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저지른 미친 짓거리의 효과는 굉장했다. 그다음 날 밖에 나가서 점심을 먹고 거리를 산책하다 돌아오니 방 안에 설치되었던 도청장치들이 전부 사라져 있었다.
“봐요, 효과 좋잖아요.”
클로에의 말에 따르면, 그런 종류의 장치는 발동시키고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이 상당하다는 모양이다.
“부인할 수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내 자신이 유린당한 기분이야.”
내 말에 클로에가 하, 하는 소리를 내고 의자에 기대며 대답했다.
“입에 양초를 물어야 했던 제 입장은 어땠겠어요.”
나와 클로에 둘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그 정신병 걸린 행위는 분명한 성과를 거두었다.
“따라붙은 눈도 많이 줄어 있었죠.”
적어도 네 명은 붙어있었던 것 같았는데, 오늘은 두 명 정도만 붙어있다.
“제국의 정보처도 인력이 많이 부족했던 상황인 모양이네.”
우리가 자신들이 찾고 있는 대상이 아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자마자, 곧바로 배치했던 인력 중 두 명을 빼내 버렸다.
“뭐, 거기도 나름의 사정이라는 게 있었을 테니까요. 알고 보니, 따라붙은 인원이 증가한 건 우리 쪽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던 모양이에요.”
그렇다면야 정보처에서도 인력을 쥐어짜 냈다는 뜻이다. 우리를 감시하던 숫자가 이렇게 빨리 줄어든 게 다른 함정을 파놓기 위해서 깔아놓은 포석일 가능성은 확 줄었다.
“마차는?”
내 말에 클로에가 내 쪽으로 서류를 건네주었다.
“마련했어요. 여기에서 베로나 제국의 황도까지 직선으로 향할 거에요. 첩보국이 마차의 마부를 확인해 본 모양인데, 따로 누군가에게 매수당한 것 같지는 않았어요.”
일주일 정도 걸리는 모양이다. 서류에 적힌 내용에 오류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내가 보기에도 크게 문제는 없어 보인다.
“그럼 이대로 진행하자. 오늘 바로 출발해도 괜찮겠지.”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걸어 다니면서 대도서관을 구경하고 싶다며 쉬지 않고 아양을 떤 보람이 있네요.”
“그래, 요즘에 네가 좀 고생하고 있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알아주시니 다행이에요. 마차는 오늘 저녁 중으로 출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내일 오전으로 해.”
여행하는 사람들이 저녁에 마차를 타고 도시를 벗어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심지어 결혼 예정인 연인들이잖아. 밤에 가긴 어딜 가겠어.
“그럼 그렇게 일정을 조정해 둘게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침대 위에 팍 하고 올라가 드러누워서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하,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누가 몰래 이 안의 대화를 듣는다고 생각하니 꽤나 힘들었어요.”
나는 그 말에 픽 웃으며 대답했다.
“침에 젖은 양초가 한몫을 톡톡히 했지.”
저 양초를 클로에가 빨았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가격이 오를까 떨어질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대답했다.
“무슨 소리예요, 마틴 님이 구멍을 낼 기세로 핥아대던 나무 그릇이 더 큰 공을 세웠다고 생각해요.”
그래, 최소한 내가 핥은 나무 그릇의 가격은 절반 이하로 떨어질 거라 장담한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때 했던 행위는 무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비밀이다.”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떠들 만한 즐거운 경험은 절대로 아니었다.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언데드로 다시 일어난다 해도 비밀로 할 생각이에요.”
좋은 마음가짐이네.
“저녁은, 여관에서?”
“좋죠. 오늘 아침에 만들어준 오믈렛을 먹어봤는데, 다른 요리도 기대해 볼 만한 수준이더라고요.”
“그래? 그냥 구운 달걀일 뿐이잖아.”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혀를 차고는 대답했다.
“그럼 피클은 왜 드세요? 그냥 오이 먹고 식초를 들이켜시지.”
반박할 말이 없네. 나는 나가는 문을 열고 대답했다.
“그래서, 오늘 저녁 메뉴는 뭐로 할 생각이야? 나는 폭립이 좋을 것 같은데.”
“폭립이요? 메뉴에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 시간 전에 여관 앞에 마차가 멈춰서 식료품을 내리더군. 옮기는 물건을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알게 되던데.”
내 말에 클로에가 약간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대답했다.
“뭐, 진짜로 메뉴에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있다면 저도 그럼 그걸로 할게요.”
계단을 내려간 우리는 안내를 받아 식탁에 앉았다. 메뉴판 옆에는 작은 쪽지 하나가 추가로 붙어있었다. 금일 특선 메뉴로 특제 소스를 곁들인 폭립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히죽 웃으며 그 메모를 손으로 툭 쳤다.
“내 말이 맞지.”
“그러게요. 큰걸로 할게요.”
그렇게 주문을 마치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문이 벌컥 열리고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 세 명이 우리 테이블 옆에 앉는다.
“여기 맥주 세 잔!”
손과 옷에 묻은 흙먼지와 톱밥 쪼가리가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주머니 밖으로 살짝 튀어나와 있는 건 줄자다. 목수들인 모양이다. 주인이 맥주잔을 놓고 가자, 목수들 중 하나가 기지개를 쭉 켠 다음 잔 안에 들어있는 액체를 싹 비우고 입가의 거품을 훔치며 나와 클로에 쪽을 슬쩍 본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여행 온 모양이지. 어디 출신이오?”
나는 그 목수의 말에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테네스 공국 사람입니다.”
대답을 들은 목수가 하! 하는 소리를 냈다.
“전쟁이 막 끝난 참인데 뭐 볼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어그래.”
나는 그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제국이지 않습니까. 볼 게 없다고 하면 거짓이 아닐까요.”
“직업은?”
“보석상을 하고 있습니다.”
내 말에 말을 건 녀석이 휘파람을 길게 불었다.
“돈은 원 없이 만지겠군그래.”
“사실 이 일이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테네스 공국이라 그거지.”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잔에 남아있는 맥주를 다시 한 모금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거, 가게 이름은 어떻게 되나?”
“죄송하지만, 그건 왜 물어보시는지.”
내 말에 그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 다른 건 아니고. 지인 중 하나가 기술을 배운 다음 테네스 공국으로 갔거든. 가끔 건물을 지을 때마다 편지를 보내곤 하는데. 혹시 모르지 않나? 내 친구가 지은 건물에서 장사하는 중일 수도 있고 하니까.”
말을 마친 그가 히죽 웃으며 잔을 흔들었다.
“왜, 뭐 말하지 못할 이유라도 있나?”
입은 웃고 있지만, 눈동자는 바쁘게 움직이며 나를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다. 이 자식, 목수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면 목수는 맞긴 한데. 뭔가 겸업으로 다른 일도 하고 있는 놈인 것 같다.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초면에 가게 이름을 물어볼 줄은 몰랐거든요. 게다가, 그렇게 대단한 상점도 아니라서 말씀드려도 아실지 어떨지.”
이 와중에, 식당 구석에서 우리들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는 남자 한 명이 더 있었다. 아무래도, 이거 뭔가 단단히 마음을 먹은 모양인데.
“웨이슨 보석상이라고 합니다.”
내 말을 듣자 말을 걸었던 목수가 잠깐 고민하더니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글쎄, 물어본 내가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잘 모르겠군.”
나는 그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길래 제가 말했지 않습니까. 테네스 공국에서도 그리 유명하지 않은 작은 가게인데, 이 큰 베로나 제국에서 제 가게를 아는 분이 있을 리가 없죠. 저도 혹시 아시는 건가 싶어서 기대하기는 했었습니다.”
내 말에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고, 나도 마주 웃어주었다. 그래서, 이제 뭘 할 생각인데?
“웨이슨 보석상이라. 나는 알고 있는데.”
내가 알게 모르게 신경 쓰고 있던 녀석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구석에 앉아서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놈이었다.
“네?”
내가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고 그를 바라보자, 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에게 뭔가를 휙 하고 던졌다. 녀석이 펴놓고 읽고 있던 관보였다.
“이번 전쟁에서 파이크 왕국에 물자를 대준 테네스 공국의 상인 놈이 있다더군. 이름이 엔리코였나.”
그 말을 들은 나는 절로 한숨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이걸 또 이렇게 엮어버리려고 하네.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렇습니까? 이거 참…….”
나는 그러고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이런 상황에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모른 척 발뺌하는 거다. 하지만, 그게 통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을 써야지.
“엔리코라는 친구에게는 가게를 차릴 때 융자를 받았었죠. 그 사람이 그런 일을 벌였을 줄은 몰랐네요.”
녀석들이 쑤실 예정인 약점을 먼저 드러내고 벌러덩 누워 버리는 거다. 내 말에 옆에 앉아있던 목수들이 시선을 내 쪽으로 돌렸다.
“그 기사는 나도 읽었어. 엔리코라니, 그 녀석의 돈을 받아 가게를 차렸다고?”
나는 그 말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긴 하지만. 막상 베로나 제국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좀 이상하네요. 이 사람이랑 저는 베로나 제국을 다소 동경하고 있었거든요. 누가 뭐라고 해도 대국 아닙니까? 결혼 전에 여행지로 이곳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였지요.”
이렇게 나오면 니들이 뭐 어쩔 건데? 나는 말을 마치고 나서 구석에 앉아있던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그나저나, 그런 사실은 어떻게 알고 계신 겁니까? 테네스 공국의 상인인 저도 잘 모르고 있던 사실인데.”
내 말에 녀석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뭔가를 내밀었다.
“베로나 제국에서 발행하는 관보의 기자다. 해당 기사에 나도 손을 거들어서 알고 있어.”
“그렇군요. 여기는 관보에 들어갈 기사를 쓰기 위해서 오셨나 봐요?”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후 국경의 민심이 뒤숭숭하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관련 기사를 좀 써볼까 했지.”
그 이야기를 듣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거리에 다소 그런 분위기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로나 제국이 이번 전쟁으로 입은 피해가 꽤 크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다시 이전의 모습을 찾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마친 나는 지나가는 종업원을 보고 말했다.
“맥주 네 잔. 세 잔은 이쪽 테이블로, 한 잔은 저쪽 테이블로 보내주세요!”
내 말에 녀석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려주시지 않았으면 전혀 모르고 있을 뻔했습니다. 그 말을 전해주신 분들이 좋은 분들이셔서 다행이지, 하마터면 큰 오해를 살 뻔했네요. 이건 감사의 뜻입니다. 오늘 하루 드시는 술값은 전부 제가 대신 내겠습니다.”
내 말을 듣고 있던 목수 중 하나가 휘휘 손을 저으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있나. 우리도 그 이야기를 듣고 다소 울컥한 건 사실이야. 좋은 사람이라니, 당치도 않은 소리지.”
그런 말을 하면서도 가져다준 맥주는 손에 쥐고 놓지 않는다. 공짜로 먹는 술이 제일 맛있다고 하잖아.
말해줘서 고맙고, 니들이 이런 걸로 나에게 시비를 걸지 않는 좋은 사람이라 다행이다. 이런 말을 하고 술을 사주면 화를 낼 타이밍을 놓쳐버린다. 결국, 그냥 흐지부지 없던 일이 되고 공짜 술을 즐기게 되는 법이지. 그 분위기 속에서 표정이 다소 굳은 건 먼저 나에게 말을 걸었던 목수와, 구석에 앉아있던 ‘자칭’ 관보 기자였다.
“혹시, 뭐 좀 더 독한 술이 필요하십니까?”
“에헤이, 맥주면 충분해 이 사람아. 잘 먹겠네.”
그러던 와중에 우리가 시킨 폭립과 구운 감자 같은 것들이 나와 우리 앞에 놓였다. 나는 그걸 보다가 어휴, 하는 소리를 냈다.
“이거, 우리 두 사람이 먹기에는 너무 많은데 좀 나눠 드릴까요?”
“고기라면야 거절하는 사람이 있겠나? 다만, 이게 이래도 되는 건지 싶긴 하군.”
“그렇게 생각 마시고 드셔도 됩니다. 여행 와서 만나는 사람들도 다 인연이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