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클로에의 행동이 다소 이상해졌다. 그 기점은 몰래 방 안으로 잠입한 녀석을 속이기 위해 같은 침대에서 잠들었던 때일 것이다.
그녀는 여전히 자신이 수행해야 하는 연기를 무사히 수행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나와 클로에는 테네스 공국에서 베로나 제국으로 여행 온 행복한 연인의 모습이었다.
“…….”
숙소를 잡고 클로에가 말한 카페에 도착했다.
내가 의자에 앉자, 클로에가 잠깐 서 있다가 내 맞은편에 앉았다. 결국, 감정은 사소한 행동들을 통해 드러난다.
“뭐 드실래요?”
말하면서, 클로에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메뉴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로 시키자.”
내가 메뉴판 위의 뭔가를 가리키지 클로에가 잠깐 거기에 시선이 멈춘다. 음료 두 잔과 함께 간단한 먹을거리가 포함된 메뉴다.
일종의 세트 메뉴다. 연인의 하루라는 다소 촌스러운 듯한 느낌의 이름이 붙어있었다.
“……그럴까요? 네, 그럼 그러죠.”
약간 당황하는 것 같은 기색을 보이던 클로에는 이내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메뉴를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의 앞에는 주문한 음식과 음료가 놓였다. 나는 창밖을 통해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을 살폈다.
“뭐 제대로 보이는 게 없네.”
세워진 벽의 높이는 적게 잡아도 4에서 5m는 될 것 같다. 카페 안에서 보이는 풍경은 굉장히 제한적이었다. 기껏해야 정원의 일부와, 벽 너머에 심어놓은 나무나 꽃 같은 것들이 보일 뿐이다.
그래도, 아예 보지 않는 것보다는 이렇게 제한적이라 해도 한번 살펴보는 쪽이 나중에 훨씬 더 도움이 된다. 여기에서 보이는 저택의 광경을 눈에 담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테이블 위에 올려진 치킨 파이를 한 조각 잘라 내 접시에 놓아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죠.”
“그렇지 뭐.”
내 앞으로 내민 닭고기 파이를 썰어 입에 넣었다. 여기에서 살펴볼 수 있는 건 다 살펴봤다. 입에 파이 조각을 넣고 씹으며, 클로에를 잠깐 바라봤다.
“맛은 어때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네.”
나는 고자도 아니고 숫총각도 아니다. 나이는 지구에서 먹을 만큼 먹었고, 그렇게 나이를 먹으면서 당연히 여자를 만난 적도 있고, 깊은 관계가 된 적도 있으며, 함께 잠자리를 가진 적도 있다.
어느 순간부터 클로에는 내가 아직 자고 있을 때 먼저 잠에서 깨 세수를 한다. 마차 안에 앉아서 단순히 굴러가기만 할 뿐인 일정 속에서 향수를 약간씩 뿌리기 시작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가 아니라면 화장실에 볼일을 보러 가지 않으려고 든다.
“올리비에 황녀를 위한 안식 예배는 언제 시작하지?”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며칠 뒤로 예정되어 있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 말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 저택의 주인도 지금쯤이면 이 도시를 나섰겠군.”
내 말에 클로에가 포크로 자신 앞의 파이를 쿡 찌르며 대답했다.
“네, 맞아요.”
클로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다. 아니, 까놓고 말해서 클로에에게 매력을 느끼지 못할 이성애자가 세상에 존재할지도 의문이긴 하다.
하지만, 이게 또 굉장히 복잡한 상황이다.
일이 잘못되면 나는 3개월 뒤에 헤로스에게 영혼이 팔려 그의 졸개가 된다. 클로에와 내가 깊은 관계가 된 다음, 내가 헤로스와의 계약을 무효화하는 데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클로에가 엿먹는 거다. 설사, 내가 헤로스의 노예가 된 후 시간이 충분히 흘러 클로에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어도 그 사이 클로에가 겪게 될 슬픔과 괴로움은?
원래는 겪지 않아도 될 일인데, 괜히 내가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해서 그녀에게 피해를 주는 거다.
마음이 있던 상황에서 그 상대를 잃는 것과, 연인으로 발전한 상황에서 상대를 잃는 건 상실감과 슬픔의 크기 자체가 다르다. 무책임하게 덜컥 그녀가 겪게 될 수도 있는 괴로움의 크기를 키울 수는 없다.
그러니…… 나는 내 맞은편에서 파이를 자르고 있는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혼자 파이 하나를 다 먹을 생각이야?”
내 말에 클로에가 울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럼 빨리 드시던가요.”
다소 퉁명스러운 대답을 들은 나는 웃음을 흘리며 파이 조각을 입에 넣었다. 지금 내 목에 걸려 있는 족쇄가 부서지기 전까지 클로에와의 관계는 여기에서 멈춰있어야 한다.
파이와 음료수로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거리를 돌아다니며 숙소를 찾기 시작했다.
“오래 머물 생각이지?”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볼 게 정말 많아요. 게다가, 안티온 대도서관이잖아요. 길게 머무르고 싶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 좋은 곳을 숙소로 잡아야겠는걸. 오래 머무를 생각인데 숙소가 별로면 김이 새잖아.”
푸앙트로제는 도시고, 모든 도시에는 상대적으로 부자들이 사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기 마련이다. 좋은 숙소는 당연히 부자들이 사는 곳에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부자들이 사는 곳에 마련된 숙소는 당연히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과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너무 무리하실 필요는 없어요.”
나는 그 말에 클로에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웃었다.
“무슨 소리. 여기까지 와서 돈을 아낄 수는 없잖아?”
그리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주변의 숙소를 살피는 척하며 첩보국을 통해 파악한 여관으로 향했다.
“라르도 맨션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우리가 머무르게 될 장소는 라르도 맨션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에서는 부자들을 대상으로 장사하는 고급 여관을 맨션이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숙박을 하려고 하는데, 일단은 일주일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빠르게 숙박에 필요한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요구하는 서류를 제출하고, 제시된 종이 위에 서명을 한다. 잠시 뒤, 은박을 입힌 열쇠 두 개가 우리에게 건네졌다.
“머무르시는 동안 불편함이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혹시 필요하신 물건이나, 부족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세요.”
“네, 손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말을 마친 그가 인사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다가왔다.
“짐을 건네주시면 바로 방으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뒤편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람의 안내를 받아 방으로 향했다.
“응접실과 침실, 두 개의 화장실과 욕실 하나로 구성되어 있는 방입니다.”
우리를 안내해준 사람이 그렇게 방 안의 구조를 설명해주며 커튼을 열어 햇빛을 들어오게 하고 문 옆에 섰다.
“확인해보시고, 만족스럽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혹시, 베개가 불편하시다면 방 안에 준비된 베개 이외에도 약 세 종류 정도가 더 구비되어 있으니, 말씀해주시면 됩니다.”
그 이외에도 안내를 담당하는 사람은 우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기 시작했다.
“아 참, 이 사람이 안티온 대도서관을 가 보고 싶어 하는데 따로 준비해야 할 것이 있습니까?”
내 말을 들은 안내인이 웃으며 대답했다.
“안티온 대도서관에 출입하기 위해서는 토큰이 필요합니다. 다만, 안티온 대도서관의 운영 원칙상 대중에게는 구리 토큰 이외의 토큰은 제공하고 있지 않습니다. 맨션에서는 토큰의 구매도 대행해드리고 있습니다만, 필요하시다면 구매를 도와드릴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주시면 더할 나위 없겠군요. 두 개 부탁드립니다.”
구매 대행에 필요한 돈을 지불하자, 안내인은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쉽게 구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요.”
“어디까지나 구리 토큰뿐이지만.”
내 말에 클로에가 소파에 허리를 파묻은 채 눈을 가늘게 뜨고 대답했다.
“일단, 해가 떠 있을 때는 구리 토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데까지 안티온 대도서관을 확인하고…….”
밤이 되면 빠져나와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을 쑤시고 들어갈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고용인들은 주인이 없으면 아무래도 좀 해이해지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 폴란스키가 없는 지금이 몰래 저택을 뒤질 수 있는 적기니까.”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턱을 괸 채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앞으로는 밤에 바빠지겠네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한 시간 정도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려니, 노크 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주자, 방금 전에 구리 토큰을 구해오겠다고 했던 안내인이 작은 상자를 하나 들고 서 있었다.
“주문하셨던 구리 코인입니다.”
말을 마친 안내원이 상자의 뚜껑을 열자, 붉은 광택이 도는 토큰 몇 개가 놓여 있었다.
“고생하셨네요.”
“아닙니다.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손님. 이거면 삼일 정도 안티온 대도서관 내부를 관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아, 혹시 안티온 대도서관 이외에 다른 곳도 들러보고 싶으시다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최선을 다해 아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인사를 하고 돌아갔다. 나는 클로에와 함께 토큰을 하나씩 나눠 가졌다.
“바로 가볼까.”
내 말에 클로에가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외출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안티온 대도서관의 입구 앞에 도착했다.
“여기서 보니 더 크네.”
화강암, 대리석, 편마암으로 빚어 올린 거대한 대도서관의 위용은 바로 앞에서 바라보면 그것만으로도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허언이 아니었네요.”
“뭐가?”
내 말에 클로에가 아직까지도 얼굴에 경탄의 감정을 남겨놓은 채 말을 이었다.
“언젠가, 아주 예전 일이에요. 베로나 제국의 황제 중 한 명이 안티온 대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서적을 종합해 목록화하라는 지시를 내렸죠.”
나는 그 말을 얌전히 듣고 있었다.
“그래, 꽤나 오래 걸렸겠네.”
“15년 걸렸다고 들었어요.”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클로에를 바라봤다.
“15년? 중간에 종합하던 소장목록을 누가 태워버리기라도 한 거야?”
“그럴 리가요. 그냥, 순수히 파악하고 정리하는 데 15년이 걸렸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 말에 혀를 내둘렀다. 그것만 해도 이 도서관의 규모를 알 만하다.
“안에 들어가자.”
우리는 화강암을 깎아 만들어낸 계단을 올랐다. 그 끝에는 대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는 거대한 입구가 보였다. 반짝이는 보석들이 문틀에 박혀 있었고, 그 보석들이 희미하게 빛을 뿌리며 연한 푸른색의 장벽을 입구에 만들어내고 있었다.
거대한 입구 바로 옆에는 구리로 만들어진 조각상 하나가 왼손에는 작은 박스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펼쳐 든 채 서 있었다.
챙겨온 구리 토큰과는 다르게, 세월의 풍파를 대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구리 조각상은 산화되어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사당의 커다란 돔도 산화된 구리 때문에 녹색으로 변했다고 하지. 색깔이 비슷하다.
“이 안에 넣으면 되는 겁니까?”
입구를 지키는 병사에게 물어보자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클로에는 챙겨온 구리 토큰을 꺼내 상자 안에 넣은 다음 다시 입구를 막고 있는 연청색의 장벽 앞에 섰다. 우리를 인식한 건지 곧바로 마법으로 빚어진 장벽이 사라진다. 나와 클로에는 문제없이 대도서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엄청나게 넓은 원형의 공터를 중심으로, 거대한 문이 그 원형의 벽을 따라 세워져 있다.
“구리 토큰으로 확인할 수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이라더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그 문 중 하나를 열어보았다. 곧바로 확 밀려드는 잉크와 종이의 냄새. 문 너머에 펼쳐져 있는 무수히 많은 책장과, 그 안에 잠들어 있는 서책들이 뿜어내는 지식의 향기다.
“확실히 굉장하네요. 온 보람이 있는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