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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04화 (204/275)

204화

서재냐, 연구실이냐, 아니면 침실이냐?

함부로 손을 댈 수가 없다. 천장을 바라보면, 문이 자리 잡은 곳 바로 앞에 약 3cm 정도의 두께를 가진 틈이 보인다. 볼 것도 없다. 방범벽이겠지. 함부로 문에 손을 가져가면 즉시 경보와 함께 저 틈에서 두꺼운 금속벽이 뚝 떨어져 문을 틀어막아 버릴 것이다.

“씨. 이건 곤란한데.”

3층의 창문 쪽에도 유사한 종류의 틈이 보인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내가 들어왔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에도 비슷한 틈이 있었던 기억이 있다.

경보가 울리면 저택의 창문이나 중요한 장소의 문은 죄다 저 격벽이 떨어져 내린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그 격벽은 절대 나무 같은 걸로 만들어져 있지 않을 거다. 굉장히 튼튼하겠지.

“하지만 정문까지 방범벽이 떨어지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 경보를 듣고 달려온 도시 치안대도 저택으로 들어갈 수 없을 테니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스스로의 머리통을 한 방 때렸다.

그럼 뭐해.

어차피 이 저택을 지키는 녀석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거다. 경보가 울리면 녀석들이 해야 할 일은 뻔하다. 유일한 출구인 정문을 지키는 거다. 어차피 쓸 수 없는 출구다. 더 심각한 문제는…….

“기회가 한 번뿐일 확률이 너무 높다는 거지.”

저 격벽이 떨어지는 조건이 뭔지 예상해보면, 추측은 어렵지 않다. 허락되지 않은 대상이 문고리를 잡으면 뚝 떨어지거나, 안에 들어가서 뭘 함부로 건드리면 뚝 떨어지거나. 하여튼 수상한 짓거리를 하면 뚝 하고 떨어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어떻게든 격벽을 때려 부수는 데 성공한다고 해도 그다음에 다른 방까지 뒤져 볼 시간은 나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을 운에 기댈 수는 없지.”

이건 문 세 개 중에 하나는 페라리가 기다리고 있고, 나머지 문 뒤 편에는 진흙탕이 기다리고 있는 TV 쇼가 아니다.

그런 건 뭐 진흙 조금 뒤집어쓰고, 놓친 페라리 아까워하면 끝이지만 이건 선택을 잘못하면 진흙이 아니라 내 피를 뒤집어쓴 채 끝장난 목숨을 아까워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이다.

일을 확실히 처리할 방법이 필요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으음.”

그 와중에 삐걱이면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나는 벽에 붙은 채 숨을 죽였다. 하녀가 졸린 눈을 손으로 벅벅 비비며 걸어가고 있었다. 뭐, 물이라도 한 잔 마시려는 건가?

“으하암. 목말라.”

하녀가 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붙박이 당번? 시중을 들어야 할 집주인이 없는데 당번으로 밤을 새우는 하녀가 있다니. 나는 내 옆을 지나가는 하녀를 살폈다.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인다. 내 머릿속에 빠르게 이런저런 생각들이 조립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밤을 새우고 나면 다음 날 아침부터 다른 하녀들이 일과를 보내는 동안 방에 박혀서 잘 것이다.

집주인이 없는 동안 당번을 서는 하녀는 오늘도 편하게 밤을 보내고, 내일 해가 떠도 편할 것이다. 전문 용어로 표현하자면 꿀을 빤다고 하지.

그리고, 이런 종류의 꿀을 빨 수 있는 사람들은 한정되어있다.

하녀 일을 오래 해서 제법 관록이 붙은 하녀가 아니라면 이런 종류의 꿀은 빨고 싶어도 빨 수가 없다. 따라서, 지금 내 옆을 지나가는 하녀는 이 저택에서 일을 오래 한 하녀다.

저택에서 일을 오래 했다면 신뢰할 수 있는 하녀라는 뜻이지. 그 말인즉슨, 에릭 폴란스키를 직접 시중든 적도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면…… 나는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하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저 여자가 다시 붙박이 하녀가 대기하는 방으로 들어갈 때 함께 들어간 다음, 추궁하면 필요한 답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어차피 붙박이 하녀는 혼자 대기 중일 테니 원하는 답을 얻어내지 못해도 기절시키면 내일 해가 밝기 전까지는 내 안전도 보장된다.

만약에 저 여자가 에릭 폴란스키가 토큰을 어디에 보관하는지 알고 있다면.

“시도해 볼 가치도 충분하고, 리스크도 높지 않아.”

결론을 내린 나는 하녀가 돌아오는 걸 기다렸다. 물론, 그러는 동안에도 고민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토큰이 있는 위치를 알아낸다고 해도, 격벽이 내려가는 건 피할 수 없다.

“그건 처리할 수 있어.”

문제는, 우리에게 감시하는 눈이 붙어 있다는 점이다.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이 털리게 되면 도시의 경비대가 바쁘게 움직일 것이고.

정보처 요원들은 당연히 우리가 맨션 안에 있는지 여부를 확인할 거다. 당연히 거기에 우리가 있을 리 없다. 클로에는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 주변에서 대기 중이고, 나는 지금 여기에 있으니까.

“무조건 들켜.”

하녀를 제압해서 토큰의 위치를 알아내고, 토큰을 훔치는 데 성공하면 우리는 내일 해가 밝기 전에 안티온 대도서관을 털어내야 한다. 사실, 토큰이 있으니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제국이 본격적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점이 진짜 문제지.”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필요한 자료를 찾아낸 다음 탈출하는 즉시 우리는 제국과 신나는 추격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그 와중에 우리의 변장은 들킬 수밖에 없고, 나와 클로에의 정체가 밝혀지면 자기 딸의 안식예배를 위해 삼 일을 투자하는 이 나라의 황제가 우리를 추격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을 동원할지 감도 안 잡힌다.

그래도 완전히 비극적인 상황은 아니다.

황도가 아니고, 제국의 주요 인물들은 지금 전부 올리비에의 안식예배에 참석 중일 테니 모리스 핀들턴급의 실력자들이 우리를 추격하지 않을 테니까.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가능성은 충분해.”

실행해야 한다. 어차피 이 일을 나중으로 미뤄 다시 이 저택을 찾아온다고 해도 나는 세 개의 문이라는 선택지 앞에서 다시 멈춰야 할 테니까.

하녀는 손에 레모네이드를 한 잔 든 채 계단을 다시 올라와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한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하녀가 대기실의 문을 열었다.

“으읍?!”

나는 곧바로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함께 대기실 안으로 몸을 던졌다. 곧바로 문을 닫고 나는 하녀를 보며 말했다.

“안녕.”

내 목소리에 하녀는 별다른 대답도 하지 못하고 몸을 덜덜 떨며 자신의 입을 막은 내 팔을 꽉 붙잡는다. 나는 검을 뽑아서 그녀의 목을 겨누었다.

“당황하지 말고, 잠깐 오붓하게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내 마음 이해하지?”

목에 칼이 닿은 하녀는 눈물을 흘리며 나를 바라봤다. 칼날로 목을 살짝 건드리자 검을 타고 피가 약간 흘러내린다.

“쉬이. 알았지? 큰 소리를 내면 나는 엄청 슬퍼질 거야. 슬퍼진 나는 지금처럼 신사적으로 아가씨를 대우할 용기가 없어. 아마, 억지로 조용하게 만들어야겠지.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 말에 하녀가 입이 틀어막힌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천천히 그녀의 입을 막고 있던 손을 놓았다.

“누…… 누구세요.”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뒤로 슬금슬금 돌아가던 그녀의 오른손을 꽉 잡았다.

“줄을 당길 생각은 하지 마.”

마찬가지로 왼손도 꽉 잡은 나는 하녀를 보며 웃었다. 어차피 후드로 가려져서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입에 떠오른 웃음 정도는 보이겠지.

“뭘, 뭘 하실 생각이에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에릭 폴란스키가 가지고 있는 안티온 대도서관의 토큰이 필요한데. 그게 어디에 있을까?”

내 말에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걸, 왜 저한테…….”

나는 그 말에 간단하게 대답했다.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모르나?”

내 말에 하녀가 여전히 몸을 떨며 대답했다.

“저는, 저는 그런 거 몰라요.”

“이 상황에서 하는 거짓말은 수명을 줄일 텐데.”

내 말에 하녀가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지금이라도 그냥 돌아가신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게요.”

나는 그 말에 깔끔한 대답을 돌려주었다.

“네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나는 그냥 3층에 있는 아무 문이나 열어버릴 거야. 경보가 울리겠지. 나는 이 저택을 지키는 자들과 도시의 경비대에 의해 구속될 테고.”

내 말에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히죽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너와 접촉한 사실을 알릴 거야. 네 도움을 받아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말할 생각이고.”

내 말에 하녀의 표정이 확 변했다.

“그게…… 무슨.”

“같이 죽자는 거지. 어때. 내가 그런 말을 하면 경비대 사람들은 너도 잡아가서 조사하겠지. 물론, 그 친구들이 지금처럼 상냥하고 자상하게 질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마.”

내 말을 듣고 있던 하녀의 표정이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지하 감옥에 대해 아는 거 있어? 대도서관 관장의 저택에 침입하려던 괴한을 도운 하녀 정도면 거기로 끌려갈 만한 중죄라고 생각하는데. 전부 흉악범들뿐이겠지. 몇 년 동안 여자 구경은 하지도 못했을 거야.”

나는 하녀의 뺨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거기에 귀족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가 함께 갇히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나는 너무 끔찍해서 더 이상 상상할 엄두가 나지 않는데.”

내 말을 듣고 있던 하녀가 떨리는 입술로 대답했다.

“응접실…… 응접실에 있어요.”

나는 그 말에 약간 놀랐다. 응접실이라니.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선택지 세 개가 설마 다 진흙 구덩이일 줄은 몰랐는데.

“확실해?”

내 말에 하녀가 덜덜 떠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가끔, 주인님께 손님이 방문할 때가 있어요. 안티온 대도서관에 입장하기 위한 토큰이 필요해서 찾아오시는 손님들이죠.”

나는 그 말에 크으, 하는 소리를 냈다. 그래, 응접실 쪽이 더 설득력이 있네. 대도서관 관장이라면 자기가 사용할 토큰 정도는 대도서관 안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거다. 저택에 토큰을 보관하고 있다면 그건 자신이 쓰기 위해서 필요한 게 아니라 남에게 건네주기 위한 용도겠지.

“얼마 전에 죽은 녀석이 이 광경을 봤다면 상당히 한심하다는 표정을 짓겠는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하녀를 바라봤다.

“제발, 제가 알고 있는 건 다 말씀드렸어요. 그러니…….”

나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하녀의 목을 팔뚝으로 휘감고 힘을 꽉 주었다. 잠깐 끄어, 하는 소리를 내며 버둥거리던 하녀의 몸이 축 늘어진다. 기절한 거다. 한 5분 정도 지나면 깨어나겠지.

일을 마친 다음, 나는 방을 나왔다.

“응접실이라.”

거기에 대도서관의 토큰이 보관되어 있다면, 서재나 연구실과 마찬가지로 격벽이 내려오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응접실 앞에 선 나는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허리에 차고 있던 검집을 풀었다.

문을 열었을 때 격벽이 떨어지려고 한다면 곧바로 분신을 만들어 떨어지는 격벽을 잠깐 막고, 그 사이 이 칼집을 떨어지는 격벽 아래에 세워둘 거다. 격벽이 창문을 막지 못하게 한 다음 빠르게 응접실을 뒤져 토큰을 확보하고, 창문을 통해 빠져나가면 된다.

그냥 저택 벽을 때려 부수는 선택지도 있긴 하다. 하지만 저택에 내구도 관련 마법이 걸려 있을 수도 있고, 그게 아니라도 벽을 때려 부수는 일은 꽤나 지친다. 여기에서 바로 안티온 대도서관으로 달릴 계획인 내 입장에서는 최대한 힘을 아끼는 게 좋다.

“그럼. 실례합니다.”

나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곧바로 창문 쪽에 분신을 만들었다. 하지만, 격벽은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문을 닫았다.

“이거, 토큰이 담긴 상자를 건드리면 백 퍼센트 발동하는 거겠군.”

이러면 조금 여유를 가질 수 있지. 나는 곧장 창문으로 다가갔다. 양쪽을 당겨서 여는 창문이다. 이러면…… 나는 창문을 열어젖힌 다음, 격벽이 떨어지는 위치에 칼집을 세워두었다.

“어디 보자.”

방안을 살피며 차고 있는 브레이서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응접실의 서랍을 열자, 거기에는 ‘개봉 금지.’라고 적힌 상자가 하나 있었다. 시가 보관함처럼 생긴 녀석이었다. 그 상자 위에는 안티온 대도서관의 조각상에서 볼 수 있었던 상자와 두루마리가 그려진 문양이 박혀 있었다.

“이걸 이렇게 대놓고 보관한다는 건.”

일단 이 상자를 건드리면 어떤 종류의 마법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창문과 문에 설치된 격벽도 아래로 떨어져 내릴 거다. 아마, 확실하다. 이건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하겠는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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