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안이 최선인 것 같구나. 레드우드 부인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리는 없지.”
나와 세자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지만, 대외적으로는 세자는 이 사실을 비밀로 하고 있다가 오늘에서야 나에게 알린 것이다. 로델린이 알고 있다면 사람들이 수상하게 생각할 게 뻔하니,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을 보내 네 의사를 레드우드 부인에게 전달토록 하겠다.”
로델린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세자는 잠깐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의 영주 임명식은 천상 너 대신 레드우드 부인이 대신 참석해야 할 것 같구나.”
“시일이 급한 일이기 때문에, 그러는 편이 좋으리라 사료됩니다.”
“알았다.”
말을 마친 세자가 모리스 핀들턴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모리스 핀들턴 경은 다른 좋은 인재가 나오기 전까지는 계속 왕궁 기사단장 직을 역임해야 할 것 같소.”
“제가 마틴 레드우드를 후임으로 내정하려 하던 것 또한 파이크 왕국을 위함이었으니. 폐하께서 마틴 레드우드를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다면 저는 그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걸로 끝났다. 내가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가 되는 것은 확정되었고, 방금 전부터 부지런히 시선을 주고 받던 귀족들의 머릿속은 정말로 복잡할 것이다. 개중에는 파티에 데리고 온 자신의 딸을 불러서 뭔가를 이야기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기사단장만 해도 결혼을 통해 엮었다가는 다른 귀족들의 견제가 보통이 아닐 텐데,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라면 더 심하다. 이용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이용당할 가능성이 훨씬 크다.
심지어, 쿠르스트 산맥의 영주라면 왕도에 있는 귀족들에게 바로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도 아니다. 먹다가 탈 날 것 같으니, 그냥 별다른 백도 없고 가문의 명성이라고 할 것도 없는 클로에와 내가 서로 이어지는 편이 이득이라는 계산이 섰겠지.
“마틴 레드우드, 그리고 클로에 로니세라 경.”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속닥거리던 귀족 중 하나가 다가왔다. 대충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성이다. 그가 자기소개하고, 나 또한 그에게 인사를 했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 정말 잘 어울리는군. 로니세라 경은 오히려 화장을 했을 때보다 더 빛나는 것 같아.”
밀어주자. 그렇게 주판을 세운 모양이다. 나도 이러한 분위기를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괜스레 쓸데없는 트집을 잡거나 하지 않고 그들과 웃으면서 어울려주었다.
“두 사람은 서로 함께 험난한 전장을 극복한 사이잖아요? 분명히 서로에 대한 정이 각별하겠죠.”
한배를 타는 건 부담스럽지만, 그렇다고 나쁜 관계를 만들고 싶지도 않다. 그러니 별수 있나. 우리의 앞길을 축복해 줄 수밖에. 혹시나, 진짜로 결혼을 한다면 쏟아져 들어오는 어마어마한 양의 선물은 확정이나 다름없겠는걸?
물론, 그런 이야기를 자리에 앉아서 듣고 있어야 하는 나와 클로에는 여러 가지 의미로 죽을 맛이긴 했다.
“로니세라 경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그런 감정이 있었던 건가?”
이런 질문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유명한 연애인의 열애설에 달라붙는 기자들 같군. 어떻게든 열심히 처리하고 있으려니 연무장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악사들이 어떤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뭔가, 입장곡 같은 느낌인데.
“아, 파티가 시작되는 모양이군.”
그 음악의 시작과 함께 나와 클로에 주변에 자리 잡고 계속 말을 걸던 귀족들이 우리에게 인사를 하고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연무장 중앙에는 다시 옷을 갈아입은 모리스 핀들턴이 이 자리에 와준 사람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럼, 부족한 점이 많은 자리지만 정성을 봐서 즐겨주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모리스 핀들턴이 연무장 위에서 내려왔다. 본격적인 파티의 시작이다.
“춤은 출 줄 아시나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클로에가 저런, 하는 소리를 내고 술잔의 액체를 한 모금 마셨다.
“아쉽네요.”
“왜, 춤을 좋아하나 보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를 보여주기에는 최고잖아요. 그게 아쉽다는 거죠.”
“이 정도면 충분해.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손수건을 꺼내 클로에의 입가에 묻은 포도주를 훔쳐주었다. 그 와중에, 옆에서 인기척이 느껴져서 고개를 돌려보니 은쟁반 위에 스콘과 음료를 챙겨 든 하인이 서 있었다.
“먹을거리는 괜찮은데.”
내 말에 옆에 앉아있던 클로에가 작게 중얼거렸다.
“첩보국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아, 하는 소리를 냈고, 하인은 웃으며 접시를 내려놓았다.
“안부를 전하셨습니다.”
하인은 그렇게 말하며 냅킨을 테이블 위에 올려주었다. 냅킨에는 지팡이 하나가 인쇄되어 있었다.
“제가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만, 두 분 정말로 잘 어울리시는군요.”
“그런가?”
내 말에 하인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사실, 모리스 핀들턴 경의 저쪽에 보이는 길로 쭉 걸어가시면 온갖 꽃으로 장식된 작은 정원이 하나 나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한적한 데다가, 지금은 봄꽃이 한창이라 정말로 아름답죠.”
그 말에 클로에가 어머,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보며 웃었다.
“저, 봄꽃을 엄청 좋아해요. 어떤 꽃들이 있나요?”
클로에의 말에 하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 오전에 확인해보니 수선화와 영산홍이 흐드러지게 피었더군요.”
그 말을 들은 클로에가 내 옷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
“한번 가보지 않을래요?”
“그럼, 그럴까.”
나와 클로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와 클로에가 함께 파티장을 벗어나 샛길로 접어드는 것을 몇몇 귀족들이 확인한 모양이지만, 헛기침하며 자리를 피해줄 뿐이었다. 그래 뭐, 오해한 모양이지만 어쨌든 도와줘서 고맙다.
“알버트겠지?”
“맞아요.”
샛길을 넘어 정원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머리에 꽃을 하나 꽂은 채 하품을 하는 알버트가 보였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 나이에.”
알버트가 내 말에 응? 하는 소리를 내고 자기 머리에 꽂아둔 꽃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자네는 옆에 꽃을 끼고 오지 않았나. 나도 혼자 있기는 적적해서 진짜 꽃을 하나 곁에 두어봤지.”
자랑이다. 나는 다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알버트를 향해 말했다.
“준비는 끝났습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문제없어. 당장 네가 괜찮다면 내일 아침 중에도 베로나 제국으로 출발할 수 있다.”
“그거 다행이네요.”
내 말에 알버트가 크흠, 하는 소리를 내고 나를 바라봤다.
“첩보국 측에서 건네준 자료는 암기를 끝냈나?”
“위장 신분에 관한 자료들 말씀이시군요. 그거야 애저녁에 해치웠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물어보고 있어.
“제국 정보처는 까다로운 녀석들이야. 출발을 뒤로 미루는 건 어렵지 않으니,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았다면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움직이게.”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첩보국은 시간이 있을지 몰라도, 제가 없습니다. 준비가 다 끝났다면,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출발하고 싶지만, 로델린에게 영주 대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엘렌에게 로델린의 보호를 부탁해야 하니까. 내 대답을 들은 알버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겠지. 그럼 그렇게 알고 준비해두도록 하지.”
“첩보국장님, 말씀드렸던 염색은…….”
클로에의 말에 알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 중에 염색할 수 있도록 해두었네. 특별한 조치를 취해둔 물건이니, 완전히 염색하는데 15분 정도면 충분할 거야.”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파이크 왕국 안에서 움직인다면 검문에서 문제가 생길 걱정은 없겠지만, 왕국 안에도 제국 정보처의 사람들이 심겨있을 것이다. 염색뿐 아니라, 위장 신분에 맞춰 몸매를 바꾸기 위해 옷 안에 넣는 것들이나, 신발 아래에 끼워둘 깔창 같은 것들도 준비되어 있다.
“준비한 물건을 잘 활용한다면 정보처의 눈길도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을 거야.”
그러고 보니, 나는 클로에를 돌아보며 질문했다.
“테네스 공국의 엔리코에게서는 연락이 왔나?”
“마틴 님의 이름으로 쿠르스트 산맥의 지질조사와 측량에 대한 건으로 사람을 좀 빌려달라는 연락을 해두었어요.”
나와 클로에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알버트가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그 상인이 보낸 사람들은 쿠르스트 산맥 인근에 있는 항구를 통해 도착하도록 하는 게 좋겠군.”
말을 마친 알버트가 턱을 쓰다듬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혼잣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그래, 그러는 편이 좋겠어. 일정을 잘 조절하면, 우리가 쿠르스트 산맥 쪽으로 보낼 미끼와 엔리코라는 상인이 보낸 인력이 쿠르스트 산맥에 도착하는 시점이 일치할 테니까.”
미끼라고 하면, 나와 클로에가 탄 것으로 위장해서 쿠르스트 산맥으로 보낼 마차를 말하는 거겠지.
“좋군요. 어차피 저는 베로나 제국으로 떠나는 순간부터 이쪽 일정을 통제할 수 없으니, 나머지는 첩보국과 세자 저하께 부탁을 좀 드리겠습니다.”
“현재 첩보국에서 가장 우선 순위로 두고 있는 게 자네의 베로나 제국행에 관련된 건이네. 많은 인력이 투입되었으니, 떠난 이후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그 말에 질문을 하나 슬쩍 던졌다.
“제 어머니의 보호에 대한 것도 말입니까?”
“자네에게 레드우드 부인이 얼마나 중요한지 어느 정도 알고 있네. 거기에 더해, 제국의 황제가 자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자네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지.”
말을 마친 알버트가 앞섶에서 서류를 꺼내 나에게 건네주었다.
“쿠르스트 산맥에 머무르는 동안 레드우드 부인의 시중을 드는 시종들이네. 절반은 첩보국의 사람들이고, 나머지 절반은 첩보국에서 뒷조사를 철저히 마친 상태야.”
그렇다면 로델린이 최소한 밥 먹다가 조미료로 첨가된 시안화칼륨을 먹거나, 침실에서 잠들었다가 칼 맞고 수면이 영면으로 변할 가능성은 확 낮아지겠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 나와 클로에가 걸어왔던 샛길에서 남녀의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클로에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나를 보며 한마디 한다.
“점점 가까워지는 것 같죠?”
“그래.”
아무래도 알버트는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
“그럼, 파티가 끝나기 전까지 아름다운 사랑들 하고 있게나.”
축복인지 놀림인지 모를 말을 남기고 알버트는 재빠르게 사라졌다. 첩보국의 대장이라고 할 만한 민첩한 도주였다. 그 사이 샛길에서 울려 퍼지던 남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뭐야.”
클로에가 갑자기 나한테 다가와 양손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았다.
“저랑 마틴 님이 여기에서 심야 기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없을 거 아니에요.”
“아하, 머리를 좀 썼네.”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이야, 하는 소리를 냈다.
“마틴 님이 제 머리 관련해서 칭찬하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요.”
“워낙 그럴 일이 없어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침내 샛길에서 들리던 소음의 주인공들이 정원에 도착했다.
“아, 마틴 레드우드.”
젊은 남녀가 나와 클로에를 확인하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한 다음 크흠, 하는 헛기침을 하고 그들을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쉬러 온 모양이시죠?”
내 말에 귀족 남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찬가지로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객이 있는 줄 몰랐습니다. 이거 본의 아니게 실례를 해버렸군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며 손을 저었다.
“아,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 돌아갈까 생각 중이었거든요.”
말을 마친 나는 클로에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그럼 이만.”
두 사람은 우리를 막지 않았다. 그야, 이 친구들도 이 정원에 볼일이 있어서 온 걸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