 말에 모리스가 음,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만.”

“굉장해요. 로니세라 경의 실력이 어떨지 기대돼요. 마틴 레드우드 님이 직접 곁에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모리스 핀들턴 기사단장님이 직접 기사서임을 하다니.”

어쩐지, 이 이야기의 흐름이 어디로 흘러가게 될 줄 알 것 같다.

“클로에 로니세라 경이 괜찮다면, 그 실력을 견식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요?”

화장하고, 드레스를 입은 여자에게 검을 들고 싸우라는 건가. 대련은 운동이다. 그것도 굉장히 격렬한 축에 드는 운동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땀이 나게 된다.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는 자기가 잘 처리할 수 있다고 했으니까. 정 도움이 필요하다면 나를 부르겠지.

“클로에 로니세라 경이 괜찮으시다면, 제가 대련해도 괜찮을까요.”

그 와중에 또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기사로 보이는 녀석 하나가 클로에에게 그런 말을 건넸다. 왕궁 기사단 소속으로 보이는데.

“아서라 이것아. 너로는 택도 없는 실력자야.”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모리스도 그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장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도 어디 가서 부끄러운 실력은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클로에에게 대련을 요청한 기사가 당황한 표정으로 모리스 핀들턴을 바라봤다.

“염병.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게냐?”

그 말에 클로에를 둘러싸고 즐겁다는 듯이 이야기를 나누던 귀족가의 아가씨들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럼 어느 정도는 되어야 상대가…….”

그들 중 하나의 중얼거림에 모리스가 대답했다.

“부단장 녀석 정도면 괜찮은 승부를 가릴 수 있겠지만, 그 녀석은 지금 나 대신 왕궁을 수호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지.”

모리스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너희들의 노림수를 내 모르는 바가 아니다만…….”

“그렇다면.”

모리스의 말을 자르고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말을 들은 모리스가 일단 하려던 말을 멈췄다.

“감히, 왕궁 기사단장님께서 마틴 레드우드와 대련하기 전에 잠깐 저에게도 시간을 나눠 주실 수 있겠습니까?”

클로에의 말에 이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나를 제외한 모두가 놀랐다. 그건 모리스 핀들턴도 예외는 아니었다.

“허.”

모리스는 그런 소리를 내고는 나를 슬쩍 보며 웃었다.

“네놈과 저 아이가 보통 사이가 아니라는 소문은 나도 들었다. 그 말이 진짜라면, 네가 여복 하나는 제대로 터졌구나.”

모리스는 턱을 쓰다듬으며 클로에를 향해 말을 걸었다. 방금 전에도 그렇게까지 거친 말투는 아니었지만, 지금은 꽤나 부드러운 어조다.

“클로에 로니세라. 그리 꾸미고 왔으면서 나와 대련이라니. 괜찮겠느냐? 나는 대련에서 화장과 드레스를 배려하는 법을 모른다.”

모리스의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왕궁과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으니 제가 평상시 쓰던 장비를 가지고 오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모리스 핀들턴 경과의 대련할 기회가 있다면 모친상도 뒤로 미루고 달려오겠다는 자들도 있는 판국에, 화장이나 드레스 따위가 대수일까요.”

클로에의 말을 들은 모리스 핀들턴이 폭포수처럼 웃음을 쏟아낸 다음, 말을 이었다.

“네가 그리 나를 띄워주기까지 하니, 거절할 수가 없구나. 너는 필요한 준비를 하도록.”

말을 마친 핀들턴이 내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너는 조금 기다리거라.”

“괜찮으시겠습니까? 연달아 두 명과 대련이라니.”

내 말에 모리스가 쯔쯔쯔, 하고 혀를 찼다.

“이놈이 나를 아주 늙은이 취급하는구나. 어디, 조금 뒤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나 한번 보자.”

협박인지 뭔지 모를 말을 남긴 다음, 모리스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해머를 가져와라!”

모리스가 준비를 하는 사이, 클로에는 덥힌 물과 수건으로 화장을 지운 다음, 내 옆에 앉아서 자신의 장비가 도착하기를 기다린다.

“잘 풀었네.”

“이러는 편이 빨리 끝날 것 같았거든요.”

엘렌이 만들어준 부츠를 사용한다면, 클로에는 모리스를 상대로 훌륭한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을 거다. 모리스가 클로에를 인정하면, 다른 녀석들도 클로에에게 함부로 할 수 없게 된다. 자연스럽게 나와 클로에의 관계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의 숫자가 확 줄겠지. 그걸로 우리는 이 서로 사랑해 마지않는 연기를 해가며 노렸던 목표를 성취하게 된다.

기다리고 있는 사이 클로에의 장비들이 도착했다.

“몸 풀고 계세요.”

드레스를 벗고 빠르게 장비를 갖춰 입은 클로에가 무도회장으로 쓰이는 연무장 위에 섰다. 그 맞은편에는 이전에도 봤던 흉악한 워해머를 들고 있는 모리스가 보인다.

“준비는 끝났느냐.”

“네, 가르침을 받을 준비는 끝났어요.”

클로에의 말을 들은 모리스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네가 스스로 뭔가를 배워가는 거다. 고마워할 건 없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그가 들고 있던 워해머가 바닥을 한 번 내려친다.

“멀뚱멀뚱 보고 있으면 적이 쓰러지더냐! 덤벼라!”

그 말과 함께 클로에의 신발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린 다음, 모리스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보통 사람들은 눈으로 채 따라갈 수도 없는 속도로 움직이며 틈을 노리는 클로에와, 태산처럼 서서 그 공격을 막아내는 모리스.

클로에가 계속해서 능력을 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여자가 어떻게 저런 실력을.”

옆에서 그런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려보니, 원래 클로에와 대련하고 싶다고 했던 녀석이 눈을 크게 뜨고 대련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클로에의 실력에 놀란 모양이지.

“대련을 신청할 만한 기량은 있군!”

말을 마친 모리스가 한 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크게 해머를 휘둘렀다. 망치의 머리는 모리스를 향해 달려드는 클로에의 머리를 정확히 노리고 있었다. 질주하던 클로에는 머리로 다가오는 망치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찍던 모리스의 망치가 충격파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그렇군.”

모리스의 망치 뒤에서 폭발하는 것 같은 질풍이 쏟아지고, 밀려났던 모리스의 망치가 다시 한번 클로에의 머리를 노린다.

“이런……!”

클로에는 그런 소리와 함께 내지르던 레이피어를 거두고, 뒤로 빠졌다. 망치가 연무장의 바닥을 후려치며 굉음을 내고, 클로에는 뒤로 쭉 물러나서 잠깐 숨을 고르며 흘러내리는 땀을 훔쳤다. 모리스는 약간 호흡이 거칠어져 있기는 했지만, 땀이 날 정도는 아니다.

그런 클로에를 보던 모리스가 워해머를 다시 바로잡았다. 곧바로 망치의 머리 부분에서 말벌이 날아다니는 것 같은 거친 바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더 시도해 볼 것이 없다면, 내가 갈 차례겠지.”

“……최대한 버텨보겠습니다.”

클로에는 억지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눈을 빛냈다. 모리스가 그걸 보고 낮게 웃음을 흘리더니 그녀를 향해 달려들었다.

모리스가 공세를 취하고 나서, 클로에는 약 20분 정도를 버티는 데 성공했다.

“카학…… 흐억…….”

그런 소리를 내던 클로에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잠깐 헛구역질을 했다.

“그 정도면 오래 버틴 편이다. 왕궁 기사단 중에 너를 확실히 이길 수 있는 자는 나 말고는 없겠구나.”

모리스의 말에 클로에가 약간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자신의 머리통을 겨눈 워해머를 바라보다가, 모리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인사는 되었다. 고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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