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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11화 (211/275)

211화

배를 타고 바다로 나온 지 3주가 지났다. 우리는 테네스 공국의 대형 상선으로 옮겨 타는 데 성공했다. 갑판 위에서, 나는 클로에와 함께 수정구를 통해 세자와 교신 중이었다.

바다에는 첩보국 요원들이 사용하는 수정구 같은 게 없기 때문에, 이 지점에서 더 나아가면 왕도에 있는 세자와는 한동안 교신이 불가능해진다. 그렇기에 취한 연락이었다.

― 베로나 제국의 두령이 아직까지도 미쳐 날뛰고 있다더군.

황녀는 황년이라고 하더니, 황제는 두령이라고 부르는 거냐. 누가 들으면 산적 집단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 당시 작전을 지휘하던 지휘관은 쫓겨난 모양이야.

“불쌍하군요. 잘못이라고는 시키는 데로 병신짓 하다가 실패한 것뿐인데.”

― 윗사람이 개판이면 아랫사람이 피를 보는 법이지.

하지만, 베로나 제국의 황제라고 해도 지금 상황에서 나를 어떻게 할 수는 없다. 테네스 공국 소속의 상선을 공격하는 건 테네스 공국과 전쟁 하고 싶다는 뜻이고, 파이크 왕국과의 전쟁피로도가 가시지 않은 지금 그런 일을 벌이는 건 제아무리 베로나 제국이라고 해도 버겁다.

― 어쨌든, 옆집 두령이 열 받았다는 이야기나 하려고 연락한 건 아니고.

“해석이 끝난 겁니까?”

― 그래. 맥을 제대로 짚었더군. 해석한 내용을 말해주겠네.

그 갑골문에는 헤로스와의 계약을 파기하는 방법이 적혀 있었다.

― 정확히 말하면, 거래라고 하는 편이 좋을 거야.

악마와의 계약은 원칙적으로 취소할 수 없다. 쌍방이 합의하지 않으면 계약은 지속된다.

고로, 헤로스가 내 영혼을 포기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대가로 계약 파기에 대한 동의를 받는 거다.

“즉, 제가 그 수단을 사용해버리면…….”

― 끝이라는 거지. 이후, 다른 녀석들은 헤로스와 한 계약을 파기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리고, 그 무언가에 대한 내용은 그 갑골문에 적혀 있었다.

“거래라. 이후 어떤 방식으로든 보복을 금지하도록 하는 내용을 반드시 포함시켜야겠군요.”

― 자네뿐 아니라, 자네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 전부에 관련된 내용이겠지.

내 영혼을 다시 받아낸다고 해도, 헤로스는 얼마든지 다른 인간들과 계약 할 수 있다. 나를 적대하는 누군가에게 나타나서 영혼을 파는 대가로 힘을 빌려주면, 나는 헤로스의 힘을 받은 녀석에게 두들겨 맞고 죽게 될 거다. 나뿐 아니라, 나와 관련되어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튈 수 있다.

세밀하게 계약 내용을 조절해야겠군.

“그래서, 저는 뭘 찾아야 하는 겁니까?”

― 거참, 이제는 아주 한 나라 세자를 동네 형 취급하는군.

“소신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세자 저하.”

세자는 혀를 쯔, 하고 차더니 대답했다.

― 회색 서약이라는 이름의 석판이네.

진짜, 아득할 정도로 먼 옛날 헤로스가 만들었던 물건이라고 한다. 회색 서약이라는 이름의 석판에는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고, 헤로스의 인장만 떡하니 찍혀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 백지 수표 같은 거다. 안에 어떤 내용을 적어도, 헤로스는 거기에 동의한다고 보증한 거다.

“그걸 찾아내서, 저와 한 계약을 무효로 돌리라는 내용을 새기면.”

― 헤로스는 저절로 그 내용에 동의한 꼴이 되는 거지. 다만, 그 회색 서약이라는 석판을 누군가 먼저 찾아내서 사용했을 수도 있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것이다.

“석판의 위치나,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도 적혀 있습니까?”

― 그래.

“그럼 충분합니다.”

헤로스가 자신이 했던 약속을 까먹지는 않았을 거다. 다른 것도 아니고 뭐든지 요청할 수 있는 백지 수표를 발행한 셈이니까. 그런 건 세월이 지난다고 까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아직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다면, 제가 그 석판이 있는 장소로 향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찾으려 드는 즉시 방해하겠죠.”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꿈속에서 봤던 광대 분장을 한 이상한 놈과, 얼굴 반쪽이 작살난 여자였다.

반대로 어떤 방해도 받지 않는다면, 그 석판은 이미 누군가 사용해서 그 의미를 잃었다는 뜻이다.

“제가 회색 서약을 찾기 위한 움직임을 보인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 그래, 그건 그렇겠군. 사실, 그리고 그 석판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필요한 촉매도 굉장히 구하기 힘든 것들뿐이니까.

좋아, 뭐가 필요한지 일단 들어보자.

― 만록의 심장, 벽해의 피, 삭풍의 족쇄.

“……혹시 건틀릿 같은 건 필요 없습니까?”

― 갑자기 무슨 건틀릿?

아니, 다 구한 다음에 건틀릿에 끼워서 손가락이라도 튕겨야 하나 싶어서. 필요 없으면 말고. 하긴, 그건 여섯 개가 필요했지?

“솔직히 말해서,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이 이어졌으면 합니다. 기대해봐도 괜찮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대답했다.

― 구해야 하는 세 가지 물건 중 하나는 이미 자네가 가지고 있어.

“그거 다행이군요. 세 개보다는 두 개를 찾는 편이 더 쉽죠. 뭔지 알 수 있을까요?”

― 드라이어드의 마력.

드라이어드의 마력이라. 내 심장은 에린실이라는 이름을 가진 드라이어드의 마력으로 재구성되었다.

“하지만, 그건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붉은가지라는 목검에 담겨 있던 마력 전부가 내 안에 들어있는 게 아니다. 드라이어드 에린실의 마력은 로티샤 호수에 잔류해, 로티샤 호수를 얼지 않고 마르지 않는 호수로 유지시키는 중이다. 만록의 심장이라. 로티샤 호수 일대에 드넓은 심록은 그 호수가 없었다면 유지될 수 없었을 테니, 확실히 만록의 심장이라는 표현이 틀리지는 않는 것 같다.

― 전부가 필요한 건 아니야. 어디까지나 촉매일 뿐이니까.

“그렇군요. 일겠습니다. 벽해의 피라고 하는 건?”

내 말에 세자가 대답을 돌려주었다.

― 우선, 산호림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은 핏빛 산호가 필요해.

적산호는 가공하면 붉은 보석이 된다. 보석으로서 산호의 등급을 따질 때, 가장 높은 등급으로 치는 게 옥스블러드 레드다. 수소의 피처럼 붉다는 뜻이지. 벽해의 피라는 말에 어울린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클로에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세자 저하, 감히 질문을 올려도 괜찮겠습니까?”

― 말해보게.

세자의 허가가 떨어지자, 클로에는 기다렸다는 듯이 질문을 던졌다.

“산호림이라고 하시면…… 그 산호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 그래.

세자의 대답을 들은 클로에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산호림의 가장 깊은 곳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걸로 압니다.”

클로에의 말을 들은 나는 약간 심각한 표정을 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더 자세히 말해줬으면 하는데.”

클로에는 산호림이라는 장소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주기 시작했다. 테네스 공국에서 배를 타고 항해하면 도착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한다.

“이전에, 산호림의 크기를 확인하기 위해 범선을 타고 시작 지점부터 반대편 지점까지 쭉 항해한 사람이 있어요. 6일이 걸린 걸로 알아요.”

나는 그 말에 끄으, 하는 소리를 냈다. 6일? 내가 타고 있는 이 대형상선이 대충 10노트 정도의 속력을 낼 수 있다. 그럼 18km/h 정도의 속도를 낸다는 건데.

그럼 대충 그 산호림이라는 장소의 직경이 2600km에 달한다는 뜻이잖아.

호주 근처에 있는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의 길이가 약 2000km 정도에, 그 면적은 한반도 정도가 된다.

“산호림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군.”

엄청나잖아. 말 그대로 바닷속에 만들어진 산호초의 숲이다.

이어지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도착해야 하는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약 500m 정도로 추정되는 모양이다. 거기까지 내려간 물체가 받게 되는 수압은 기압의 51배 정도 된다.

“거기까지 사람 몸뚱어리로 들어가려 드는 건 창의적인 자살 방법일 뿐인데.”

군용 핵잠수함이라도 끌고 오면 모를까. 아니, 군용 핵잠수함도 어지간한 녀석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

내 말에 클로에가 동의하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군.”

나는 이마를 짚었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한다고 해도 그런 수압을 버틸 수는 없다.

제아무리 날고 기어도 살과 뼈로 만들어진 사람 몸이 합금을 처바른 핵잠수함급의 내구도를 가질 수는 없잖아.

― 방법을 찾아보고 있네.

방법이 있기는 할까. 해저 500m는 태양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박광층이다. 주변을 제대로 살피기 위해서는 조명 장치가 필수다. 게다가, 거기까지 잠수하면 수온도 0도에 가까워진다. 그 정도 수온이라면 1시간 이내에 저체온증이 올 수도 있다.

제한점이 너무 많다. 이거,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슬슬 들기 시작하는데.

그 뒤로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저 멀리에서 뭔가가 팍 하고 해수면 위로 올라오는 장면이 보인다. 고래다.

“하, 갑자기 웬 돌고래람.”

바다에서 저런 걸 보면 재수가 좋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지금 내 심정으로는 저걸 본 게 딱히 행운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냥, 돌고래일 뿐이잖아. 머릿속이 너무 복잡해서 보기 힘든 동물을 보게 되어도 별로 기분이 좋지는 않다.

내가 멍하니 망망대해를 바라보던 사이, 물 위로 올라왔던 고래는 다시 사라졌다. 잠수한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몸을 살짝 떨었다.

“맙소사, 돌고래를 본 건 행운이 맞잖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사람이 못 들어가는 곳이면, 다른 걸 보내면 되는 거잖아. 내가 뭐하러 그 지독한 장소로 들어가야 하는데? 자기 몸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무언가에게 시키는 건 대대로 이어진 인간의 특징이다. 사냥개만 봐도 알 수 있지.

내가 본 건 돌고래지만, 머릿속에 떠오른 고래는 향유고래였다.

향유고래는 수심 1000m 아래까지 잠수한 다음, 순식간에 해수면까지 올라올 수 있다.

이 세상에도 용연향은 있다. 용연향이 있다는 건, 향유고래도 있다는 뜻이다. 나는 재빨리 수정구를 향해 말했다.

“동물을 통제할 수 있는 종류의 마법이 있습니까?”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나는 간단하게 계획을 설명해줬다. 사람이 내려가지 못한다면, 해양 생물이 내려가서 구해오게 만들면 될 일이다.

향유고래라면 500m 아래의 바다는 워터파크에 있는 어린이용 수영장에서 물장구치는 느낌일 테니까.

그뿐이 아니다. 산호는 강철이나 다이아몬드 같은 게 아니다.

고래 정도의 덩치가 들이받으면 산호는 개박살이 날 거다. 아니, 사실 박치기할 필요도 없지. 그냥 이빨로 앙 물어뜯으면 그대로 뜯겨 나올걸.

동물을 통제할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 우리는 그 마법으로 고래를 한 마리 통제해서 500m 아래까지 잠수시킨 다음, 그 벽해의 피인지 뭔지 하는 걸 뜯어내서 올라오게 하면 되는 거다.

― 기가 막히군. 벽해의 피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낸 다음 날고 기는 마법사들 사이에서 온갖 제안이 오갔지만 그 방법이 가장 그럴듯해 보여.

그때, 옆에서 클로에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하지만, 산호림은 대규모 암초지대에 가까운 형태를 하고 있어요. 거대한 고래는 잠수해야 하는 지점까지 도착하기 어려울 텐데.”

“무슨 상관이야. 길은 우리가 때려 부숴서 만들면 될 일이지. 그런 건 문제라고 볼 수도 없어.”

우리가 못하는 건 깊게 잠수하는 것뿐이다. 고래가 지나갈 만한 길이 없다면, 암초지대에서 방해되는 부분을 작살내서 바다에 고래가 지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면 된다. 그건 어렵지 않다.

― 그 제안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 엘렌 리버플로우를 위시한 마법사들의 자문을 구해보지. 의견을 종합한 다음, 다시 연락하겠네.

말을 마친 다음 세자는 연락을 끝냈다. 나는 갑판의 난간에 기댄 채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좋겠는데.”

어쨌든, 이걸로 목적한 물건은 획득할 수 있을 것 같다. 방해꾼만 없다면야 더할 나위 없을 것 같군.

다시 세자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었던 건 수평선 아래로 해가 가라앉은 다음이었다.

― 몇 가지 준비가 필요하지만, 가능할 것 같다는 것이 중론이었네. 아무래도 자네의 협조가 필요할 것 같아.

“협조라니, 저 살자고 하는 일입니다. 협조는 세자 저하께서 해주시는 중이지요.”

그러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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