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12화 (212/275)

212화

세자가 나에게 요청한 것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고래한테 약을 주사하라는 겁니까?”

― 그래.

약이라. 고래 정도 사이즈가 되면 동물을 통제하는 마법도 휙 하면 팍 하는 식으로 쉽게 듣지는 않는다는 게 세자의 설명이었다. 통제의 용이성을 위해서는 최초 통제 시도를 할 때 저항을 줄이도록 제조한 약을 투여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어렵지는 않아 보이는군요. 그 덩치를 생각하면 멀리에서 주사기를 던져도 대충 몸 어딘가에는 박히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세자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그래, 어쩐지 너무 쉽다 했지. 뭔가 조건이 붙는 모양이다.

― 우리가 통제해야 하는 향유고래는 지방층이 두꺼워서 밖에서 약을 투여하는 건 의미가 없어.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 그래.

세상에, 고래 입 속으로 들어가서 뭔가를 시도하는 건 영화나 만화 같은 데에서나 나오는 일로 알고 있었는데. 내가 그 일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걸. 하긴, 나름대로 별별 일을 다 겪어봤다고 자부하던 나도 이 세상으로 넘어오고 나서부터는 처음 경험해보는 일들이 많았으니까.

고래 뱃속 정도야 뭐.

“구체적으로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야 하는 겁니까?”

― 구강 내부 정도면 충분해. 씹히지 않게 주의하면서, 아무 곳에나 주사기를 박아넣고 용액을 주입하면 충분하지.

그건 다행이네. 위장으로 내려가서 고래의 소화액에 뒤덮인 대왕오징어 살 조각 같은 걸 부둥켜안고 덩실거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뭐, 고래 전용 마약이라도 만드는 모양이죠?”

― 고래 전용 마약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고래의 몸이 마법에 걸리기 쉽도록 만드는 용도야.

마법은 사용자를 팩 리더와 같은 지위에 두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주사를 맞고, 마법에 걸린 향유고래는 통제하는 사람을 자신이 속한 무리의 우두머리로 여기게 되어 그 지시를 이행한다.

―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원래 포획했던 장소로 돌려보내고 마법을 풀면 된다.

뭐, 돌고래를 군용으로 쓰는 것보다는 훨씬 더 건전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네.

“약물은 어느 정도의 양입니까?”

― 맥주 통 하나 정도 분량이야.

워우, 덩치가 커서 그런가. 쏟아 넣는 약물의 양도 엄청나군그래. 나는 기가 막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대답했다.

“그거, 다 밀어 넣는 것도 한 세월일 것 같습니다.”

― 그렇겠지. 혹시 목구멍 너머로 들어가지 않게 조심하게. 나중에 내가 앞으로 사용할 용연향에 마틴 레드우드의 성분이 들어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아플 거야.

거 말 한번 이쁘게 하시네. 고래똥이 되고 싶은 생각은 나도 없어. 어쨌든, 그 엄청난 분량의 약도 받아야 하고, 통제를 담당할 마법사도 필요하다. 우리는 테네스 공국의 항구 중 하나에서 세자가 보낸 사람들과 접선하기로 한 다음 연락을 끊었다.

* * *

헤로스는 뼈만 남은 손으로 불타는 자신의 두개골을 받친 채 눈앞에 나타난 형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앞에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는 광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헤로스 님의 새로운 노예가, 목줄을 차기도 전에 벗어날 생각을 하는 모양입죠.”

그 말에 해로스의 두개골 위에 타오르던 화염이 다소 거칠어졌다. 본디, 인간들이 사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헤로스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 자세히 말해라.

“제국의 안티온 대도서관에 잠입했다는 모양입니다.”

그 말을 들은 헤로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아득히 먼 옛날 자신이 인간 세상에 남기고 간 비석이었다. 인간이 거래의 대가로 제안했고, 헤로스는 이에 응했었다. 그리고, 그에 관련된 기록이 인간 세상의 어디에 잠들어 있는지도 알고 있었다.

― 더 자세히.

다시 한번 헤로스가 다그치자. 눈앞의 광대가 대답했다.

“히, 제 활동 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이상은…… 쬐끔 힘든 느낌이 없지 않아 있습죠. 네, 그렇습니다. 그렇지. 저글링 보여드릴깝쇼?”

말을 마친 광대는 천천히 허리를 세우더니, 주섬주섬 뭔가를 꺼내 허공에 던지며 저글링을 하기 시작했다. 헤로스는 녀석의 행동을 별다른 감흥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 안티온 대도서관에 헤로스가 남겨놓은 비석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하지만, 마틴 레드우드가 정말로 그 비석에 관한 내용을 읽는 데 성공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알 수 없다.

― 그놈을 감시해라. 단순히 다가오는 운명을 마주하기 전 잠깐의 안락을 즐기는 것뿐이라면 그대로 두어도 좋지만. 아니라면…….

물구나무 서서 발로 저글링을 하던 광대가 동작을 딱 멈췄다. 떠올랐던 온갖 잡동사니들이 바닥에 투툭 떨어지고, 광대는 물구나무선 채 목을 뒤로 확 꺾어 헤로스를 바라봤다.

“아니라면…… 아니라면, 어떻게 할까요?”

― 가압류를 해야겠지.

마틴 레드우드를 죽인 다음, 그 영혼을 약속한 시점이 되기 전까지 보관할 것이다. 물론, 약속한 시점이 되기 전까지 마틴 레드우드는 헤로스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원하는 쾌락을 누릴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압류일 뿐이니까.

“가압류 말입니까.”

말을 마친 광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척 하고 경례하며 외쳤다.

“좋지요! 좋아요! 바로 착수하겠슴다!”

말을 마친 광대의 주변에서 속삭이는 것 같은 가느다란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웃음소리를 내는 목소리의 숫자가 점점 많아진다. 수천, 수만의 목소리가 웃음소리를 흘릴 즈음이 되어서야 마침내 광대의 모습이 사라졌다.

자욱하게 부유하는 잿가루와, 휘날리는 불티 속에 앉아있던 헤로스의 손이 살짝 움직였다. 그와 동시에, 재와 불티 말고는 아무것도 없던 대지에 사람의 형상이 나타났다.

― 올리비에 라가르드라고 했나?

금발의 여자는 알몸으로 서 있었다. 검게 탄화된 피부와 물집이 한가득 잡혀있던 올리비에의 몸은 서 있는 순간에도 회복하고 있었다.

“아.”

올리비에는 그런 감탄사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내더니 희미하게 웃음을 띄웠다.

― 질문에 대답해라.

올리비에는 아물어가는 몸 위에 남아있는 탄화된 피부 조각을 뜯어내며 말했다.

“알고 있으면서 질문하지마. 아둔해 보이잖아.”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금 올리비에의 몸을 화염이 휘감았다. 아물어가던 피부는 다시 물집이 잡히고, 검게 탄화되며 돌이킬 수 없어 보이는 화상으로 뒤덮인다. 하지만, 올리비에는 그 와중에도 태연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올리비에는 자신의 몸을 바라본다.

― 마틴…….

헤로스가 입을 열자, 올리비에가 그 말을 자른다. 그리고 헤로스가 할 말을 대신 읊는다.

“마틴 레드우드가 안티온 대도서관을 습격했다. 너는 그 남자가 나와 계약해버리는 바람에 원하는 것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지. 내가 너에게 기회를 주겠다.”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검게 탄화된 피부가 부스러져 떨어지고, 뼈마저 검게 그을기 시작한다.

― 내가 할 말을 알고 있다면, 대답 또한 준비되어 있겠군.

“거절할 거야. 이유는 세 개.”

올리비에는 헤로스를 위아래로 슥 훑어보며 말했다.

“첫째, 처음에는 좀 힘들었는데 시간이 좀 지나니 여기도 그럭저럭 있을 만하네. 둘째로, 이유와 과정이 어찌 되었건 마틴 레드우드와 나 사이의 승부는 끝났고, 그 결과에는 미련이 없어.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가장 중요한데…….”

말을 마친 올리비에가 히죽 웃으며 헤로스를 바라봤다. 얼굴이 타들어 가면서 웃는 올리비에의 표정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몸이 굳을 정도로 끔찍했다.

“나는 나보다 멍청한 모질이의 가랑이 아래로 기어들어 가지 않아.”

지옥에 떨어져도 너 같은 녀석 아래에서 일하지는 않겠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많다. 하지만, 정말 지옥에 떨어진 상황에서 악마한테 저런 말을 내뱉는 사람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말을 마친 올리비에는 그슬어 뼈만 남은 팔을 꼰 채 헤로스를 바라봤다.

“할 말 끝났으면 다시 돌려보내 줬으면 좋겠는데.”

― 거만하기 짝이 없는 년이군.

헤로스는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잠시 뒤 입을 열려고 했다.

“싫어.”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먼저 나온 올리비에의 거절이었다. 마치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헤로스의 손이 올려져 있던 권좌의 손잡이에서 빠직, 하는 소리가 났다.

― 네년이 지금 누구 앞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군.

“성공하기 직전까지 간 일을 망쳐놓은 상도덕 없는 해골바가지 앞에서 이야기하는 중이지.”

― 후회하게 될 거다. 너는 그 고통 속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올리비에가 그 말에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리다가 이내 뚝 웃음을 멈췄다.

그녀 입장에서는, 지금 이 순간이 제일 힘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에 불 좀 붙었다고 꽥꽥거리는 것이 시끄럽긴 했지만, 최소한 말을 하는 녀석은 없었으니까.

태어난 이후로 지금까지 그녀를 괴롭힌 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니라,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주변에서 웅앵거리는 잡것들이었다.

심지어, 그게 그녀에게 하는 말이 아니어도 돌아버릴 정도였다.

날씨가 좋지 않냐느니, 요즘 살이 찐 것 같다느니, 함께 일하는 사람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느니 하는 잡소리들.

듣기 싫으면 무인도라도 들어가면 될 일 아니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건 도망이다.

지옥에서 악마가 내민 도움의 손길도 자기보다 멍청한 녀석 아래에서 일할 수는 없다면서 거절한 올리비에다.

죽기 전에 마틴 레드우드가 지적한 것처럼, 도망은 그녀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어쨌든, 이 지옥에는 그런 게 없었다. 다들 불타느라 바빴으니까. 그래서, 산 채로 몸이 타오르는 고통은 있을지언정 올리비에는 이 안에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 후회할 것이다. 나는 너로 하여금 다시 세상의 흙을 밟게 해줄 수도 있었다.

올리비에는 바닥에 앉아 눈을 감고는 작게 코웃음을 한 번 쳤다. 머저리들 수백만이 드글거리는 그 끔찍한 동네로 다시 돌아가라고? 평생 여기서 불타고 말지.

― 아니면, 마틴 레드우드가 너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냐.

올리비에는 안쓰럽다는 표정을 짓고 헤로스를 바라보며, 어린애를 타이르는 것 같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틴 레드우드가 자신의 영혼을 너에게 판 순간, 내가 이긴 거란다. 어쩜 생각이 거기까지 짧아질 수 있니?”

올리비에는 죽이기 위해 헤로스에게 영혼을 판 마틴 레드우드는, 죽은 올리비에가 남긴 유언과 안배해둔 손수건 덕분에 팔아넘긴 영혼을 되찾을 기회를 얻었다.

위기에 빠진 것도 올리비에 때문이고 위기에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된 것도 올리비에 덕분이니, 이후 마틴 레드우드가 어떤 삶을 살건 그때의 승부는 올리비에의 승리다.

― 이겼다고 말하지만, 정작 너는 지옥에서 불타고 있군. 이 상황이 승자에게 걸맞다고 생각하나?”

“네가 그 녀석 정도만 되었어도 그런 바보 같은 소리를 입에 담지는 않았을 텐데.”

올리비에의 입이 열리는 건 그걸로 끝이었다. 헤로스가 몇 마디 더 건네보았지만, 올리비에는 아예 입을 딱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헤로스는 손을 휘저어 올리비에를 원래 그녀가 응당 있어야 하는 지옥의 불구덩이 속으로 처박았다.

올리비에는 다시 불구덩이 아래로 떨어지며 헤로스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또 부를 거 알지만, 그래도 부르지 않아 줬으면 해. 어차피 내 대답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그걸로 끝이었다. 헤로스는 올리비에를 구슬려 마틴 레드우드를 방해한다는 생각을 접어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