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화
다음 날이 되었다. 나는 별로 편하게 잠을 자지 못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나는 그 말에 눈가를 비비며 대답했다.
“코 한번 우렁차게 골던데. 뭐 약 같은 걸 먹어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그래도 잠들기 힘든 상황에 코골이까지 더해지니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내 말을 들은 클로에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죄송해요. 하지만 저도 어쩔 수 없단 말이에요. 코를 잘라버릴 수는 없잖아요?”
코를 자른다고 코골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마차는?”
“아침 식사를 마칠 때 즈음이면 아마 여관 앞에 도착할 거예요.”
안티온 대도서관은 바다 근처의 푸앙트로제라는 도시 인근에 자리 잡고 있다. 대도서관의 도서관장도 그 도시에 있는 저택에 기거하고 있다.
“거리가 얼마나 되려나.”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빠르게 이동해도 열흘은 걸릴 것 같아요.”
열흘이라.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렇게 놀라울 건 없을 정도로 넉넉한 시간이군. 파이크 왕국에 있을 때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검을 뽑아 들고 해결할 수 있었기에 문제 될 게 없었지만, 베로나 제국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무력을 쓰는 일은 최대한 자제해야 할 텐데, 뭔가 대비책이 없을까.”
“괜찮아요. 저희가 푸앙트로제로 타고 갈 마차는 딱 저희 둘 만 타지만, 같이 출발하는 다른 마차들도 다섯 대 정도 있거든요.”
먼 길이고,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마차가 함께 움직이는 모양이다.
“동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마차비용을 면제해주는 대신 호위를 부탁한 사람들도 있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 말에 서류를 건네받았다.
“이 자식들 중에 정보처의 사람이 섞여 있을 수도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를 고르는 건 꼼꼼하게 해도 의심받을 일이 없지만, 동행하는 일행의 뒷조사까지 하려고 들면 분명 의심을 사게 될 테니까요.”
사실상 적과의 동침이 되겠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서류를 다시 클로에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뭐, 어떻게든 잘 처리해야겠지. 빨리 준비를 마치고, 아침 식사한 다음에 이 도시를 뜨자.”
식사를 마친 우리는 곧바로 짐을 챙겨 숙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랐다. 마차는 곧바로 우리를 싣고 다른 마차들과 합류하기로 정해진 장소에 도착했다.
마차는 우리가 탄 것을 포함해서 다섯 대가 있었다. 그중에 한 마차에는 네 명이 타 있었는데 딱 봐도 이 친구들이 공짜로 마차 타고 호위를 제공해주는 녀석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갑옷이랑 무기를 챙겨 들고 있었으니까. 창문으로 그들의 모습을 확인한 클로에가 작게 속삭였다.
“파이크 왕국군 병사들 중에서 삼사 년 정도 잔뼈가 굵은 수준인데…… 잘 모르겠어요. 별로 신뢰가 가지는 않네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혀를 찼다.
“그 정도면 적절한 거야.”
우리가 뭐 마법의 성을 지나 늪을 건너 어둠의 동굴 속 저 멀리 보이는 그대를 구하러 가는 것도 아니잖아.
정규 훈련을 받은 베테랑 병사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다면, 이동 중 안전 정도는 충분히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어차피 상황이 심각하다 싶으면 정체를 들킬 각오를 하고서라도 우리가 나서야 할 테니 사실 저 친구들의 실력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다.
“다 모인 것 같으니,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제국의 관문에서 푸앙트로제로 향하는 마차들이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뒤로 며칠 동안은 그렇게 대단할 것 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굴러가다가, 식사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하고 잠을 잘 시간이 되면 잠을 잤다. 잠은 노숙을 해야 할 때도 있었고, 도시에 도착해서 여관에서 머무르는 경우도 있었다.
클로에와 나는 그 사이에도 부지런히 수정구를 활용하거나, 몰래 직접 만나는 식으로 첩보국과 접선해서 이런저런 정보를 받아냈다.
“결국, 대도서관 내부에 관한 정보는 거의 구할 수가 없었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푸앙트로제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여태 동안 파악한 것들을 정리한 다음 다소 실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죠. 확실히,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장소는 아니니까요.”
그나마 알아낼 수 있는 건 도서관에 입장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 그리고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던 안티온 대도서관에 대한 시시콜콜한 소문, 마지막으로 극히 일부 장소의 구조 정도가 전부였다.
“입장을 위해서는 토큰이 필요해.”
토큰의 종류는 여러 가지가 있고. 각각 정해진 구역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 기계에 하나씩 집어넣어야 한다. 크게 구리, 청동, 백동, 은, 금으로 구분된 다섯 개의 토큰이 존재한다.
“보통 백성들에게 허락된 토큰은 구리뿐이에요.”
구리 토큰은 적절한 금액만 지불한다면 누구든지 구매할 수 있다. 이게 없으면 안티온 대도서관이라고 하는 건물 자체에 입장이 불가능하기에, 사실상 입장권의 역할을 하고 있다. 첩보국에서 파악에 성공한 안티온 대도서관의 일부 구조도 이 구리 토큰을 통해서 접근할 수 있는 장소뿐이었다.
구리 토큰으로 접근할 수 있는 정보는, 솔직히 말해 귀족이나 학자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에 대한 정보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맛있는 감자 수프를 만드는 비법이나, 위급한 상황에 급하게 사용할 수 있는 자잘한 약초들에 대한 기록, 또는 낡은 그릇을 재활용하는 방법 같은 실용서적들이 대부분이었다.
“우리가 구하는 정보의 가치를 고려해본다면…….”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올리비에 황녀가 직접 확인해야 할 정도로 귀중한 자료일 테니. 최소한 백동이겠죠. 사실, 금 토큰이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요.”
금으로 만들어진 토큰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건 아무나 구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대도서관 관장이 에릭 폴란스키라고 했나? 그 친구의 저택에는 금 토큰이 있을 가능성이 높아.”
콜라 회사 회장이 자기네 콜라 레시피에 접근하지 못하는 건 말이 안 되듯이, 대도서관 관장이 금 토큰이 없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그럼, 결국 남은 선택지는 도둑질 말고는 없겠네요.”
문제는 안티온 대도서관의 관장은 실력이 뛰어난 마법사이기에, 저택에도 온갖 종류의 마법이 걸려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엘렌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녀는 안타깝게도 이번 여정에 동행하지 못했다. 수정구를 통해 도움을 받는다 해도, 결국 우리 스스로 그 저택에 걸려 있는 마법들을 돌파해야 한다.
기장이 죽은 비행기에서 무선 교신에 의존해 비상 착륙을 시도하는 민간인과 비슷한 느낌이겠군.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소매 안에 넣어둔, 엘랜과의 연락을 위해 받아둔 특제 수정구를 잠깐 만지작거렸다.
“안티온 대도서관은 지상 위의 건축물도 거대하지만, 진짜배기들은 모두 지하에 있는 걸로 알려져 있어요.”
“그래, 소문에 불과하지만 신뢰도는 꽤나 높은 편이야.”
안티온 대도서관은 지하를 파고 들어가서 만들어진 건축물이다. 깊이가 얼마나 되고, 그 층이 몇 개나 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귀한 자료일수록 지하 깊은 곳에 잠들어 있다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 도는 풍문이다.
“그나저나, 정말로 그걸 태워버려도 괜찮았을지 모르겠네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 지도요.”
“아, 그거? 괜찮아. 다시 꺼내서 살펴봐야 할 필요는 없어. 괜히 챙겨두고 있다가 들키기라도 하면 그편이 더 골치 아파질걸.”
설계도면에 사용하는 기호나 단위 같은 것들이 조금 생소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큰 틀은 내가 자주 뒤져보곤 했던 지구의 설계도면과 큰 차이 없었다.
해가 저무는 가운데, 푸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도착한 모양이네요.”
마차는 푸앙트로제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 멈췄고, 우리는 경비병들에게 검문을 받아야 했다.
“두 사람은 테네스 공국인이군.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하니 즉시 마차에서 소지한 물건 없이 내리도록.”
“알겠습니다.”
그 지시에 대답한 나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클로에를 슬쩍 바라봤다. 봐, 쓸데없이 서류를 남겼으면 다 조져 먹을 뻔했잖아. 표정을 보아하니 돈 몇 푼 쥐여준다고 곱게 보내줄 것 같은 기세도 아니고.
경비병 세 명이 약 15분에 걸쳐 그 좁은 마차 안을 싹 뒤져본 다음에 서류에 적힌 인적 사항과 우리의 모습을 몇 번이나 재확인한 다음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우리가 내민 서류 위에 통행 허가를 의미하는 도장을 찍어주었다.
“통과. 푸앙트로제는 역사 깊은 도시다. 함부로 소란을 피우지 않도록 각별히 유의해라. 제국은 외국인들이 피우는 소란에 민감하고, 이 도시 또한 예외가 아니다.”
“그러겠습니다. 고생하십시오.”
말을 마친 우리는 마침내 필요한 절차를 모두 마치고 나서 푸앙트로제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 * *
클로에는 앞장서서 걸어가는 마틴을 잠깐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같은 침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게 벌써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 그녀가 시중들고 있는 마틴 레드우드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모양이다.
“참…….”
처음 같은 침대를 사용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과 긴장 속에 시간을 보내야 했지만, 지금 와서는 걱정이고 긴장이고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다. 침대에 누워서 이불을 덮고 잠에 든다. 그걸로 끝이었다.
다행이라고 하면 다행이긴 하다. 근데 까놓고 말해서 좀 어이없을 정도로 무심한 반응이어서 섭섭한 느낌도 서서히 생기는 중이다. 저 사람은 사실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아니면 모종의 심리적인 이유로 인해 성욕이 완전히 증발해 버린 건 아닐까?
“하긴, 갑자기 그러는 게 인상에 안 맞기는 한데.”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마틴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마틴 레드우드가 여자에 눈이 뒤집혀 욕정에 휩싸이는 모습이라는 건 사실 곁에서 나름대로 오랜 시간을 지낸 클로에의 시점으로 봤을 때 썩 어울리지 않는 일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저건 너무 무반응이잖아. 앞장서 걸어가던 마틴이 약간 걸음 속도를 늦추고, 곧 클로에는 마틴의 옆에 서서 팔짱을 끼며 입을 열었다.
“근처에 유명한 카페가 있다고 들었어요. 숙소를 잡기 전에 가보는 게 어떨까요? 닭고기 파이랑 사과 파이가 유명하다고 하던데.”
말 속에 목적이 숨어 있다. 클로에가 가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연기를 하면서 마틴과 함께 갈 예정인 카페는 안티온 대도서관장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 인근에 자리 잡은 3층 카페였다. 식사와 차를 하는 척하며,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을 외곽이나마 파악할 수 있는 장소.
클로에의 말을 들은 마틴이 웃으며 클로에의 팔뚝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좋네. 안 그래도 계속 마차 타고 돌아다니다 보니 함께 편안히 있을 시간이 없었잖아?”
“꽤나 먼 길이었으니까요.”
그런 대답을 하며 클로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기쁘지는 않았다. 지금 하고 있는 건 어디까지나 연기일 뿐이다. 마틴 레드우드는 여태 동안 그래왔던 것처럼 그녀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연인 같아 보이는 이 대화도, 사실은 필요에 의해 행해지고 있는 절차일 뿐이다.
핀들턴 저택에서 파티에 참석할 때까지만 해도 그 점이 마음에 걸리지는 않았다. 사실, 별생각 없었다. 애초에, 그런 식의 연기를 하는 건 클로에도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와서는 새삼스럽게 마틴 레드우드와 이런 연기를 하고 있을 때 조금씩 기분이 애매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게 본격화된 것은 아마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동침이 방아쇠였던 것 같다.
“어서 카페로 가자. 푸앙트로제는 제법 큰 도시니까. 머무르기에 좋은 숙소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을 거야.”
“네, 그래요.”
클로에는 스물스물 가라앉는 자신의 기분을 외면한 채 마틴에게 대답을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