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88화 (188/275)

188화

클로에와 모리스의 대련이 끝나자마자, 마틴 레드우드는 곧장 클로에에게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네…… 조금 어지럽긴 하지만. 쉬면 곧 회복할 수 있을 거예요.”

걱정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은 마틴의 말을 듣고 있던 다른 귀족 아가씨들은, 서서히 저 두 사람 사이에 비집고 들어갈 자리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자기도 모르게 하기 시작했다.

마틴은 클로에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을 차가운 수건으로 닦아주고, 냉수를 직접 먹여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클로에를 위로한다.

“마시면서 쉬고 있어. 나도 쥐어 터지고 올게.”

클로에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마틴이라면 쥐어 터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고생하세요. 응원하고 있을게요.”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귀족들은 여자들은 질투심과 부러움에 부채나 드레스의 밑단을 꽉 움켜쥐고, 조금 나이가 있는 귀부인과 귀족들은 지금 상황을 분석하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기 시작한다.

“다 했냐? 거 늙은 놈이 보기에도 상당히 닭살이 돋는 광경이었어.”

“대련한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아무래도 걱정이 되지 뭡니까.”

마틴의 말에 모리스가 하! 하는 소리를 내고는 망치를 들어 올려 그를 겨눈다.

“조금 뒤에는 저 아이가 너를 걱정하게 되겠구나.”

마틴이 그 말에 검을 뽑아 들고 자세를 취하며 간단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쉽지는 않으실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귀족들은, 그 뒤에 일어난 광경에 자신들도 모르게 감탄사를 냈다. 서 있던 마틴이 어느 순간 모리스의 코앞에 자리잡았다. 곧이어 들리는 투쿵, 하는 굉음과 함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사방으로 터져나가는 공기에 연무장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의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거칠게 휘날린다.

“무슨, 공성추로 성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그가 휘두른 검이 모리스의 워해머와 부딪쳐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길항한다.

“이 정도면, 배려는 필요 없겠구나.”

“그래도 좀 해주시면 어떨까요. 클로에 앞에서 체면 좀 세워주신다고 생각하고.”

마틴의 말에 모리스가 웃음을 터뜨리며 워해머를 연신 휘두른다. 마틴은 그 공격을 재빠르게 막아내거나 피하기 시작한다. 연신 작렬하는 둔중한 굉음과 거기에 맞춰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이제 일반인들은 제대로 따라가기도 힘들 지경이다.

“저게 마틴 님의 능력인가.”

기사단장의 몸 근처에 반복해서 나타나는 마틴의 분신과, 그걸 폭풍을 두른 워해머로 지우는 모리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대련이 아니라 목숨을 건 전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두 사람의 대련은 격렬했다.

“허억…… 흐억…….”

마틴이 숨을 거칠게 몰아쉰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모리스의 호흡도 클로에 때와는 다르게 거칠었다. 두 사람 모두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모리스는 자신의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훔쳐내고는 히죽 웃었다.

“대련하면서 땀을 흘리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기뻐하시니 다행입니다. 저는 죽을 맛입니다.”

마틴의 말에 모리스가 히죽 웃으며 워해머를 허공에 휘둘렀다. 워해머의 움직임에 따라 바람이 휘감기며 그의 몸을 감싼다.

“파티 시작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너는 다음 공격에 네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것을 나에게 보여라. 나 또한 최선을 다하지.”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마틴과 모리스가 심호흡을 하기 시작한다. 그 광경을 바라보던 귀족들도 동시에 눈을 크게 뜨고 침을 삼켰다. 마틴 레드우드가 그 위명이 높다고 하지만, 왕궁의 기사단장이 이렇게까지 전력을 다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검에 대해서 잘 모르더라도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느낄 수 있었다.

왕궁 기사단장 모리스 핀들턴이 눈앞에 서 있는 열여덟 먹은 소년을 자신과 대등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명이 동시에 움직였다. 모리스가 망치를 들어 올리자, 연무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제대로 볼 수도 없을 정도로 거친 폭풍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힘은 철저히 통제되어 있었기에 연무장 밖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있다.

“아무것도 안 보이잖아.”

귀족 중 하나가 한탄하듯이 그런 소리를 냈다. 몰아치는 울려 퍼지는 쇠와 쇠의 격돌음이, 연무장을 뒤덮고 날뛰는 폭풍의 울부짖음을 뚫고 사람들의 귀에 선명하게 때려 박힌다.

얼마 뒤, 몰아치던 폭풍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믿을 수 없어. 저게 정말이야?!”

폭풍이 가라앉은 다음, 귀족들의 눈앞에 보이는 장면은 두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초현실적이었다. 마틴 레드우드가 검 끝으로 모리스 핀들턴의 목줄기를 겨누고 있었다.

왕궁 기사단장 모리스 핀들턴이, 마틴 레드우드에게 패배했다.

“역시, 클로에 로니세라 경과의 대련 때문에 힘을 쓰셔서 이렇게 된 거 아닙니까.”

마틴 레드우드의 표정은 별로 밝지 않았다. 클로에 로니세라와의 대련에서 모리스 핀들턴이 제법 힘을 쓰지 않았다면, 이기는 건 그가 아니라 모리스였을 것이다.

모리스 핀들턴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지랄, 그냥 몸이 늙은 거다 이것아. 예전이라면 한 번에 네 녀석과 저 아이가 달려들어도 상대할 수 있었어.”

마틴은 모리스를 겨누던 검을 거둬들이고, 모리스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대련, 감사합니다.”

그런 마틴을 보고 있던 모리스 핀들턴이 마찬가지로 허리를 숙여 마틴에게 인사했다.

“오히려 내가 고맙다. 패배를 인정한다.”

그리고, 모리스는 시선을 돌려 클로에가 앉아있는 곳을 바라봤다. 이미 드레스로 다시 갈아입은 클로에는 얼굴에 화장은 전부 지웠지만, 여전히 싱싱하게 아름다웠다. 그런 클로에를 보고 있던 모리스가 웃으며 다시 마틴을 바라봤다.

“나란히 기사단장이 되면 그것 또한 아름다운 일이겠구나. 두 사람이 더 깊은 관계로 발전해 서로의 평생을 맡길 각오를 하게 될 때, 따로 정해둔 사람이 없다면 내가 주례를 서게 해 다오.”

“과분할 정도의 영광입니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모리스 핀들턴의 입에서 나온 말을 마틴 레드우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수많은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모리스의 말에 수긍했다는 뜻은 사실상 공언과 다름없고, 마틴 레드우드에게 다가가려고 했던 뭇 귀족 아가씨들에게는 사형선고와 같았다.

“과분한 영광이라. 이것도 그렇게 받아들일 거냐.”

모리스는 그런 소리를 하며 자신의 워해머에 달려있던 장식을 떼서 마틴에게 내밀었다.

“기사단장님께서…… 저걸?”

귀족 아가씨들은 마틴 레드우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충격을 먹었지만, 이 자리에 참석한 기사들은 모리스의 이어진 행동에 충격을 먹었다. 모리스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편안한 표정으로 마틴에게 말을 걸었다.

“이 나이가 되면 슬슬 은퇴를 생각하기 마련이지. 은퇴하는 자에게는 은퇴 이후의 삶 또한 걱정되는 법이지만, 그것만큼이나 빈자리를 채워줄 사람이 마땅찮음에 고민하는 법이다. 이제 나는 내 뒤를 이어 왕궁 기사단장의 의무를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는 자가 나타났으니. 기꺼이 이 장식을 넘긴다. 너 또한, 훗날 은퇴가 다가오거든 나와 같이 행하거라.”

마틴 레드우드가 눈앞에 내밀어진 장식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알아채고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모리스 핀들턴 기사단장님, 죄송하지만 이건 제가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이 왕국에 너 말고 이 장식을 받기에 더 적합한 자는 없다. 너는 부디 거절하지 말아라.”

마틴 레드우드가 아직도 장식을 받기를 머뭇거리고 있는데,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리스 핀들턴 왕국 기사단장. 그 장식은 다른 자를 위해 남겨두는 편이 좋을 것 같군.”

그 목소리를 들은 모리스가 곧바로 자세를 바로잡았다.

“세자 저하.”

세자의 목소리였다. 모리스는 크게 당황하며 주변의 하인과 하녀를 보고 외쳤다.

“뭘 하고 있었길래 세자 저하께서 오셨는데도 너희들은 말이 없었단 말이냐!”

“두 사람이 대련 중이라는 소식을 전해 듣고 내가 입을 다물라 한 것이니, 기사단장은 아랫사람들에게 뭐라 하지 마시게.”

그 말에 모리스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몸을 돌려 세자 저하에게 경례를 올렸다.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오늘 이 자리를 빛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군.”

세자는 웃으며 그 인사를 받고 나서 입을 열었다.

“아까 하던 말을 마저 하자면, 마틴 레드우드는 그 장식을 받을 수 없다네.”

“……폐하께서 마틴 레드우드에게 맡길 다른 중책이 있는 겁니까?”

모리스의 말에 세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파티 자리가 더 무르익고 나서야 말하려고 했건만, 지금이 가장 적절할 것 같군.”

말을 마친 세자가 모리스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마틴을 향해 말했다.

“마틴 레드우드, 고개를 들어라.”

* * *

세자의 말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세자가 이 자리에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세자는 내가 예상하고 있던 말을 꽤나 큰 목청으로 말했다.

“왕국을 위해 마틴 레드우드가 세운 공로는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왕국을 향한 그대의 충심이 여기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폐하께서는 알고 계신다. 따라서, 너에게 새로운 중책을 맡기려 하니. 너는 이를 거부하지 말고, 왕국의 명예를 드높인 그 아름다운 충심을 다시 한번 발휘하거라.”

“폐하께서 부족한 점이 많은 저를 이토록 좋게 봐주시니 그 은혜는 다 말하기가 힘듭니다. 내려주신 말씀을 삼가 받듭니다.”

내가 대답을 돌려주자, 세자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입을 열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는 대대로 영주가 없이 국경 수비대의 보호 아래에 그 불안한 생활을 영위해야 했다. 해당 지역의 위협이 지금에서야 안정되었으니, 그들을 이끌어 왕국에 봉사해야 할 터. 이에, 폐하께서는 너에게 이전까지 국경 수비대가 지키던 쿠르스트 산맥과, 록밸리 마을을 비롯한 주변의 아홉 마을을 믿고 맡기려 한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 그 말뜻을 이해한 나이 있는 귀족들과 귀부인들은 서로 수군거리기 시작한다. 녀석들의 계산이 점점 더 빨라지는 소리가 들릴 지경이다.

“마틴 레드우드를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로 봉할 것이다. 정식 임명식은 이후 따로 좋은 날을 골라 성대히 치르리.”

이제 세자가 해야 할 말은 다 끝났다. 다음은 내가 입을 열어야 한다.

“세자 저하, 쿠르스트 산맥 일대는 산세가 험준하고 위험이 많이 지금까지 제대로 측량과 토지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걸로 압니다.”

“폐하와 나 또한 그는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너는 그것을 핑계 들어 거절하려는 것이냐.”

나는 그 말에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가문 대대로 이어질 영광이자,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역할을 어찌 거절하겠습니까. 토지의 측량과 지질조사는 현재 쿠르스트 산맥에서 가장 우선해서 시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말에 세자가 관심을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너는 계속 말해보라.”

“폐하께서 저를 정말로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로 봉하실 생각이라면, 저는 한시라도 빨리 유능한 사람을 모아 쿠르스트 산맥의 측량과 지질조사를 행하려 합니다.”

세자가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측량과 지질조사는 제법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일이다. 네가 봉해질 영지는 작지 않은 규모거늘. 이를 하루아침에 끝낼 수는 없어.”

“그렇습니다. 또한,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조사인 만큼, 영주로 봉해진 제가 직접 사람들을 진두지휘해야 할 것입니다.”

세자가 그 말에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여튼 이 친구도 연기파 배우라니까.

“그럼, 그 시일 동안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 자리를 비워둬야 한다는 말이냐?”

“제 어머니 로델린 레드우드 부인이 제가 지질조사와 측량을 하는 동안 제 임무를 대리로서 수행할 수 있도록 해주셨으면 합니다.”

무수한 사람들의 시선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게 보인다. 로델린을 찾고 있는 거겠지. 슬프게도 그녀는 오늘 이 자리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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