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클로에는 내 옆에 바짝 붙어서 감탄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이토록 거대한데, 대도서관 안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기껏해야 100명이 안 되는 것 같네요.”
나는 클로에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가격이 꽤 나갔으니까.”
돌아다니는 사람이 적다는 건 몰래 돌아다니기에 좋다는 뜻이다.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리한 부탁일 수도 있었는데, 들어주셔서 고마워요. 사랑해요.”
“뭘, 이런 걸 가지고.”
말을 마친 우리는 부지런히 대도서관 안을 돌아다니며 지리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한참 대도서관을 돌아다니던 우리는 입구에 세워져 있던 조각상과 비슷하게 생긴 다른 조각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조각상이 구리가 아니라 청동으로 만들어져 있다는 점. 저 박스 안에 어떤 토큰을 넣어야 할지를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조각상 옆에는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자리잡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마법으로 만들어진 장벽이 그 계단을 보호하고 있다.
“청동 토큰이 있어야 아래로 내려갈 수 있고…….”
내 중얼거림에 옆에 서서 주변을 구경하는 척하던 클로에가 대답했다.
“백동 토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청동 토큰을 사용해야 하는 구역으로 먼저 향해야 하는 구조인 모양이에요.”
즉, 금 토큰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구리, 청동, 백동, 은, 금. 총 다섯 개의 토큰이 모두 필요하다는 뜻이다. 대도서관 관장의 저택에서 훔쳐내야 하는 물건이 아주 많겠는데.
“창문도 거의 없고, 오래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건물 컨디션이 좋다는 건 이럴 때 쓰는 말이겠지. 다만, 아예 방법이 없는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럼, 몰래 파고들 방법은 아예 없다는 건가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있다면야 환풍구 정도를 생각할 수 있는데.”
각 서고에는 책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마련된 환풍구가 여러 개 있다.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서고 내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한다는 건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환풍구는 사람 한 명 정도는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는 크기였다.
“그 정도는 충분히 대비해 놓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토큰이 있어야 한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다면, 아래로 내려가는데 필요한 토큰을 구하는 데 성공하면…… 우리가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토큰을 신뢰하고 있어.”
건물 안에는 경비를 서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무기를 든 경비들이 지키고 있는 건 오로지 안티온 대도서관에 들어가는 입구 앞뿐이다. 토큰이 없으면 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으니, 대도서관 내부에는 따로 경비를 두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따로 신원 확인을 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청동 토큰을 집어넣어야 하는 조각상 앞에는 아무도 없다.
“방금 전에 한 명이 청동 토큰을 넣고 아래로 내려갔는데,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어.”
아마, 아래로 내려가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토큰을 가지고 있다는 게 곧 그 사람의 신분을 증명한다.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을 터는 게 굉장히 중요한 일이 되어버렸네요.”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이니까.”
우리는 도서관 내부를 살피는 행위를 멈추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바로 엘렌과 이야기를 나눠보는 편이 좋겠어.”
저택 말고는 방법이 없다는 확신이 든 이상. 엘렌의 도움은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왔다. 따로 도청기 같은 걸 설치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이전에 도청기가 설치되었을 때 우리가 보여준 행위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나는 바로 수정구를 들고 엘렌과 연락을 취했다.
― 아아, 들려?
엘렌의 목소리를 확인한 나는 다소 반가운 어조로 대답했다.
“엘렌, 잘 지내고 있나?”
내 말에 엘렌이 바로 대답을 돌려주었다.
― 레드우드 부인이 너무 잘 챙겨줘서 살이 찔 지경이야. 아, 그리고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레드우드 부인께서는 영주로서의 업무를 훨씬 더 잘 수행하고 계셔.
나는 그 말에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걱정하지도 않았었다.
“내가 너에게 연락을 한 이유가 뭘까.”
―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후딱 떠들어봐. 듣고 있으니까.
나는 그 말에 곧장 본론으로 진입했다.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에 몰래 들어가야 해.”
뭔가를 마시고 있었는지, 후르릅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엘렌의 대답이 돌아왔다.
― 에릭 폴란스키라니. 안티온 대도서관 관장?
“그래.”
내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지만, 초장부터 힘든 걸 들고 오네.
“에릭 폴란스키는 지금 자신의 저택에 머무르고 있지 않아. 한동안 황도에 머물러야 할걸.”
그 말에 엘렌이 다소 기운이 돌아온 목소리로 대답했다.
― 그건 조금 위안이 되네.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이었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기도 해.
약간이나마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수정구 너머에서 벅벅 머리를 긁는 소리가 들렸다.
― 에릭 폴란스키가 낸 논문들을 고려해보면. 아마, 네가 뚫기는 더 쉬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그건 무슨 소리야?”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 에릭 폴란스키는 보안 마법이 다른 마법사들을 통해 파훼될 수 있다는 점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어. 그래서, 마법사들이 보안 마법이 걸려있는지 여부를 알아낼 수 없도록 하는데 많은 시간을 들였지.
“그래서, 그런 종류의 마법이 녀석의 저택에 설치되어 있을 확률이 높다는 거야?”
― 아마도. 마법사들은 자부심이 높은 족속들이야. 자기가 독창적으로 개발한 마법이 있는데, 그걸 쓰지 않고 굳이 다른 녀석들의 마법 이론을 따르지는 않을걸.
일리가 있는 말이네. 잠깐 고민하던 나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 내가 뚫기는 더 쉬울 수 있다는 건 무슨 소리야?”
― 걸려 있는 보안 마법의 마력을 감지하는 건 쉽지 않지만…… 에릭 폴란스키의 보안 마법은 반드시 마력을 모아놓을 무언가를 필요로 해.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냈다.
“눈 뜨고 잘 찾아보면 설치된 보안 마법을 먼저 찾아내서 피하거나 대비할 수 있다 그건가”
― 맞아. 하지만, 쉽지는 않을걸. 이야기 듣기로는 따로 수색 훈련을 받은 병사들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을 정도였다고 하니까. 애초에, 에릭 폴란스키가 그런 결점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랑스럽게 논문을 발표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야.
그 이후에 나는 약 1시간에 걸쳐 어떤 것들을 수상하게 여기고 피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해 들었다.
― 거듭 말하지만, 크게 봐야 해. 수상해 보이는 물건 이상으로 주의 깊게 살펴야 하는 건 수상한 배치야. 분수를 중심으로 조각상이 원형으로 늘어서 있다던가, 책장에 꽂혀 있는 책 중에서 붉은색으로 양장된 책이 오각형을 그리고 있다던가…… 하여튼, 크게 살펴보면 이상한 점들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걸 알아채고 나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경보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먼저 배치를 어그러뜨리거나, 배치된 물건을 파괴하는 것이다. 경보 마법이 발동하기 전에 먼저 경보 마법을 구성하는 요소를 파괴하는 데 성공하면 그대로 경보 마법은 무력화된다는 것이 엘렌의 설명이었다.
원래는 그런 식의 경보 마법은 파훼되면 다른 마법이 발동해서 경고를 알리는 게 보통이지만, 에릭 폴란스키는 경보 마법의 은닉성에 집중하면서 원래 경보 마법을 구성하는 몇 가지 요소들을 버렸다고 한다.
― 사실, 틀린 판단은 아니야. 결국 경보 마법을 해제하는 건 마법사들이 담당하기 마련이니까. 마법사들이 경보 마법을 찾아내지 못하도록 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결론지은 거겠지.
나는 엘렌의 이야기를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조언 고맙다. 주의하지.”
― 그래, 주의해. 레드우드 부인이 제공해주는 편의는 나도 굉장히 만족하고 있어. 그렇게 좋은 분이 슬퍼하는 모습은 별로 보고 싶지 않아.
“함께 있는 사이에 사이가 굉장히 좋아진 모양이네. 혹시 또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한 순간이 올 수도 있으니, 가능하면 수정구는 몸에서 떨어뜨리지 말고 있어.”
엘렌과의 이야기를 마친 나는 수정구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들은 이야기를 정리했다.
“제가 도울 건 없을까요?’
“너는 저택 근처에 머무르다가,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그때 움직여줘. 그 전까지는 밖에서 주변 사람들의 동태를 확인하고, 수정구를 통해 나에게 연락해.”
저택으로 가는 건 나 혼자면 된다. 두 명이 움직여봤자 들킬 확률만 높아진다. 게다가, 나는 모습을 숨길 수 있지만 클로에는 그럴 수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시야에 대한 걱정을 덜어놓고 움직이려면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건 나 혼자여야 한다.
“알겠어요. 신호는 이전처럼 피리인가요?”
“그럴 거야. 그리고, 불게 되면 사실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안 좋다는 뜻이야.”
내 말에 클로에가 고민하나 싶더니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도 대도서관의 토큰을 포기할 수는 없겠죠.”
“맞아. 피리를 불게 되면 경보 마법이고 나발이고 다 때려 부수며 무작정 대도서관 관장의 저택을 뒤져서 어떻게든 토큰을 확보한 다음,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빠져나와야 해.”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어우, 하는 소리를 냈다.
“그냥, 들키면 끝이라는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네요.”
“사실 그게 맞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들키면 다음은 없다고 보는 편이 맞다. 베로나 제국에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건 다 녹아가는 살얼음판 위에서 하키를 한판 때리는 것과 비슷한 수준이다.
“오늘 바로 하실 생각이세요?”
“가서 확인해보고, 준비가 더 필요할 것 같으면 돌아오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바로 침입할 생각이야.”
시간을 오래 끄는 건 좋지 않다. 감시의 눈이 많이 줄어들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 주변에는 정보처에서 보낸 사람들이 머무르고 있을 거다.
감시하는 눈이 있는 상황에 나와 클로에가 밤에 자리를 비운다면, 언제든지 들킬 수 있다는 뜻이다. 가능하다면 초장에 끝장을 보는 편이 좋다.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배낭을 뒤져 주머니를 몇 개 꺼내 들었다.
“그건?’
“쇠구슬.”
“다른 건 뭐예요?”
“쇠질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주머니를 열어 내용물을 보여주었다. 쇠를 동그랗게 주물해 만들어낸 구슬이 가득 들어있는 상자였다.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하셨어요?”
“도망칠 때 뿌려놓으면 잠깐이라도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내 말에 클로에가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어려워진다면 뒤로 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죠.”
“이거 도망칠 때를 대비해서 챙기는 게 아니야.”
엘렌이 말하길, 마력 반응으로는 찾아내기 힘들지만, 관찰력이 좋은 사람은 수상한 배치를 보고 경보 마법의 유무를 알아차릴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리고, 경보 마법이 반응하기 전에 내가 먼저 경보 마법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 중 하나를 파괴하면 그대로 그 경보 마법은 무효화된다는 것에 대해서도 말해주었다.
“수상한 게 보이면, 이걸 쏴붙여서 파괴하거나 위치를 바꿀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쇠구슬과 기물이 부딪치면 딱, 하고 큰 소리가 날 텐데요.”
“괜찮아. 저택 근처에 도착하면 한 2시간 정도는 근처에서 쇠구슬을 계속 던지면서 딱딱거리는 소리를 낼 테니까.”
처음 들었을 때는 수상하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상태로 두 시간 동안 딱딱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나중에는 반응하는 것도 귀찮아지겠지. 대화를 마친 나는 해가 저무는 것을 기다린 다음, 클로에와 함께 몰래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