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화
나는 수정구를 들고 엘렌에게 연락했다.
“상자를 하나 발견했는데, 마법이 걸려 있을 것 같아. 브레이서가 있긴 한데…… 안전할까?”
― 안전할 거야. 도난 방지를 위해 걸어놓는 마법은 훔치려는 상대를 무력화시키는 종류만 가능하지, 죽이는 종류의 설치는 금지되어 있어. 법적으로 문제가 생길 뿐 아니라, 마법사로서의 명예도 실추될걸.
안티온 대도서관의 관장 정도라면 명예 실추가 더 큰 걱정이겠지. 기절하는 정도라면 브레이서가 충분히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브레이서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그 상자를 꽉 잡았다.
“크아, 짜릿하네.”
곧바로 창백한 스파크가 파파파팍 하는 소리를 내며 내 몸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만졌으면 기절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브레이서의 보호를 받는 지금은 몸이 저릿거리는 정도다. 곧바로 저택 안에 미친 듯이 경보음이 울리고, 쿠쿠쿵 하는 소리와 함께 격벽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 몸을 튀겨버릴 기세로 날뛰는 스파크를 참으며, 나는 상자를 열고 주머니 안으로 토큰을 전부 쓸어 넣었다. 다섯 개 모두 있다. 해야 할 일을 마친 나는 떨어지는 격벽을 억지로 막아내고 있는 검집을 바라봤다.
“젠장, 얼마 못 버티겠는데.”
딱 봐도 상태가 안 좋다. 언제 박살 나도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검집이 비명을 지를 수 있다면, 아마 지금 저택에 울려 퍼지는 경보음도 이겨 먹을 정도로 큰 비명을 지르고 있지 않을까.
나는 곧장 창문을 향해 몸을 던졌다. 저택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격벽의 추락을 버티던 검집은 내가 빠져나오는 데 성공하자마자 그대로 박살 나버렸다. 창문을 막은 격벽 위에는 짙은 푸른색의 문양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역시, 마법을 걸어놓은 격벽이었군. 갇혀버렸으면 일이 단단히 꼬일 뻔했어.
“창문이 박살 나는 소리는 안 들렸을 테니.”
녀석들은 내가 아직 저택 안에 있다고 생각할 확률이 높다. 나는 은신을 유지한 채 정원을 달려, 경보 마법을 무력화시켜놓은 벽 위를 뛰어넘어 저택을 벗어나 클로에가 기다리는 장소로 향했다.
“무슨, 무슨 일을 하신 거예요? 저택이 난리가 났던데.”
나는 물병을 꺼내 쭉 들이킨 다음 토큰을 쓸어 넣은 주머니 속을 클로에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하녀를 협박하고 응접실에서 뭘 좀 훔쳤는데,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야.”
내용물을 확인한 클로에가 자기 뒤통수를 긁다가 대답했다.
“이러면 바로 안티온 대도서관 행이군요.”
“눈치도 빠르네. 알아들었으면 후딱 움직이자. 아직 녀석들은 내가 저 저택 안에 있는 줄 알 거야.”
하지만 응접실에 도착해서 격벽은 내려져 있지만 열려있는 창문과,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러진 칼집을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대충 상황을 눈치채겠지. 그 전에 우리는 안티온 대도서관으로 냅다 뛰어야 한다.
우리는 곧바로 지붕 위를 달려 안티온 대도서관이 자리 잡은 장소에 도착했다. 낮에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입구를 지키는 병사들이 보인다. 우리는 태연한 표정을 한 채 그들에게 다가갔다.
당연하다는 듯이, 녀석들은 우리의 신원을 확인하지 않았다. 녀석들이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는 건 딱 하나였다.
대도서관에 입장하기 위해 필요한 토큰이 있는가 없는가.
“고생하시네요.”
간단하게 인사를 한 나는 조각상이 들고 있는 상자 안으로 구리 토큰을 집어넣었다. 입구를 막고 있던 마법 장벽이 흐려지고, 나와 클로에는 별문제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바로 내려가야 해요.”
“그래, 최소한 은 토큰을 사용해야 하는 장소까지 내려가면 이 안에서 위협받을 일은 없을 거야.”
에릭의 저택 안에 보관되고 있던 토큰은 내가 죄다 쓸어왔다. 뭐 청동이나 백동 토큰 같은 건 주변을 뒤져서 쉽게 협조를 구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은 토큰까지 단계가 내려가게 되면 녀석들도 구하는 데 한계가 있겠지. 우리는 그대로 쭉쭉 안티온 대도서관의 제일 깊은 곳, 금 토큰을 사용해야 진입할 수 있는 장소까지 밀고 들어갈 거다.
“대도서관에 무사히 들어오는 데 성공한 건 다행이지만, 탈출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탈출 계획이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입맛을 다셨다.
“금 토큰을 사용해 아래로 내려간 다음에는 다시 올라와야 하는데.”
“그때쯤 되면 우리를 찾고 싶어서 안달 난 친구들이 백동이나 청동 구역에 쫙 깔려있을 거예요.”
목적을 달성하고 다시 올라가게 된다면 그 과정에서 싸움은 피할 수 없다.
“왜, 못 이길 것 같아?”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설마요. 제국에서 이름 날리는 실력자들은 지금 죄다 올리비에 황녀의 안식예배에 참석한 상황이잖아요? 정보처의 요원은 무력보다는 다른 종류의 재능을 더 중시하는 편이고.”
여기를 벗어나는 건 문제가 아니다. 쌈박질을 할 생각이 없었을 뿐이지, 마음먹고 하게 된다면 우리가 여기를 벗어나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들킨다는 게 문제죠. 제 능력과 마틴 님의 능력은 제국에도 잘 알려져 있잖아요.”
“어차피 안티온 대도서관을 들렀다가 나오면 들키게 되어있었어.”
들키는 시점이 약간 앞당겨진 것뿐이다. 내 대답을 들은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이고 허리춤에 찬 레이피어의 손잡이를 한 번 쓰다듬는다.
“제국에 올 때부터 힘든 상황이 발생할 거라 생각하긴 했죠. 오히려 좀 늦게 시작된 감이 있어요.”
“그러게.”
계속해서 우리는 아래로 내려갔다. 청동 토큰 다음은 백동 토큰. 백동 토큰을 넣고 나면 은 토큰. 마지막으로 금 토큰까지. 그렇게 도달한 안티온 대도서관의 최심부.
“서고는 별로 없네.”
금 토큰을 사용해서 진입한 공간에 마련된 서고는 딱 세 개였다. 문을 열어보니, 규모도 이전의 서고와 달리 그렇게 크지 않다.
“여기에 보관할 정도로 가치 있는 서적이 세상에 그렇게 많지는 않을 테니까요.”
“잠깐만, 저건 뭐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반대편 공간 끝에 자리 잡은 조각상 쪽으로 다가갔다. 이전까지의 조각상과는 그 생김새가 다르다. 커다란 권좌가 놓여있었고, 그 권좌 왼편에는 하도 오래돼서 벌레가 먹은 흔적까지 남아있는 문 하나가 떡하니 서 있었다.
권좌에 앉은 남자 조각상의 모습이 들어온다. 철을 주물로 만들어낸 조각상이다. 그 권좌 오른쪽에는 커다란 호리병 하나가 기대져 있다. 저 호리병은 알고 있다.
“카루토스 타카운.”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는 것 같아요. 저 호리병은 까먹을 수 없죠.”
무수한 무기로 변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던 호리병이다. 이게 조각되어있다는 것만으로 이 권좌에 앉은 조각상의 정체는 바로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조각상은 앞으로 손을 내밀고 있었다. 마치, 그 위에 뭔가를 올려놓으라는 것처럼.
그리고, 권좌 위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 문은 지배자의 피를 통해서 열린다.]
나는 그 문구를 한 번 확인하고 나서 검을 뽑아 들고는, 곧장 문을 향해 휘둘렀다. 문을 후려친 검은 두웅,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그대로 튕겨 나갔다. 그 반탄력이 얼마나 강한지, 손목이 욱신거릴 정도다.
“이거, 그냥 열릴 것 같지는 않은데.”
나는 욱신거리는 손목을 주무르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배자의 피라면. 뭘 말하는 걸까요. 카루토스 타카운 자신의 피를 달라는 걸까요?”
나는 그 말에 고개를 저었다.
“문 근처를 살펴봐.”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고, 심지어 깔개까지 깔려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누군가 사용했다는 뜻이다. 카루토스 타카운은 우리 손에 죽었다. 녀석의 피를 구할 수 있는 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 여기를 들락날락했다는 건, 필요한 게 카루토스 타카운의 피가 아니라는 뜻이다.
“베로나 제국 황족의 피.”
내 말에 클로에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와서? 황족의 피를 어디에서 구할 수 있겠어요. 구하려면 꼼짝없이 제국의 황도까지 가야 하는데…….”
나는 그 말에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대답했다.
“피라면 있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이젠 완전히 갈색으로 말라붙은 손수건을 꺼냈다. 올리비에가 나에게 던져주고 꺼지라고 했던 패배 기념 손수건이다.
“그 여자.”
내가 여기에 도착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이 손수건은 여기에 도착해서 사용하라고 건네준 모양이다.
“오래 살다 보니, 죽어서 흙 속에 파묻혀 썩어가는 여자한테 도움을 다 받는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말라붙은 피가 남아있는 손수건을 조각상의 손 위에 올렸다. 곧바로, 조각상의 손이 위에 올려진 손수건을 꽉 움켜줬다.
“괜찮을까요?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피인데.”
“괜찮고말고.”
이게 신선한 피가 아닐 때는 통하지 않는 물건이었다면, 올리비에가 나에게 이 손수건을 주었을 리가 없다. 조각상은 그그극, 하는 소리를 내며 손을 움직여 쥐고 있는 손수건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조각상의 바로 옆에서 힘겹게 삐걱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정말이네요.”
“올리비에, 그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히죽 웃었다. 그 재수 없는 면상이 나를 향해 슬며시 비웃음을 띄우는 꼴이 선명하게 떠오를 지경이다. 오냐, 이 일은 감사 인사를 해야겠지. 나중에 성묘 한 번은 꼭 가주마.
“올리비에 황녀가 이 문을 열게 해주기 위해 손수건을 남겼다면…….”
그때, 조각상이 입에 물고 있던 손수건이 나를 향해 나풀나풀 떨어진다. 나는 손수건을 받아 주머니에 넣으며 클로에의 말에 대답했다.
“여기에 있다는 거지.”
헤로스와의 계약을 무효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저 문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다.
“저 안에 있는 게 뭐 겁나 야한 소설 이런 거면 개짜증날 것 같은데.”
긴장을 덜어내기 위해 던진 시답지 않은 농담에 클로에가 고맙게도 대답을 돌려준다.
“그 야한 소설을 태워버릴 때 사용할 촛불은 제가 밝히게 해주세요.”
황족의 피를 요구한 서고 안은 어둡고, 건조하고, 시원했다. 계속해서 서고 내부를 순환하는 바람이 느껴진다. 근처를 더듬거리던 나는 옆에 놓여있는 램프를 발견하고 불을 붙였다.
“딱 여덟 권이네요.”
이 서고 안에 존재하는 책은 여덟 권이 전부였다. 사실, 이건 권이라는 단위로 새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 않을까 싶은 것들뿐이었다. 차라리 여덟 개, 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대나무에 글을 새겨서 말아놓은 죽간, 끌과 정으로 새겨놓은 글이 남아있는 점토판. 단단하고 커다란 돌 위에 빼곡하게 문자를 새겨넣은 비석 따위다.
이 서고 안에 들어있는 소위 ‘책’이라고 불리는 녀석들은 전부 이런 형태였다. 그것만으로도 이 안에 잠들어 있는 책들이 얼마만큼의 세월을 견디며 이 안에 머무르고 있었는지 어렴풋이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종이나 양피지 같은 게 벌써 수천 년 전에 발명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는 말은, 이 책들은 수천 년보다 더 오래전의 유물이라는 거다. 설사, 이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 접시를 깨끗하게 닦는 노하우 같은 시시콜콜한 내용이라 해도, 수천 년 전의 물건이라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고고학자들이 눈깔을 까뒤집고 달려들 만한 가치가 있겠지.
하지만, 우리에게 중요한 건 결국 그 내용이다.
“해석할 수 있을까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해석할 수 없는 종류의 책들은 모두 후보에서 제외시키면 된다.”
올리비에는 죽기 전에 내가 이걸 필요로 하게 될 것이라는 것조차 예상한 여자다. 설마하니 언어 장벽에 부딪힐 것이라는 걸 예상하지 못했을까.
내 말에 클로에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찾아보죠.”
말을 마친 우리는 천천히 이 서고 안에 잠들어 있던 것들을 살펴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