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지만, 이 시점에 우리가 사람들 눈에 띄어서 좋을 건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방 안에 계속 박혀 있어야 했고, 이 방은 깨끗하기는 하지만 딱히 시간을 죽일 만한 수단이 존재하는 장소는 아니었다.
숙소잖아. 자는 곳이잖아. 여기에서 할 수 있는 게 도대체 뭐가 있는데. 물론, 남자와 여자가 방 안에 콕 박혀서 할 만한 짓이라면야 아예 없는 건 아니지. 하지만 나와 클로에는 대외적으로 연인 행세를 해야 하는 것이지 진짜로 거기까지 깊은 관계는 아니었잖아.
그래서, 결국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와 같았다.
“재미없어요.”
“나도 재미없어.”
클로에는 나에게 오목으로 34번째 패배를 맞이하는 중이었다. 우리가 마주 앉아 있는 테이블 옆에는 그 처참했던 전투의 결과가 적힌 종이들이 몇 장 쌓여있었다.
“분명히 뭔가 필승하는 방법이 있는데 저에게 알려주지 않는 거죠? 애초에, 마틴 님이 직접 만든 놀이라고 했으니까.”
나는 그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로 하나씩 동그라미 그리면서 하는 놀이에 무슨 개수작을 부리겠어. 게다가, 이게 꼭 이겨야만 할 정도로 처절한 판돈이 걸린 것도 아니잖아? 누가 들으면 질 때마다 손가락이라도 하나씩 자르는 줄 알겠다.”
“다른 거 해요.”
나는 그 말에 저절로 시선을 저 옆에 던져져 있는 체스판 쪽으로 향했고, 클로에는 곧바로 한마디 덧붙였다.
“체스도 싫어요. 머리 쓰는 건 재미없어. 사람이 적당히 져주기도 해야 인간미가 있는 법이란 말이에요.”
“불과 몇 시간 전에 봐주지 말라고 한 사람은 어디 가고 어떻게 해서든 승리 한번 챙겨보려고 하는 찌질이가 등판했을까?”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으으,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노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살폈다.
“아직도 해가 떠 있네요.”
“이제 석양이 지고 있잖아. 조만간 밤이 될 거야.”
클로에는 잠깐 창밖을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차 드실래요?”
“벌써 다섯 잔이나 마셨는데.”
딱히 차를 안 마시고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결국 우리 앞에는 여섯 번째 찻잔이 놓이게 되었다.
그리고, 그 여섯 번째 찻잔이 비워지고 나서야 마침내 해가 완전히 저물고 밤이 찾아왔다.
나와 클로에가 짐 정리를 하고 후드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기다리고 있자,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뭐야, 지점장씩이나 되는 사람이면서 직접 운반하는 건가?”
문을 열자, 문 앞에는 디에론이 서 있었다.
“얼굴을 가렸는데…….”
나는 그 말에 픽 웃었다. 그 정도로 안 들키기는 힘들지. 이내 디에론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건물 뒤편에 마차를 준비해 두었으니, 타시면 됩니다. 약간 자리가 불편하시긴 할 겁니다.”
자리가 불편한 건 상관없다. 몰래 가면서 편하게 갈 생각까지 하는 건 탐욕이잖아? 우리를 안내하면서 디에론은 계속해서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귀한 물건들을 나르는 마차를 준비했습니다. 황도 치안본부의 고위 간부가 따로 요청한 물건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 말에 작게 오호, 하는 소리를 냈다.
“영리한데.”
왕도의 치안대가 왕도의 치안에 집중하는 것과는 달리, 베로나 제국의 치안본부는 제국의 치안 전체를 관장하는 거대한 기관이다.
치안대 고위 간부가 부탁한 물건들을 담은 마차라면, 나중에 수상함을 느낀다고 해도 조사를 들어가기 굉장히 까다로울 테니까.
“그럼 바로 황도로 향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먼저 이 친구가 말해줬을 거야.”
내 말에 디에론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죄송하지만, 국경을 통과하시고 난 다음에는 마차에서 내리시는 편이 조직에도, 그리고 두 분에게도 안전할 겁니다.”
“알았어. 무리한 요구까지는 하지 않을 테니 그렇게 눈치 보지 마.”
대답을 들은 디에론이 다소 안심하는 표정으로 마차의 짐칸으로 안내했다.
“안에 들어가시면 최대한 기척을 죽이셔야 합니다.”
짐칸을 가리고 있는 천막을 치우자, 온갖 장물들이 마차 안에 잔뜩 담겨 있었다. 일부러 다 끌어내서 검사하기 힘들도록 부피가 있는 물건들로 채웠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안에 들어가시면 뒤편에 두 분이 들어갈 만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나와 클로에는 곧장 마차 위에 올라 안쪽까지 들어갔다.
“공간이 굉장히 좁네요.”
“불평할 수는 없잖아.”
나와 클로에는 마련되어 있는 좁은 공간에 구겨 넣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어차피 관문을 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니까, 길게 잡아도 1시간 이상 여기에 있을 필요는 없을 거야.”
“……그렇겠죠?”
희미하게 푸르륵, 하고 말이 투레질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가 탄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말을 하면 안 된다.
덜컹거리며 굴러가던 마차가 얼마 지나지 않아 멈췄다. 마차 근처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이건 뭐야?”
걸걸한 남성의 목소리에 디에론이 곧바로 공손한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물건 배달 중입니다. 나으리.”
“뭐야, 디에론 부인이잖아. 직접 마차를 몰고 다니는 건 거의 5년 만에 보는 것 같은데.”
그 말에 디에론이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워낙 높으신 분에게 갈 물건이기도 하고…… 아시다시피 지금.”
그 말에 경비가 아, 하는 소리를 냈다.
“아들이 실종 중이라고 했던가? 빨리 찾으라고. 마음 같아서는 도움을 주고 싶지만 지금 막 왕국 자식들과의 전쟁이 끝난 참이라서, 따로 시간을 내기가 힘들어.”
“마음을 써주신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걸요.”
“그런가? 어쨌든 절차는 절차니까. 검사하는 시늉이라도 좀 하마.”
말을 마친 경비병이 저벅거리는 소리와 함께 마차 뒤편으로 도는 소리가 들린다. 나와 클로에는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의 몸을 조금 더 바짝 붙이고 그대로 숨을 멈췄다.
천막이 걷어지는 소리와 함께, 타오르는 횃불이 비추는 짙은 조명이 마차 안으로 쏟아진다. 나를 붙잡고 있는 클로에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간다. 동시에, 맞닿아 있는 가슴에서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그대로 내 몸으로 전달된다.
“이봐, 디에론.”
그 말에 클로에의 몸이 작게 움찔했다.
“네, 뭔가 문제가 있나요?”
디에론의 목소리는 굉장히 차분했다.
“아니, 요 앞에 놓여있는 금가락지 말이야. 따로 배달을 요청한 분이 있는 건가 싶어서.”
그 말에 디에론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는 않아요. 그동안의 정도 있고 하니, 원하신다면 드릴까요?”
그 말에 경비병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그 뭐냐. 나도 늦은 나이긴 하지만 슬슬 결혼할 때가 되어서 말이야. 뭔가 그럴듯한 예물이 필요한 참이었거든.”
그 말에 디에론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결혼하실 예정이 있으시면 말씀을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제가 섭섭지 않게 챙겨드렸을 텐데. 그 금가락지로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나중에 따로 하나 물건을 마련해 드리는 건 어떠신가요?”
“그렇게까지 하는 건 좀 미안하지 않겠나?”
“저희는 괜찮아요. 평상시에 보통 신세를 지고 있는 것도 아닌걸요. 앞에 놓여있던 금가락지라면 따로 장식이나 박혀 있는 보석도 없는 수수한 물건이잖아요? 결혼식 예물로 쓰기에는 부족함이 있죠. 제가 좋은 물건으로 한번 구해볼게요.”
그 말에 경비병의 목소리 톤이 대번에 높아진다.
“이야, 그래 준다면 고마울 것 같은데. 잘 좀 부탁할게.”
그걸로 검문은 끝났다. 다시금 걷어 올려졌던 천막이 내려지고, 다시금 짐칸 안에는 암흑이 찾아왔다.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성문 옆에 나 있는, 작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 쪽문이라고 해도 마차 한 대 정도는 어렵지 않게 통과할 수 있는 크기인 모양이지.
“그럼, 고생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마차가 굴러가기 시작한다. 마침내 우리는 다소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이걸로 국경은 무사히 통과했다. 지금부터는 파이크 왕국이 아니라 베로나 제국이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첩보국에서 일한 사람이.”
조그맣게 건넨 내 말을 듣고, 클로에는 꽉 잡고 있던 내 옷깃을 놓았다.
“저는 첩보국에서 일할 때도 항상 이런 순간에는 긴장했어요. 다만, 티를 내지 않았을 뿐이지.’
“그럼, 이번에 티를 낸 이유는 뭔데?”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방금 전에는 억지로 태연한 척 연기할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하긴, 걸린 다음에 연기를 한다고 해서 바뀔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 방금 전에는 걸리면 그대로 끝인 상황이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마차가 다시 한번 멈추고, 마부석에서 디에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씀해주신 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나와 클로에는 그 말에 곧장 후드를 눌러 쓴 채 마차에서 내렸다. 디에론은 마차에서 우리가 내리는 걸 확인하자,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저기, 약속해주신 것은.”
나는 그 말에 클로에에게 작게 턱짓을 했다. 클로에가 촛농으로 봉인한 편지봉투를 디에론에게 넘겨주었다.
“궁금하다면 봉투를 뜯어서 내용을 확인해봐도 상관없어.”
내 말에 디에론이 곧장 봉투의 촛농을 뜯어낸 다음, 마차 뒤편에 달려 있는 램프 쪽으로 다가가 편지 내용을 확인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내용을 확인한 디에론이 곧바로 나와 클로에를 향해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받은 호의에 대한 대가로 건네준 호의일 뿐이야. 그리고, 그 은혜는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잊어.”
내 말에 디에론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잊은 척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디에론은 다시 마차에 올랐다. 잠시 뒤, 투레질과 함께 마차가 멀어졌다. 나는 그사이 주변을 살폈다. 여기에서 첩보국 사람과 접선하기로 되어있었는데.
“저기 오네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챙이 넓은 중절모를 입은 남자가 우리 쪽으로 걸어오며 지팡이로 바닥을 몇 번 두들겼다. 미리 정해놓은 신호 같은 거다. 그 소리를 확인한 나와 클로에는 자연스럽게 구석진 골목 쪽으로 앞서 걸어갔다.
골목에 도착한 우리는 녀석이 안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마틴 레드우드 님,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입니다.”
모자를 눌러쓴 사람이 그런 인사를 건네주었다.
“우리 쪽에는 별다른 문제 없어, 첩보국은?”
내 말에 곧바로 녀석이 대답을 돌려주었다.
“두 분이 사용할 위장 신분은 무사히 이 마을에 도착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다만, 제국 정보처의 눈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두 분께서는 이후 움직임에 각별히 신경을 쓰셔야 합니다.”
뭐, 애초부터 완전히 비밀스럽게 움직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정보처가 작은 조직도 아니고, 첩보국과는 서로 암암리에 그림자 속에서 싸우던 녀석들이니까. 아무래도 이런 쪽으로는 촉이 민감 할 수밖에 없지.
“그 정도는 감당할 생각으로 온 거야.”
“알겠습니다. 어떤 일 때문인지는 저 같은 말단이 알 수는 없지만, 목표하신 바를 꼭 이루시기 바랍니다.”
말을 마친 그가 클로에 쪽으로 서류를 건네주었다.
“제국 안에서 사용할 수 있는 주요한 은신처들에 대한 정보도 포함되어 있어. 만약의 상황이 발생하면 참고하도록 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반드시 소각시켜.”
클로에가 그 말에 서류를 건네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어.”
“그럼, 건투를 빕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