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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14화 (214/275)

214화

광대 자식의 장난질을 해결하기 위해 엘렌이 제시한 의견은 일견 황당하면서도, 동시에 꽤나 그럴듯해 보이기도 하는 녀석이었다.

― 그림자는 빛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않아.

그리고, 그림자의 회전이 없다면 그 광대는 지옥과 이 세상을 겹칠 수 없다. 자연스럽게, 지옥의 영혼을 바쳐 흑마법을 사용하는 것도 불가능해진다.

“그냥 밤이 되는 걸로는 부족하잖아.”

― 밤에도 그림자는 있으니까.

필요한 건 완전한 암흑이다. 그리고, 문제는 거기에서 생긴다.

“사방이 암흑으로 변해버리면 나도 적을 볼 수가 없잖아.”

― 맞아, 그 점에 대한 대응책을 생각해내야 할 텐데.

“차라리 그냥 싸우는 건?”

내 말에 엘렌이 부정적인 의견을 제시했다.

― 고작 그림자를 움직이는 정도의 옅은 공통점을 가지고 지옥에 있는 영혼을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실력자야. 실질적으로 대항할 수 있는 전력은 너와 클로에뿐인데…… 아마 힘들 거라고 생각해.

암흑에서 싸우면 나도 눈에 뵈는 게 없어지긴 하지만, 차라리 그 리스크를 끌어안고 상대의 흑마법을 봉인하는 편이 더 승산이 높다는 이야기다. 이른바 살을 주고 뼈를 취하는 거지.

뭐, 녀석이 초 같은 걸 밝힐 수도 있겠지만…… 그걸 밝히려고 드는 순간 내가 놀고 있지는 않을 테니까. 설사 녀석이 지옥의 영혼을 제물로 바칠 수 없는 상황을 대비해 따로 제물로 바칠 것들을 가지고 다닌다 해도 사용할 수 있는 흑마법은 그 강도와 규모가 급격히 약해질 것이다.

다음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어떻게 빛을 없애느냐인데, 이건 사실 문제 해결이라는 표현을 할 필요도 없다.

녀석과 나를 빛 한 방울 들어오지 않는 커다란 돔 따위에 가둬버리면 된다.

― 좋네, 돔을 만드는 건?

“그건…….”

내가 말꼬리를 끌자 엘렌이 기가 막히다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했다.

― 설마, 남은 건 마법사들이 알아서 하라는 식의 무책임한 이야기를 하지는 않겠지.

“그럴 생각이었는데.”

니들은 마법사잖아. 뭐 아브라카다브라니, 얄리얄리 얄랑셩이니, 그런 거 해서 어떻게든 돔을 만들어 내면 되지 않을까? 내 대답을 들은 엘렌이 으으, 하는 소리를 냈다.

― 시한부 인생만 아니었어도 뭐라고 한마디 했을 거야. 방법을 찾아볼 테니, 기다리고 있어.

“방법이 따로 필요할 정도야?”

내 말에 엘렌이 혀를 찬다.

― 내가 거기 있다면 방법을 따로 고안할 필요가 없지만, 지금 거기에 있는 건 내가 아니라 메이슨이잖아. 메이슨은 이런 종류의 마법은 잘 다루는 편이 아니야.

그래, 중식 요리사를 데리고 한식을 만들라고 하면 아무래도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겠지.

“그나저나, 거기는 별일 없어?”

내 말에 엘렌이 간단하게 대답을 돌려주었다.

― 이번 주에 두 명을 처리했어. 모두 레드우드 부인을 노리고 베로나 제국에서 보낸 녀석들이야.

나는 그 말에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역시, 제국에서 나만 노리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엘렌을 보내놓지 않았다면 지금쯤 로델린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거다.

“막아냈다니 다행이네.”

― 나 혼자 해낸 일은 아니야. 첩보국의 협조가 없었다면 힘들었을걸.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려니 클로에가 차가 담긴 주전자와 과일을 챙겨왔다. 수정구를 확인하더니, 조용히 옆에 서서 잔에 찻물을 따라 건네준다.

“마음 같아서는 어머니께 직접 연락드리고 싶지만.”

― 그래,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지.

로델린은 내가 지금 쿠르스트 산맥에 있는 걸로 알고 있다. 물론, 내가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들킬 확률은 높지 않다. 하지만, 들키지 않기 위해서 취해야 하는 가장 좋은 자세는 가능하면 연락하지 않는 거다.

“잘 부탁할게.”

― 문제없어. 그리고, 레드우드 부인은 영주 대리로서의 임무 수행을 문제없이 해내고 계셔. 아마, 네가 돌아올 때 즈음 되면 새로 받게 될 영지는 레드우드 부인이 상당 부분 안정시켜 놓으신 상황일 거야.

그러면서 엘렌은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로델린이 했던 일들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어제저녁에는 영지에 속한 마을의 촌장과, 여든 이상의 노인들을 초청해서 저녁 식사를 했다는 모양이다. 물론, 초청에 응할 수 있는 건강 상태가 아닌 노인들에게는 따로 선물을 챙겨준 모양이다.

“전형적이네.”

― 그래, 민심을 안정시키기에는 가장 좋은 방법이지.

이 시대는 현대 지구와는 다르다. 노인에 대한 공경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예우가 결코 아니다.

농경 사회에서 오랜 세월을 보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지혜라는 이름의 보석이 된다.

가뭄이 오면 어느 우물이 가장 먼저 마르는지, 홍수가 나면 마을의 어디가 가장 먼저 잠기는지. 몇 년 전에 돌았던 전염병을 어떻게 대처했는지. 농작물에 병이 들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

그런 수많은 경험들.

때문에 마을에서 여든이 넘은 노인의 목소리는 젊은 사람들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가지고 있다. 사실, 여든이 넘도록 장수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많은 편이 아니다.

“이야기를 들으니 약간 마음이 놓이네. 나중에 또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하마.”

― 그래, 열심히 해.

말을 마친 엘렌이 연락을 끊었고, 나는 클로에가 건네준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과일을 확인했다. 망고스틴이랑 비슷한 냄새가 나는데.

“이건 어디에서 구한 거야.”

“항구 근처 시장에서 팔던데요. 테네스 공국이잖아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내 쪽으로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저희가 사용하게 될 예정인 포경선이랑, 예상되는 항해 경로에요. 알아두시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나는 그 말에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시키지도 않은 일인데.”

내 말에 클로에가 약간 흘러내린 앞머리를 넘기며 대답했다.

“놀면 뭐 하겠어요. 아, 그리고 포경선 자체는 내일부터 이용할 수 있지만 역시 그 광대에 대한 대처법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배를 띄우기 곤란하겠죠. 포경선에 연락해서 협조를 구할게요.”

“그래. 아, 배에 탑승하는 선원들 말인데.”

“첩보국을 통해서 정보를 받았어요. 수상한 사람은 없어요.”

나는 그 말에 다소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혹시, 뭐 제가 빼먹은 거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야. 지시하기 전에 다 해놓으니 좀 심심해지는 기분이라서.”

이러다 보면 괜히 트집 잡아서 시비 거는 상사가 될 것 같은 느낌인데. 내 말에 클로에가 어깨를 으쓱하고는 내 잔에 차를 마저 채운 다음 과육을 발라내 접시에 둔다.

“먼저 한 개 먹어봤는데 맛이 좋더라고요. 저는 그럼 포경선에 연락하러 가볼게요.”

말을 마친 클로에가 인사를 하고 문을 나섰다. 나는 과육을 입에 넣고 씹으며 창밖을 바라보다가 살짝 표정을 굳혔다.

도대체 저 망할 놈의 마차는 몇 번이나 모습을 비추는 거야?

빙빙 돌면서 계속 스치고 지나가면 모를 줄 알았나. 나는 창문을 열고 마차를 향해 뛰어내렸다.

“흐아어?! 무슨, 누구십니까?”

나는 마부를 슥 훑어보고는 별다른 대답 없이 마차의 문을 열며 옆으로 살짝 비켰다. 팍, 하고 기다렸다는 듯이 원래 내가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 칼끝이 자리 잡는다.

나는 검을 뽑아 마차 안에서 내뻗어진 칼을 쳐내고 안에 들어있는 녀석의 멱살을 잡아 그대로 땅을 향해 메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이 등으로 바닥을 들이받고는 크흡, 하는 소리를 냈다.

“다음부터는 사람을 확인하고 찌르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을 거야.”

뒤늦게 반응하려고 하던 녀석은 자신의 목줄기에 닿아있는 칼날을 눈치채고 행동을 멈춘 채 가만히 나를 바라본다.

느낌 쎄하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나는 녀석의 오른손에 칼을 박아넣었다.

오른손으로 녀석의 턱을 잡고, 입 속으로 왼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혀 아래로 손가락을 넣자,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그걸 밖으로 빼낸 나는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촛농으로 감싼 모양인데. 손에 힘을 줘 촛농을 깨자 가루가 흘러나온다.

그 가루가 묻은 손에 물을 부어 씻어냈다. 바닥에 쏟아진 물 근처로 다가갔던 개미가 그대로 다리를 오므린 채 사망한다. 그 광경을 확인한 나는 팔이 묶인 남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자살하면 지옥 가, 청년.”

죽은 사람은 쓸모가 없지만, 산 사람이라면 그 활용도가 무궁무진한 법이지. 이 친구가 나에게 들려줄 흥미로운 이야기를 기대하며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뒤편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렸다. 브레이서에 마력을 돌리며 뒤를 돌아보려는 순간 내 몸이 뒤로 쭉 밀려났다.

브레이서로 만들어진 보호막이 크게 휘어질 정도로 강렬한 타격이었다. 내 몸이 뒤로 밀려나는 사이, 석궁을 쏴붙인 녀석이 땅 위를 스케이트 타는 것처럼 쭉 미끄러지며 묶인 채 심문받기를 기다리고 있던 녀석을 휙 낚아챈다.

“알았어, 걔 데려가도 좋으니까 허리띠는 내놔.”

바지춤을 잡은 채 그런 소리를 하던 나는 다소 놀란 표정을 지은 채 석궁을 든 녀석의 얼굴을 확인했다.

“너 밥은 어떻게 먹냐?”

입을 아주 그냥 재봉틀로 조져버린 것처럼 꿰매버렸네. 녀석은 별다른 말 없이 아군을 부축한 채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역시, 이번에도 걷는다기보다는 대지 위를 미끄러지는 느낌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발이 땅에 닿아있지 않고, 희미하게 흙먼지가 달린다. 오락실 같은 곳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에어하키 비슷한 원리겠지.

팔뚝에 보이는 작은 벌새 모양의 문신이 눈에 들어온다. 그 문신은, 살아있는 것처럼 쉬지 않고 날개를 파닥거리고 있었다.

“아까 전에 돌아봤을 때는 그 문신이 움직이고 있지 않았는데.”

녀석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도망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녀석의 뒤에 분신을 만들어, 내 쪽으로 확 떠밀었다. 공중에 살짝 떠 있는 녀석은 당연히 그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내 쪽으로 쭉 밀려온다.

순간적으로 녀석의 몸이 브레이크라도 걸린 것처럼 딱 멈춘다. 팔뚝의 벌새 문신이 날갯짓을 멈춘 상황이었고, 녀석의 발은 아까와는 달리 땅에 딱 붙어있다. 문신을 통해 힘을 끌어내는 건가. 머릿속에 얼굴 반쪽이 작살나 있던 여자 한 명이 떠오르는데. 부하 같은 건가?

녀석을 향해 자세를 잡고 검을 들어 올리자, 녀석의 눈이 이리저리 움직인다. 어디에서 분신이 나올지 모르니 불안하겠지.

그 와중에도 손은 부지런히 움직이는 중이다. 나는 그런 녀석을 노리고 분신을 만들어 냈다. 바로 앞에 나타난 내 분신에 녀석의 팔뚝에 새겨진 벌새 문신이 다시 한번 날갯짓을 시작한다.

분신이 휘두른 검은 허공을 갈랐지만, 그 즉시 이어서 나타난 분신이 녀석의 배를 노리고 검을 내지른다. 잠깐 사이에 쉬지 않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분신들의 공세, 석궁을 든 녀석이 버티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으읍…….”

마침내 칼날이 녀석의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나는 그 틈을 노려 녀석의 목을 꽉 붙잡았다.

“미안, 인질은 한 명이면 충분하거든. 너무 억울해하지 마.”

늦게 온 사람이 손해 보는 건 어쩔 수 없지. 뚜둑, 하는 소리와 함께 목이 꺾인 녀석의 몸이 축 늘어진다. 나는 녀석을 휙 던지고 아직 몸이 묶여있는 녀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

다시 한번 뒤에서 파공음이 들린다. 나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목이 꺾여 눈이 허옇게 뒤집어진 녀석이 비틀거리며 서 있었다. 날려 보낸 석궁 볼트가 노린 건 내가 아니라, 내가 데리고 가려던 인질이었다. 화살에 담긴 힘이 강해서 그런지, 석궁 볼트를 받아낸 머리통은 흔적도 없이 박살났다.

그리고, 석궁을 쏘아냈던 녀석도 픽 쓰러졌다.

“이런 망할.”

다가가 보니, 석궁을 쏜 녀석도 죽어있다. 이미 죽은 사람의 몸이 움직여 석궁을 쏴붙이다니.

머리가 날아간 시체에게 접근하는 순간, 그 시체의 가슴팍이 기괴하게 부풀기 시작했다.

“망할, 폭발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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