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클로에가 나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업을게요. 브레이서로 보호해주세요.”
“그래, 그편이 좋겠네.”
여기에서 힘을 쏟아 낼 수는 없다. 지금 우리 앞에 자리 잡은 병사들은 많아봤자 수백 정도지만, 제국이 우리에게 시선을 향한 이상 앞으로 상대해야 하는 숫자는 적게는 수천, 많게는 수만에 달할 것이다. 여기에서 쓸데없이 싸우며 시간을 끌 수는 없다.
“가자.”
나는 군말 없이 클로에의 등에 업혔다. 그녀의 양다리에서 작게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나와 클로에는 곧장 대기권도 뚫어버릴 기세로 하늘로 뛰어올랐다.
“젠장, 사격!”
화살과 석궁 볼트가 우리가 날아오른 하늘을 향해 발사되었다. 나는 브레이서에 마력을 불어넣었고, 우리는 노리고 벌떼처럼 날아들던 모든 것들이 브레이서가 만들어낸 보호막에 부딪히고, 그대로 힘을 잃고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한다.
“빠르게 움직일게요.”
후우우우우우, 하는 바람 가르는 소리와 함께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하던 클로에는 땅에 닿는 순간 양발을 크게 굴렀다.
콰쾅, 하는 대포 터지는 소리 비슷한 게 밤공기를 후려친다. 나를 등에 업은 클로에의 몸이 투카카카카칵, 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쏘아져 나간다.
“굉장한데.”
한 번 발을 구르면, 수백 미터 정도의 거리를 쏘아져 나간다. 이 정도 속도라면 순식간에 푸앙트로제 외곽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저기, 저기다!”
저 멀리 보이는 푸앙트로제의 성벽 위에는 횃불이 밝혀져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확인한 병사들이 연신 우리의 위치를 큰 목소리로 알리기 시작한다.
“상가 제3골목…… 아니, 제5골목!”
“벌써 지났어, 주거 단지 외곽이다. 아니, 성벽까지 얼마 남지 않았어!”
녀석들이 뭐라고 말을 이어가기가 무섭게 돌진하는 클로에.
“마력은 얼마나 쓰고 있어?”
내 말에 클로에가 대답했다.
“육체 강화에만 사용하고 있어요. 나머지는 신발로 해결하는 중이에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다. 그 와중에, 성벽이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하나, 둘……!”
클로에는 허공으로 한 번 높게 뛰어올랐다가 아래로 떨어지며 발을 한 번 굴렀다. 팡, 하는 소리와 함께 우리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발아래로 푸앙트로제의 성벽이 보인다. 그리고, 그 성벽 위에서 멍한 표정으로 횃불을 들고 우리는 바라보는 병사들의 얼굴도 보인다.
도움닫기로 성벽을 넘었다고 하면 믿을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클로에는 도움닫기에서 이어지는 점프로 성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허공에서 다시 한번 찰칵, 하는 소리가 들린다. 신발의 기능을 끈 거다.
착지하자, 클로에의 양다리가 대지를 긁어내린다. 마치, 거대한 쟁기로 땅을 갈아버린 것 같은 흔적과 함께 우리는 착지에 성공했다.
“멀지 않은 거리에 어촌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첩보국의 은신처가 있어.”
“네, 알고 있어요. 피셰르라는 이름의 어촌이죠.”
아까처럼 쿵쿵거리면서 돌아다니면 발자국이 너무 깊게 남는다. 안 그래도 뒤편에 남아있는 땅이 갈아엎어진 흔적 때문에 우리가 착지한 자리를 쉽게 알아챌 수 있을 텐데, 또 아까처럼 퉁퉁 튀어 오르면서 움직이는 건 적이 우리의 위치를 너무 쉽게 특정하게 해줄 거다.
“이제부터는 조심해서 움직이자고.”
쉽게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제국군이 병신이라는 뜻은 아니다.
“벌써……?”
클로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저 멀리에 희미하게 반짝이는 불빛들을 가리켰다. 그 불빛들의 정체는 횃불이었고, 그 횃불들을 쭉 이어보면 하나의 선이 그려진다.
“일부러 저렇게 눈에 띄도록 해둔 거겠지.”
이미 이 근방에는 저 횃불 말고도 모습을 숨긴 채 우리를 기다리는 포위망이 있을 거다.
“에릭 폴란스키의 저택에 침입자가 있다는 소식이 들리자마자 움직였을 거야.”
나는 저 멀리 아른거리는 불빛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저 녀석들에게 걸리면 귀찮아진다.”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게 뭔지 알고 있어요. 긴 선을 그리듯이 병력들을 배치한 다음 목표 대상이 통과하는지 여부를 감시하다가, 목표를 확인하면 그 즉시 상부에 보고하고 그 일대를 원형으로 포위하는 거예요.”
그 이후, 우리가 지나간 지역 일대를 그대로 둥글게 포위한 다음, 정예 병력을 포위한 지역 안에 듬뿍 때려 넣어 대상을 격멸하는 거다.
더 짧은 단어로 표현하자면, 차단선과 봉쇄선이다.
“안 들키는 게 제일 중요해. 병력 배치가 저렇게 되어있다는 건, 어지간한 도로에는 전부 병력이 깔려있다고 봐야겠지.”
“그건 산이나 강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우리가 먼저 숨어있는 녀석들의 위치를 알아내야 한다. 이런 작전은 차단선에서 봉쇄선으로 넘어가는 순간 일이 확 꼬이기 마련이니까.
“발견되어도, 발견된 건지 모른다는 점이 제일 어렵죠.”
“자세히 말해봐.”
내 말에 클로에가 설명을 이어갔다.
현대와는 다르게, 이 세상에는 총이 없다. 적을 발견해서 공격하려면 검을 뽑아 들고 달려들거나, 파놓은 호에서 나와 활을 당겨야 한다. 굉장히 비효율적이다.
고로, 땅을 파고 들어가 모습을 숨긴 채 주변을 경계하는 병력들은 우리를 발견해도 꿈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조용히 아군에게 우리가 지나갔다는 보고를 한다. 그러면, 그 즉시 그 일대의 병력들이 움직여 우리가 지나간 지역 일대를 싹 포위해버린다. 이후, 순차적으로 다른 지역을 감시하던 병력들도 이동해 그 포위를 더욱 촘촘하게 만들고, 서서히 죄어온다.
따라서, 우리가 적에게 발견되었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은 수천에서 수만에 이르는 병사들이 우리가 있는 지역을 완전히 감싸는 데 성공한 이후다.
“우리도 결국 지칠 거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주변을 살폈다.
“근처에 크지는 않지만, 여기는 아마그리라고 불리는 숲의 초입일 거예요.”
“그래, 모습을 숨길 수 있다는 점은 다행이네.”
지금부터는 은신처에 도착하기 전까지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 그 와중에, 수정구가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한다. 연락이 온 모양이다.
― 아아, 들리나?
“첩보국장님.”
엘렌이 받을 줄 알았는데, 연락을 받은 건 뜻밖에도 알버트였다.
― 보고를 들었거든. 현재 푸앙트로제 일대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지. 누군가가 안티온 대도서관에 침투했다고 하던데.
“아, 큰일이네요. 제국에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습니다.”
내 말에 알버트가 낮게 웃음을 흘렸다.
― 필요한 건 얻었나?
“네, 얻기는 했지만 제가 해석할 수 없는 종류의 문자라서, 엘렌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알버트가 저런, 하는 소리를 냈다.
― 푸앙트로제 근처의 어촌에 첩보국의 은신처가 있어. 도착하면 거기에 있는 요원에게 내용을 필사해서 넘겨주게. 건네받으면 우리가 엘렌 리버플로우 양에게 해당 서류를 전달해주도록 하지.
“그럴 계획이었습니다. 아, 그리고 기왕에 들어간 김이라고 작은 선물도 하나 준비했습니다.”
― 선물이라. 안티온 대도서관에서 산 기념품인가?
기념품 같은 게 아니야. 그것보다 훨씬 좋은 거지.
“베로나 제국 황궁 건설 당시의 작업일지입니다. 청사진도 첨부되어 있더군요. 유용하게 쓸 곳이 있지 않을까 싶어 슬쩍했습니다.”
겸사겸사, 녀석들에게 우리의 의도도 착각하게 만들고. 내 대답이 끝나자, 수정구 너머에 침묵이 자리 잡았다.
“혹시, 이미 집에 있는 겁니까?”
내 말에 알버트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 그럴 리가 있나. 전혀 생각도 하지 못한 물건이라서 놀랐을 뿐이야. 기대되는군.
“그래서, 저에게 연락한 이유가 뭔지 궁금한데요.”
내 말에 알버트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현재 푸앙트로제 일대에 투입된 병력은 약 삼천오백으로 파악되고 있네. 시간이 지나면 분명히 그 일대의 병력들이 추가 증원되겠지.”
― 증원에는 얼마나 걸릴 것 같습니까?
“이틀이 넘지는 않을 거야. 시간을 오래 끌면 점점 상황이 불리해질 거야. 현 상황에 대한 보고는 이미 군용 연락망을 통해 베로나 제국의 황제에게도 전달되었다고 추측할 수 있어. 내가 틀리지 않았다면…….”
알버트는 일주일이라는 예상을 내놓았다.
― 올리비에 황녀의 안식예배를 노려 안티온 대도서관을 노린 건 대담하고 효과적인 수법이었지만, 반대로 말하면, 황궁이 자네들이 안티온 대도서관을 습격했다는 사실을 안 지금에 와서는 독으로 작용할 거야.
안식예배에는 제국의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모두 참석했다. 따라서, 우리에 대한 소식을 황궁에서 듣게 되면 그 사람들 중 대다수가 푸앙트로제 일대로 한 방에 쏟아져 들어온다.
각자 다른 곳에서 평시 업무를 보고 있었다면 푸앙트로제로 향하게 된다 해도 도착 시간이 각자 달랐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 일주일이네. 그전에는 무조건 어촌에 자리 잡은 첩보국의 은신처에 도착하도록. 첩보국에서는 도착 이후 자네들의 탈출 계획을 준비할 예정이지만, 일주일이 초과되면 사실상 두 사람의 탈출은 절망적인 수준까지 성공 확률이 떨어질 거야.
첩보국의 은신처까지 도착하는 건 전적으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훔친 책 때문에 제국에서 잘못된 판단을 내릴 가능성이 큽니다.”
알버트가 내 말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대답했다.
― 그래, 도서관에서 분실된 서적을 고려해보면, 황궁의 경계 수준도 더욱 올라가겠지. 아마, 황녀의 안식예배에 참석했던 자들 중 상당수는 상황이 종료되기 전까지 궁 근처에 머무를 거야. 그렇다고 해도 자네들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건 변하지 않네. 수정구를 통해 연락이 오면 가능하면 반드시 받도록 하게. 변동 사항이나, 참고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연락할 테니. 마찬가지로, 보고해야 할 사항이 있다면 꼭 연락하도록.
그걸로 알버트와의 연락은 끝났다.
“일주일이라. 어촌까지의 거리는 평시 여행이라면 느려도 이틀 안에는 도착하겠지만.”
“지금은 평시 여행이 아니지.”
제국에서 눈에 불을 켜고 우리를 찾고 있는 지금 상황에서는 얼마나 시간을 잡아먹을지 아무도 모른다.
“해보자고, 어차피 그거 말고는 방법이 없잖아.”
애초부터 안티온 대도서관을 턴 이후에는 이런 상황이 닥쳐온다고 모두가 예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알버트도 우리에게 연락을 한 거다.
“아마그리 숲을 통과하고 나면 강이 하나 나올 거에요.”
다리를 놓아야 할 정도로 제법 큰 강인 모양이다. 강 하류에는 마을이 하나 있지만, 우리가 통과하게 될 장소는 그 강의 상류다.
숲에서 강으로, 그리고 그 강을 넘게 되면 자리 잡은 건 약 340m 정도의 높이를 가지고 있는 언덕이다. 그 언덕의 정상에 올라서면 바로 보이는 마을이 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목적지로 정한 어촌이다.
“이동하자.”
내 말에 클로에가 손에 나침반을 쥔 채 고개를 끄덕였다. 낮에는 숲속에 몸을 숨기고 움직인다고 해도 쉽게 들킬 가능성이 있다. 함부로 움직일 수 없다. 우리를 찾고 있는 눈동자의 개수는 어마어마하다.
“숲에서 밤이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 버텨야 할 거야.”
밤에 움직이고 낮에는 쉬어야 한다. 경계를 서는 병력들도 낮보다는 밤에 더 경계의 눈을 크게 뜨겠지만, 숲속에 내려앉는 어둠은 제아무리 사람이 경계의 눈초리를 강하게 해도 극복할 수 없으니까.
우리는 도로를 벗어나 땅에 바짝 엎드린 채 천천히 첫 번째 목표로 정해둔 숲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