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91화 (191/275)

191화

엘렌에게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문제없어.”

“대답 한번 시원하네.”

내 말에 엘렌이 하, 하는 소리를 내고 소파에 기댄 채 데운 우유를 한 모금 마신다.

“그냥 사람도 죽어가게 생겼으면 도움의 손을 빌려주는데, 하물며 네가 요청한 걸 어떻게 거절해? 게다가, 레드우드 부인은 좋으신 분이라서 불편하지도 않고.”

엘렌은 말을 마친 다음 나에게 뭔가를 건네주었다. 짙은 보랏빛이 도는 작은 구슬이었다.

“이건?”

“이전에 연결몽에 당했었잖아? 방지해주는 거야.”

나는 그 말에 구슬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대답했다.

“이거, 형석이잖아. 이렇게 색이 짙은 건 본 적 없는데. 구하기 어렵지 않았어?”

형석, 소위 플로라이트라고 불리는 물건인데 온갖 색을 가지고 있는 걸로 유명하다. 내 말에 엘렌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조금 거만하게 말하자면, 왕도는 내 구역이야. 필요한 재료가 있다면 그게 꽤나 귀한 물건이라고 해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어. 레드우드 부인께도 드렸어.”

연결몽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이미 엘렌에게 들어서 알고 있다. 꿈속에서 고문을 당한다면 실제로 몸은 멀쩡해도, 정신이 맛탱이가 가버릴 수도 있으니, 당연히 여기에 대한 보호 대책은 있는 편이 좋지.

“어쨌든, 결국 나는 버리고 두 사람이서 오붓하게 떠난다 그거지?”

말하는 엘렌의 표정이 묘하게 흥미로 빛나고 있다.

“오붓하게라.”

내 말에 엘렌이 푸흐, 하는 소리를 내며 자기 턱을 쓰다듬었다.

“세상에, 플로라이트를 가공하기 위해 연구실에 갔는데 나에게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물어보는 녀석들이 몇 명 있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내 말에 엘렌이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한 방을 쓸 때 옆 방에서 잔 적이 있는데, 몇 시간이 넘도록 너무 시끄러워서 방을 옮겼다고 했어.”

“…….”

이건 칭찬을 해줘야 하는 일인가. 그래 뭐, 잘 생각해보니 1분 만에 조용해졌다는 식의 극악무도한 사기를 치지 않은 게 어디야.

“어쨌든,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었을 텐데 선선히 응해줘서 고맙다. 너도 네 할 일이 있을 거 아니야.”

내 말에 엘렌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여기에서 해야만 하는 일은 없어. 여기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대부분 거기에서도 할 수 있으니까.”

말을 마친 엘렌이 손에 들고 있던 잔의 우유를 티스푼으로 휘휘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다만, 내가 직접 청해서 갈 수는 없으니까. 네가 조치를 취해야 할 거야.”

“그거야 어려울 것 없지.”

이 정도 문제라면 세자도 선선히 도움을 줄 것이다. 엘렌이 내 표정을 보다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생각해보니, 이걸 쓰면 좋겠다.”

말을 마친 엘렌이 서랍을 뒤적거리다가 뭔가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이건 연락용 수정구잖아. 조금 다르긴 한데.”

왕국군에 보급되는 수정구와는 형태도 다르고, 그 위에 돋을새김 형식으로 금박을 입힌 문양들도 조각되어 있었다.

“시험 제작한 장거리 연락용 수정구야.”

시험 제작이라고 하면 프로토타입이라는 건가. 나는 다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보급형을 선호하는데. 불안정하거나 한 거 아니야?”

프로토타입이라고 말하면 뭔가 있어 보이지만, 까놓고 말해서 아직 양산할 수 있는 설비가 갖춰지지 않았거나, 뭔가 제품상의 결함이 있어서 시판할 수 없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아직 생산 단가가 맞지 않아서 시험용으로 생산한 물건일 뿐이야. 너도 알고 있지만, 왕국에서 사용되는 수정구는 그 교신 거리에 제한이 있잖아? 그걸 극복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거든.”

나는 그 말에 꽤나 오래전의 기억을 꺼내야 했었다.

“다나 힐베른이라는 여자가 올리비에가 만들어낸 은잔을 통해 먼 거리의 교신을 할 수 있었지.”

그리고, 그 여자가 말하길 엘렌도 수정구의 교신 거리를 보완하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했었던 것 같다.

“맞아. 기억하고 있었구나. 어차피 성능 실험도 필요한 상황이었으니까. 이번에 네가 사용한다면 나도 나름대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을 거야.”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는 건데?”

내 말에 엘렌이 대답했다.

“왕국군에 보급된 수정구를 통해 약해진 신호를 증폭하는 형식이야.”

그러니까, 일종의 변압기와 같은 형식으로 작동하는 모양이다.

왕국군은 파이크 왕국 곳곳에 주둔하고 있으니, 그 수정구를 통해 신호를 증폭시킨다면 거리의 제한 없이 일정 수준 이상의 통신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거다.

“군 내의 통신이 도청당하거나, 반대로 우리의 대화가 왕국군에 노출될 가능성은 없어?”

내 말에 엘렌이 고개를 저었다.

“군용 수정구도 통신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해독하기 힘든 마력 신호로 전환되고, 이 수정구를 통해서 전달되는 연락도 마찬가지야.”

보안은 어느 정도 튼튼한 수준이라는 뜻이다.

“혹시, 조언이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연락해. 원거리라서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지만, 해결 방법 정도는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을 테니까.”

“고맙다.”

나는 그 수정구를 챙긴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엘렌에게 인사하고 내 방으로 돌아갔다. 방 안에는 클로에가 앉아있었다.

“……그래, 앞으로는 이러는 편이 더 확실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게다가, 어차피 베로나 제국에 도착하면 필연적으로 한 방을 써야 하잖아요?”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에 참석하기 전까지는 단순한 소문에 멈춰 있었지만, 이제는 아닐 가능성이 농후하니까. 한 방을 쓰는 편이 좋다.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마틴 님이 한창 피가 끓어오를 나이라는 점인데.”

약간의 장난이 섞여 있는 클로에의 말에 나는 혀를 차며 대답했다.

“너는 잠자리 한 번 가지고 척을 지기에는 아까운 인재야.”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몸을 움찔했다.

“저보고 일을 못 한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내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바라는 게 많아서 그렇지. 너는 충분히 합격점이야.”

말을 마친 나는 하품을 한 번 하고 침대 쪽으로 향했다.

“합격점이라.”

그렇게 중얼거린 클로에는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쪽으로 다가온다.

“저리 가. 넌 소파 써. 거기까지 가면 참을 자신이 없거든.”

내 말에 클로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내고는 작게 뭐라고 구시렁거리면서 모포를 챙겨 소파로 향했다.

* * *

우리는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다소 불안해하는 로델린과 이야기를 나누고, 필요한 준비를 마무리하며 며칠 더 왕도에 머물렀다.

“준비는 끝났어요.”

깊은 밤, 클로에가 필요한 짐을 바리바리 챙겨 든 채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래, 타자.”

이미 우리가 타고 있다고 알려진 미끼 마차는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했다. 그리고, 우리는 몰래 준비된 마차를 타고 베로나 제국과 파이크 왕국의 국경으로 출발할 준비를 마쳤다.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나와 클로에는 빠르게 필요한 것들을 밀어 넣은 마차에 몸을 올렸다.

“이젠 진짜 파이크 왕국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신경을 쓸 수 없어.”

“레드우드 부인은 잘 해내실 거에요. 리버플로우 양도 열심히 도와줄 거라고 했잖아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이, 클로에가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올려놓고 말했다.

“잘될 거예요. 우리는 베로나 제국에서 목적을 달성하는 데에만 집중하죠.”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나를 보고 있던 클로에가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는 마차 등받이에 허리를 기대었다.

“사실, 마틴 님이라면 어떤 상황이 와도 잘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굉장히 불안해야 할 상황인데도 그렇지가 않네요.”

“그런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당장 겨울이 되면 영혼이 압류되는 건 마틴 님인데 굉장히 침착하시잖아요. 별거 아닌 일처럼.”

나는 그 말에 허어, 하는 소리를 냈다.

“불안해한다고 해결되는 일이라면, 불안해하지 않고 대응하면 더 빨리 해결되는 법이야.”

반대로, 불안해하지 않고 대응해도 해결되지 않는 일이라면 불안해하며 움직여도 해결되지 않는다.

“윗사람을 모시는 아랫사람의 입장에서는, 위에 사람이 그렇게 태연하면 아무래도 안심이 되기 마련이죠.”

말을 마친 클로에가 마차 안에 챙겨놓은 물통 중 하나를 꺼내 내용물을 쭉 비운 다음 뭔가를 꺼내 들었다.

“염색약?”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염색약이에요. 저는 탁한 금발이고, 마틴 님은 짙은 암갈색.”

클로에의 머리색은 완벽하게 반짝이는 금발이라기보다는 카라멜색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하긴, 제대로 된 금발이라면 너무 눈에 띄니까.

“사용법을 알려줘야 할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수건을 꺼내며 말했다.

“액체를 머리에 바르고, 수건으로 감싼 다음 조금 기다리면 끝나요.”

“간단하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염색약이 담긴 작은 항아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마법처리를 한 거라서 그래요.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죠.”

나는 클로에가 말해준 것처럼 액체를 머리에 바르고, 수건으로 머리를 감쌌다.

이거 완전, 족욕 하면서 차라도 한잔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인데. 잠시 뒤 수건을 풀어 내리자 나와 클로에의 머리는 완벽하게 착색이 끝나 있었다.

“신기하네.”

이렇게 쉽게 염색이 가능하다니.

그렇게 우리는 그 이외에도 이런저런 필요한 준비를 하며 마차 안에서 시간을 보냈고, 며칠 뒤 우리는 목적지로 정했던 바이란 관문 근처에 도착했다.

깊은 새벽, 나와 클로에는 곧장 후드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마차에서 내렸다. 바로 향해야 하는 곳은 바이란 관문 근처에 자리 잡은 큰손 전당포의 근거지다.

“여긴가.”

“카프리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면, 여기에 근거지가 있을 거예요.”

바이란 관문은 일종의 입국 심사대 같은 장소다. 당연히, 이 세상에 전자 여권 같은 건 없다.

따라서, 그 심사를 받기 위해서는 짧게는 몇 시간, 길게는 며칠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는 법이다. 심사를 기다리는 동안 베로나 제국에 들어가기를 원하는 상인이나 기타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하고, 따라서 자연스럽게 바이란 관문 근처에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해서 생활을 영위하는 숙박 시설 비슷한 것이 존재한다.

“쉼터라고들 부르던데요.”

밀론 카프리의 진술이 맞다면, 이 쉼터 중 상당한 크기를 자랑하는 장소가 바로 바이란 관문의 큰 손 전당포가 운영하고 있다. 당연히 우리가 찾아가야 하는 곳도 그 쉼터다.

“레드 케그라. 지체 높으신 분들이 보면 기절을 하겠군그래.”

이제는 익숙한, 널빤지에 타르로 써놓은 가게의 간판과 지체가 높으신 분들이 보면 기겁할 만한 모양새군. 저거 벽 타고 오르는 바퀴벌레 사이즈 봐. 뭘 먹고 저렇게 컸는지 모르겠네.

“지체가 높으신 분들은 검문이 끝나는데 30분도 안 걸리잖아요. 설사 길어진다고 해도 바이란 관문에서 자체적으로 숙소를 제공할 걸요.”

그렇겠지. 나는 주변을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본거지는 지하에 있겠네.”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확신하세요?”

“확신까지는 아니고.”

나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말을 이었다.

“건물의 크기가 너무 작아. 이 정도면 왕도에 있던 큰손 전당포만도 못한 수준인데. 그럴 리가 없잖아.”

지상에 없다면 지하에 있을 거다. 내 말에 클로에가 음, 하는 소리를 냈다.

“일리는 있네요. 일단, 안에 들어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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