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196화 (196/275)

196화

코랄린 관문에서 올리비에 황녀가 자살했다!

베로나 제국의 황도에 그 소식이 전해지고 시간이 제법 흘렀다.

그 사이, 많은 백성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슬퍼하는 대신, 슬퍼하는 시늉을 했다.

황제의 사랑을 받고 있을 뿐, 아무것도 자기 판단으로 선택하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황녀의 죽음이 그렇게 충격적으로 와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단 베로나 제국의 백성들뿐 아니라, 올리비에라는 여자의 실체에 대해서 아는 것이 전혀 없는 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올리비에 황녀가 자신의 얼굴 위에 뒤집어쓴 가죽을 벗어 던질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황녀의 죽음 그 자체보다는 그로 인해 길길이 날뛸 황제 아래에서 취해야 할 처세술을 고민했다.

마침내 황도로 올리비에 황녀의 시신이 옮겨지게 되었다.

[국장을 치를 준비를 해라. 꽃다운 나이에 죽은 이 불쌍한 아이의 넋이 원통해하지 않도록!]

그리고, 황도에 황제의 공문이 내려왔다.

베로나 제국의 황제는 전달된 올리비에 황녀의 시신을 확인한 다음 며칠째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밤낮을 눈물로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하지만, 소문과 진실은 조금은 다른 법이다.

황제는 물론 올리비에의 죽음으로 인해 큰 슬픔을 겪고 있었다. 하지만, 그 슬픔은 눈물의 형태가 아니라 분노의 형태로 빚어지는 중이었다.

“그 자식의 어미를 죽여라! 아니, 산 채로 데려와라! 그 자식의 눈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꼴을 보지 않으면 내 백 년이 지나도 편히 잘 수 없을 것이야!”

화려하게 장식된 알현실에서, 검은 옷을 입은 황제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바닥에 엎드린 남자를 향해 노발대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폐하, 파이크 왕국과의 전쟁은 이제 막 끝난 참입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현재 진행 중인 전후 교섭에서 불리한 위치를 감수해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네를 부른 거 아닌가, 정보처장!”

답답하다는 외침에 베로나 제국 정보처장 알렉시스 블룸은 머리를 숙인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의 모친인 로델린 레드우드는 현재 자신의 아들을 대신해 영주대리의 직책을 가지고 쿠르스트 산맥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왕국의 첩보국도 로델린 레드우드의 신변에 위협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굉장히 많은 숫자의 인력을 그 여자에게 붙여두었습니다. 거기에 더해, 왕국의 출중한 마법사인 엘렌 리버플로우도 동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정보처에서 공작을 펼친다고 해도, 성공할 확률이 너무 낮습니다.”

알렉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곧바로 쾅, 하고 황제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럼, 그 자식이 벌건 대낮에 돌아다니며 전쟁 영웅이랍시고 껍죽거리는 꼴을 나보고 그냥 두란 말이냐!”

“현재 정보처에서는 수상한 정보를 파악하고 조사 중에 있습니다. 아직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말을 마친 알렉시스가 굳은 표정으로 숙이고 있던 머리를 들어 올려 황제를 향해 말했다.

“어쩌면, 마틴 레드우드가 국경을 넘어 베로나 제국으로 들어왔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 말에 황제의 표정이 대번에 변했다.

“확실한가?”

“폐하, 이미 진언을 올렸다시피……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만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 말에 황제가 얼굴을 구긴 채 대답했다.

“이런 망할 자식아. 그렇다면 조사를 해야 할 것 아니냐! 정보처장이라는 녀석이 왜 그리 행동이 굼뜨고, 손속이 미련하단 말이냐!”

지금 황제는 화를 내지 않고는 대화를 이어가기가 힘들 지경이다. 알렉시스는 그런 생각을 하다가 말을 이었다.

“저희가 파악하기로, 첩보국의 손을 탄 것 같아 보이는 수상한 움직임이 최소 다섯 개 이상 발견되었습니다. 이들을 모두 조사해 수상한 점을 밝혀내기 위해서는 충분한 시간과, 신중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알렉시스는 여기에서 잠깐 말을 끊고 깊게 심호흡을 한 번 했다.

“사실, 빠르게 조사를 마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정보처장이 슬픔과 분노로 맛탱이가 간 황제에게 알현을 요청한 것은 이 이후에 하려고 하는 말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속히 말해보라.”

황제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자, 알렉시스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올리비에 라가르드 황녀 전하의 장례식에, 황제 폐하의 이름으로 마틴 레드우드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파이크 왕국에서는 이를 거절하기 힘들 것이다. 아무리 이제 막 전쟁이 끝난 참이라고 하지만 한 나라의 황제가 직접 요청한 사안이다.

“마틴 레드우드가 오게 된다면 지금 정보처에서 사람을 붙여 감시하고 있는 수상한 녀석들은 모두 무시해도 됩니다. 하지만, 황제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마틴 레드우드가 오지 않는다면…….”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알렉시스의 머리통에 포도주가 담긴 병이 날아와 박살 났다. 깨진 유리가 살을 긁어내리고, 피와 포도주가 한 곳에 뒤섞여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네가 정녕 미친 것이렷다.”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에 섰다.

“네가 지금, 내 사랑하는 딸을 죽인 살인자를 장례식에 초대하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냐?”

“죄송합니다. 현재로서는, 마틴 레드우드가 베로나 제국에 있는지 없는지를 가릴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했…….”

그 말에 황제가 그만! 이라고 외쳤다. 알현실에 황제의 외침이 가득 찼다가, 이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포효가 사라지고 난 다음 찾아온 적막 속에서 알렉시스는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얼굴에 난 상처에서 피를 쏟아내고 있었고, 황제는 매서운 눈으로 그를 바라본다.

“더 이상 떠들지 마라. 한 번만 더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꺼낸다면, 올리비에의 장례식을 네 녀석의 거열형으로 시작하겠다.”

알렉시스는 침을 삼키고 속으로 한탄했다. 물론, 무리한 요구라는 점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는 점이 가슴 아플 뿐이다.

“너는 속히 정보처의 인력을 추가로 동원해 네가 말한 수상한 것들의 움직임의 조사에 박차를 가하라.”

“황명을 받듭니다.”

“나가라.”

말을 마친 황제가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것처럼 손을 한 번 크게 휘저었다. 알렉시스는 허리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알현실에서 물러나 마차에 올랐다.

“환장하겠군. 어떻게 죽었지?”

알렉시스는 올리비에의 시신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믿기가 힘들 정도였다. 베로나 제국에서 사는 사람들 중에 올리비에의 진짜 정체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중에서는 정보처장인 알렉시스도 포함되어 있었다.

악마가 나타나서 잡아가려고 해도 오히려 악마에게 개목걸이를 채우고 노예로 부릴 것 같았던 올리비에 황녀가 죽어버렸다. 그녀가 어떤 물건인지 알고 있는 알렉시스 입장에서는 처음 보고를 들었을 때 ‘올리비에 황녀가 또 뭔가를 할 생각인 모양이군.’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지, 정말로 죽었다고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근데 죽어버리다니.

“마틴 레드우드.”

싸워서 살아남은 자가 더 강한 것이다. 이 법칙은 지극히 원시적이지만, 그렇기에 신뢰성이 높다.

따라서, 올리비에를 죽음으로 내몰고 승리한 마틴 레드우드는 그녀보다 더 무시무시한 존재라는 뜻이다.

“올리비에 황녀 전하께서 관심을 보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줄이야.”

마차 안에서 서류를 확인하던 알렉시스가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파악되어있는 요주 인물들에게 사람을 더 붙여.”

알렉시스의 말을 들은 마부가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정보처의 인력이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지시하신 말씀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임무를 수행 중인 인력을 빼서 집어넣어야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알렉시스가 그 말에 씁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동원할 수 있는 여유 인력이 없다는 건 정보처장인 알렉시스가 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황제 폐하께서 원하시는 일이다. 의문을 제기하지 마라.”

“이행하겠습니다.”

결국 정보처는 황제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황제가 다른 일보다 마틴 레드우드의 무단입국 여부를 중시하고 있는 이상, 정보처는 그 지시를 가장 우선해야 한다.

* * *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나와 클로에는 함께 일찌감치 식사를 마치고 나서 도시의 중심지로 향했다. 나와 함께 도시의 중심지를 걷던 클로에가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보는 눈이 늘어났네요.”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클로에가 맞게 봤다. 우리를 지켜보는 눈이 늘었다.

“더 중요한 건, 다른 쪽들은 어떻냐는 거지.”

첩보국에서는 우리에게로 집중되는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서 가짜를 여럿 베로나 제국으로 보내놓았다. 만약 그 가짜들에게도 엉겨 붙은 시선의 숫자가 늘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시선의 숫자가 늘어난 게 우리뿐이라면 그건 우리 팔자가 앞으로 상당히 사나워지게 된다는 신호다.

“나중에 한번 확인해봐야겠어요.”

지나가는 듯한 어조로 중얼거린 다음 우리는 바로 보석을 파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가게 자체는 그렇게 규모가 크지 않았다. 제아무리 도시라고 하지만 이 도시에 머무르는 사람들의 지갑 사정은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고품질의 보석을 취급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겠지. 이런저런 장신구가 놓여있는 진열대가 보이고, 그 근처의 새장 안에서 쉬고 있는 새가 보인다.

뒤적거리던 서적에서 본 기억이 있다. 지구로 치면 카나리아와 비슷한 녀석이다.

“부부이신가요?”

나는 그 말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조만간 그렇게 될 예정입니다.”

내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그가 웃으면서 몇 가지 보석들을 꺼내기 시작한다.

“역시 그럴 것 같았습니다. 두 분이 아주 잘 어울리시는군요. 연인에게 선물하기에는 역시 다이아몬드만 한 것이 없지요.”

그러면서 가게 주인은 보석함에서 반지를 하나 꺼냈다.

“이게 바로 그 유명한 마르셀리아 보석공방에서 제작된 물건입니다. 어디에 내놓아도 빠질 부분이 없는 준수한 물건이지요. 하나 장만하시면 아내 되실 분께서 어딜 가셔도 어깨에 힘을 빡 주고 다니실 수 있을걸요. 제가 장담합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꺼내놓은 보석을 살피던 나는 약간 헛웃음을 지었다.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그렇게 고품질의 다이아는 아니다. 나는 세공된 다이아 반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컷팅은 좋은데, 색깔이 좀 별로군요.”

이 정도면 지구의 투명도 기준으로는 P에서 Q 정도 나오지 않을까. 육안으로 봐도 투명하지 않고 누런색을 알 수 있을 정도니까.

“아하, 보석을 좀 아시는 분이셨구나. 진작 말씀을 하시지.”

그 와중에 사람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주변을 살피기 시작한다. 가게 주인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웃으면서 인사를 건넨다.

“이야, 델 씨! 어서 오세요. 광산 일이 잘되시는 모양이네요. 뭐 찾으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아, 잠깐 눈호강 하러 온 거니 나는 신경 쓰지 말게.”

델 씨라. 서로 아는 사이인 모양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다. 애초에, 정보 수집과 방첩이라는 임무를 수행하는 정보처의 요원이라면 위장 신분을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 임무 지역에 머무르는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 경우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뭐야, 새를 키우기 시작한 건가?’

“네, 며칠 전에 한 마리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래? 처음 보는 새인데. 귀엽네.”

그 대화를 듣고 있던 나는 클로에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전에 선물해준 장미, 다섯 송이였었나? 조금 더 선물해 줬어야 하는데.”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아, 하는 소리를 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건 마음이 중요한 거잖아요, 당신. 꽃송이의 숫자가 뭐가 그리 중요하겠어요.”

밤에 미리 정해둔 거다. 장미 이야기를 꺼내면 근처에 우리를 감시하는 눈이 바로 옆에 붙어있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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