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그 뒤로 이어지는 파티에서는 별로 우리가 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냥, 음식을 좀 먹고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클로에는 춤을 출 줄은 알지만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 모양이었고, 나는 춤을 전혀 출 줄 몰랐으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배워 둘 걸 그랬나.”
이거 생각보다 더 지루한데. 내 말에 클로에가 웃으면서 내 허벅지 위에 손을 올리고 대답했다.
“그럴 시간이나 있으셨어요?”
“필요하다면 만들었어야지.”
나는 허벅지 위에 올려진 클로에의 손 위에 내 손을 포개며 대답했다.
“뭐, 이제 조금만 더 버티시면 초대받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다하시는 거니까요. 조금만 더 참으세요.”
“참다니, 뭘?”
내 질문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저랑 여기에서 이렇게 연기하는 거, 힘들지 않으세요?”
“힘들게 뭐가 있어. 옆에 아름다운 여자를 앉혀놓고 음악 들으면서 술 마시는 걸 힘들어하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그러고 싶어서 돈을 내는 사람들도 있잖아?
“아부하시는 거예요?”
“내가 너한테 아부를 할 이유가 뭐가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또 그렇네요.”
다시 침묵. 잠시 뒤 연주되던 춤곡이 서서히 잦아들고, 서로를 끌어안고 춤을 추던 귀족들이 무도회장 위에서 내려온다. 저게 파티가 시작되고 나서 연주된 다섯 번째 춤곡이다. 중간중간의 휴식시간을 포함해 다섯 곡이 연주되는데 소모된 시간은 약 2시간 30분이다.
“이제, 돌아가도 폐가 되지는 않아요.”
시간을 고려해보면,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긴 하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클로에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기사단장님에게 인사를 하고 슬슬 돌아가자.”
클로에가 내밀어진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란히 선 다음 나는 클로에 쪽으로 팔을 내주었고, 클로에는 별다른 말 없이 팔짱을 끼고 나와 함께 모리스 핀들턴 앞에 섰다. 술을 마셔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모리스가 나와 클로에를 보고 확 웃음을 피워낸다.
“뭐야, 두 사람은 벌써 돌아가는 건가?”
“어르신, 아무리 그래도 술은 잔으로 드시는 편이 어떻습니까?”
모리스는 내 말에 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껄껄 웃으면서 들고 있는 와인병을 가볍게 흔들었다.
“잔이라면 여기 있지 않나. 뭐하러 귀찮게 따라 마셔?”
병나발 부는 기사단장이라. 하긴, 모리스가 유리잔에 와인을 담고 향을 음미하면서 먹는 장면은 뭔가 좀 어색한 느낌이긴 하지.
“제 어머니가 아직 세자 저하께서 지시하신 내용에 대해 전혀 모르실 겁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레드우드 부인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로 놀랄 거야.”
“파티가 즐겁지 않아서 먼저 돌아가는 건 아니니,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비하면 이런 파티가 뭐 그리 중요하겠나. 실례라 생각하지 말게.”
“그럼, 염치 불고하고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 말에 모리스가 인사 대신으로 손을 휘휘 흔들다가 나를 보고 외쳤다.
“기사단장 자리를 주지 못하게 된 건 아깝지만, 주례 제안은 아직 유효하네!”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걸로 인사를 마친 나와 클로에는 파티장에서 나와 왕궁으로 돌아갔다.
“내가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너는 벤그리프 교수에게 연락해서 추천할 만한 사람들 명단을 받아둬.”
“내궁에 도착하는 즉시 시행할게요.”
마차에 오르자마자, 나와 클로에는 곧바로 일에 대한 이야기를 진중하게 나누기 시작했다.
“회계 관련 지식이 뛰어난 사람이 필요하고…….”
“법 관련 분야는 어떤 사람이 필요할까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는 이제야 영지로 편입된 지역이니까. 영주민들에게 적용되는 법은 그 기초부터 새롭게 다져야 해.”
이 나라에는 왕국 전체에 적용되는 이 나라의 국왕이 시행하고 있는 법이 있고, 영지 안에서만 적용되는 영지의 법이 있다. 하지만, 쿠르스트 산맥에 새로 만들어지는 내 영지는 그 전까지 시행되고 있는 영지의 법이 없기 때문에 그걸 새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군법을 공부한 사람은 어떨까요?”
“군법?”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쿠르스트 산맥 일대는 오랫동안 국경수비대에 의해 관리되어 왔어요. 록밸리 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그 주변의 다른 마을도 예외는 아니죠.”
“왕국군에게 적용되는 군법이 백성들의 삶에 꽤나 영향을 주었겠군.”
물론, 완전히 왕국군이 사용하는 군법이 완벽하게 적용되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군법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종류의 사건도 사람들 사는 마을에서는 일어나는 법이니까.
“왕국군의 군법을 적절히 변형시키고, 내용을 추가해서 각 마을별로 적용하는 중이었겠죠.”
그렇다고 해도 군법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보다는 군법을 공부한 사람이 쿠르스트 산맥 영지의 상황에 더 빠르게 익숙해질 수 있을 것이다. 클로에의 제안을 검토하던 나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고 클로에를 바라봤다.
“좋은 생각 같은데. 오늘 먹은 와인에 머리가 좋아지는 약이라도 타서 먹은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슬쩍 나를 노려본다.
“무슨 소리를 또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어쨌든, 자세한 사항까지는 마틴 님이 신경 쓰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레드우드 부인은 좋은 사람이고, 마틴 님이 받으신 영지 규모 정도라면 아마 문제없이 운영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카일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해두는 편이 좋겠지.”
“네, 현재로서는 마틴 님을 제외하면 하이랜더들과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결국 쿠르스트 산맥의 내 영지는 하이랜더들과의 공생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이랜더의 말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대충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우리가 탄 마차는 내궁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멈췄다.
“그럼, 지시한 일 빼먹지 말고 훌륭하게 수행하라고. 오늘은 꽤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니까. 앞으로는 조금 더 기대해도 괜찮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차에서 내릴 시간이다. 다른 말로는, 다시금 연기를 해야 하는 시간이 왔다는 뜻이지. 나와 클로에는 다시금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그럼, 먼저 쉬고 있어. 나는 어머니를 만나고 올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마틴.”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내 뺨에 입맞춤을 하고 내궁으로 들어갔다. 나는 멀어지는 클로에를 아쉬움이 섞인 눈으로 바라보다가 로델린이 쉬고 있는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머니, 마틴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곧바로 로델린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봤다.
“소식을 들었다. 마틴, 얘야.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니?”
아, 이러면 이야기가 훨씬 빨라지겠군.
“어머니 말고는 부탁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영주 대리라니,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나는 확신이 없구나.”
말을 마친 로델린이 한숨을 내쉬고 종이 한 장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었다. 그녀에게 보내진 편지였다.
“친정에서 보낸 건가요?”
내 말에 로델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나 급하게 보냈는지 아직 잉크도 다 마르지 않았더구나.”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줄 수 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나는 그 편지를 보고 작게 코웃음을 쳤다.
“어머니가 정말로 도움이 필요했었던 레드우드 영지에서의 요청을 무시할 때는 언제고.”
내 말에 로델린이 다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네가 정말 나로 하여금 대리 영주라고 하는 막중한 짐을 지울 생각이라면…… 나로서는 이 도움을 거절할 수가 없단다. 영지는 영주 혼자 운영하는 게 아니야. 사람이 필요하지. 하지만, 나로서는 영지 운영에 필요한 사람들을 충원할 길이 막막하지 않니.”
로델린이 걱정하는 점은 뭔지 알 것 같았다. 그녀로서는 필요한 사람을 충원할 길이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영주 대리로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저 편지를 무시할 수가 없다. 로델린이 이 도움을 받아들이면 자연스럽게 내 영지는 로델린의 친정 사람들이 심어놓은 사람들도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중에, 네가 돌아왔을 때 부모로서 못 할 짓을 해놓을 것 같아 두렵단다. 제발,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폐하께서 내리신 어명을 거두도록 해주렴.”
“그 점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나도 그 점에 대해서는 생각해 둔 것이 있었으니까. 벤그리프 교수의 조각상을 찾아준 보람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벤그리프 교수와의 거래 내용을 들은 로델린의 표정이 약간 나아졌다.
“그 학원이라면 나도 들어본 적이 있다. 벤그리프 교수라는 자도 교육자로서는 꽤나 명성이 있는 편이고.”
“이제 막 졸업한 학생이라고 하면 다른 귀족들의 손을 타지 않았을 겁니다. 어머니에게 충성을 바칠 거에요.”
내 말에 로델린이 기겁하는 표정으로 손을 저었다.
“얘는, 그 사람들이 나에게 충성하면 어떡하니. 너에게 충성해야지.”
“그게 그겁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해가 되는 일을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내 말에 로델린이 잠깐 움찔하더니 약간 목이 멘 소리로 중얼거렸다.
“마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로델린이 이내 침을 삼키고 굳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가 영주 대리로서 있는 것이 너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렇습니다. 어머니가 필요해요.”
내 말에 로델린이 눈을 질끈 감고 한동안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부족한 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네가 어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겠니.”
말을 마치고 로델린이 양손으로 내 오른손을 꽉 잡았다.
“훌륭한 영지로 만들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이것 하나만은 약속하마. 그 영지는 내 아들인 마틴 레드우드. 네 것이야.”
이야기를 이어가는 로델린의 목소리에는 점점 힘이 실리고 있었다.
“내 친정이나 남편의 가문은 물론이고, 세상 그 누가 욕심낸다고 해도…… 내 손에 의해 이 영지가 네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으로 변하는 일은 없을 거다.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 조금의 흠집이나 얼룩 없이 온전한 네 영지로 남겨두마.”
“감사합니다. 그거면 충분해요, 어머니.”
대답을 들은 나는 그녀의 손을 쓰다듬으며 이런저런 말을 이었다. 하인과 하녀는 내가 따로 선별해두었으니 따로 신경 쓰실 필요 없다. 벤그리프 교수에게는 내가 따로 편지를 보내 놓을 테니, 더 필요한 인력이 있다면 그에게 연락을 취하면 좋은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나와 함께 국경 수비대에서 일했던 도리안 경도 부탁한다면 아마 영지를 지키는 치안대 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이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나는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그리고,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도 부탁을 해보려고 합니다. 영지에 마법사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그래, 하지만 너무 부담스러워하는 눈치라면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마렴. 훌륭한 인재가 아니더냐. 서로 척을 지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그러겠습니다.”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엘렌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다면 약간 강제적인 느낌으로라도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엘렌이 로델린을 지키도록 할 생각이다.
“생각이 많아질 것 같은 밤이구나. 너는 피곤할 테니 돌아가서 쉬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한 나는 문을 열고 나갔다. 다음으로 찾아가야 하는 건 엘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