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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16화 (216/275)

216화

며칠 뒤, 메이슨이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녀석의 손 위에 들려있는 건 흑요석을 얇게 깎아 만들어 낸 나비 모양의 장식이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이 말해준 방식을 최대한 모방했습니다.”

빛을 차단하는 반구형 공간을 만들어 내는 도구라는 것이 메이슨의 설명이었다.

“필요한 재료를 구하는 것도 꽤나 힘드셨을 텐데.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내 말에 메이슨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테네스 공국 아닙니까?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다만, 제 실력의 부족함으로 인해…….”

그렇게 넓은 범위를 커버하지는 못한다. 이 나비를 중심점으로 삼아, 기껏해야 15m 정도의 반구형 공간을 만들 수 있을 뿐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설치하는 방식이 아니라는 거군요.”

이 나비 장식을 품에 지닌 채 움직이면, 빛을 차단하는 반구형 공간도 따라 움직인다. 넓은 공간을 커버할 수 없으니, 움직일 수 있게 만든 거다.

“그 광대와 싸우게 되면, 거리를 유지하는 게 중요하겠네요.”

옆에서 그 검은 나비 장식을 구경하던 클로에가 한마디 덧붙였다. 약 15m, 벗어나려고 하면 얼마든지 벗어날 수 있다.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 장식에 걸린 마법을 발동시킨 다음, 최대한 그 광대와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는 거다. 나는 장식을 내려놓고 메이슨을 바라봤다.

“시야는 어떻게 확보하죠?”

가리는 건 가능하다고 쳐도, 서로 보이는 게 없는 상황에서는 녀석을 졸졸 쫓아다닐 수가 없다. 녀석은 아무 방향으로든 일단 닥치고 뛰면 되지만, 나는 그 방향을 확인해야 하니까.

“이걸…….”

나는 녀석이 내민 안대를 보고 한숨을 팍 내쉬었다.

“굉장한 형태를 하고 있네요.”

세상에, 이거 쓰고 엉덩이에 채찍이라도 맞으라는 거냐. 새까만 가죽에 반짝이는 은으로 장식되어있는 아이마스크는 얼핏 보기에도 수면 안대와는 그 디자인의 궤를 달리하고 있었다.

“반향정위를 통해 주변 물체의 윤곽을 파악하고, 파악된 정보를 눈에 직접 반영하는 형식입니다.”

뭐, 박쥐 같은 건가? 나는 그 설명을 듣고 난 다음 속는 셈 한번 눈을 가려보았다. 가려져서 검게 변한 시야 속에서 청백색의 선이 그려지며 주변의 윤곽이 드러난다. 색을 알 수는 없지만, 꽤나 노력해서 만들어 낸 물건인지, 동전 정도 크기의 물체도 그 윤곽을 선명하게 파악될 정도다.

다시, 쓰고 있던 안대를 벗자, 클로에가 묘하게 불쾌한 느낌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저 SM 가면을 쓴 내 모습이 어지간히 웃겼던 모양이다.

“그냥 웃지 그래?”

내 말에 클로에는 대답하지 않고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성능은 어떻습니까? 뭔가 문제가 있거나 하지는 않은지 걱정이 돼서.”

메이슨이 어색한 웃음을 지은 채 물어봤다. 나는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성능에 문제는 없어 보이는데. 약간 텀이 있더군요.”

엄청나게 긴 건 아니고, 약 0.1초에서 0.2초 정도의 차이가 있어 보였다. 손을 이리저리 흔들어보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실제로 사물이 움직이는 것과, 그 움직임이 이 안대에 반영되는 데에는 약간의 텀이 존재한다.

내 말에 메이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반향정위를 통해 파악된 주변 사물의 윤곽을 다시 시각 정보로 변환해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정확히 말하면, 현 상황에서는 이 이상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해야겠지.

0.1초라. 얼핏 보기에는 짧아 보이는 시간이지만, 한창 싸움이 이어지는 와중에는 그 찰나의 시간이 이승과 저승을 가르는 경계선이 되는 수가 있다.

“제가 가진 바 능력이 부족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안대와 나비 모양 장식을 챙겼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어떻게든 그 광대 자식에게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을 갖췄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최소한, 이전처럼 휘둘리듯 당하지는 않겠지. 나는 시선을 돌려 선장모를 쓰고 있는 중년 남성을 바라봤다.

“그럼, 이걸로 대응책은 일단락되었군요. 선장님도 오늘 중으로 항해에 필요한 물자를 챙기는 편이…….”

그때, 밖에서 피유우우우우우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니, 밤하늘 높이 오색 빛깔의 폭죽이 펑펑 터지는 중이었다.

그냥 폭죽이 아니다. 바라보고 있으려니 순간적으로 머리가 아찔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귀에 울려 퍼지는 으헤헤헤헤헤헤헿, 하는 웃음소리.

급하게 메이슨이 달려들어 창문에 커튼을 치고는 외쳤다.

“보면 안 됩니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통 챙겨서 포경선으로 달려.”

“하지만, 아직 필요한 물자를 챙기지 못했어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자를 챙기지 않고 배를 띄우는 건 죽고 싶다는 소리다.

“나도 알아. 거기로 가서, 다른 사람들이 물자를 옮기는 사이 우리는 배와 약물을 지킨다.”

우리가 준비를 마치는 사이, 그 광대 녀석도 나름대로 준비를 마친 모양이다.

“그 광대와는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끝을 보자고.”

바다까지 나가서 그 정신병자와 놀아주고 싶은 생각은 없다. 가볍게 필요한 짐을 챙긴 나는 검을 뽑아 들고 여관 문을 박차고 나왔다.

“얼씨구.”

여관 문이 열리자, 밤거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리고 나를 바라본다. 헤 벌린 입에서는 침이 흐르고 있었고, 눈은 검은자위가 돌아가 흰자위만 남아있다. 그 상태로 그어어어, 하는 소리를 흘리며 휘적휘적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모습은 흡사 B급 좀비 영화 같았다.

허옇게 뒤집힌 눈깔이 우리를 확인하자마자 확 하고 핏발이 선다.

“어떡하지.”

우리는 외국인이고, 여기는 테네스 공국이다. 테네스 공국의 사람을 외국인이 죽여버렸다가는 파이크 왕국과 테네스 공국의 관계가 서먹해질 것 같은데. 이래서 씨바, 잃을 게 많으면 멋대로 행동할 수가 없다니까.

결국, 고민하던 나는 달려드는 녀석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고, 검 손잡이로 내려쳐 기절시키는 정도의 대응만을 하기로 했다.

“니들은 부끄럽지도 않냐?!”

그 와중에 저 멀리에서 창이나 검, 방패 같은 것을 들고 다가오는 녀석들이 보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이 허옇게 뒤집혀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녀석들은 길을 걸어 다니던 평범한 사람들인데, 저 녀석들은 이 항구의 경비대 병력들이라는 점이다.

“이 일대의 사람들에게 전부 환각을 걸어버린 모양입니다. 뭘 준비하나 했더니……!”

메이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입을 꽉 다물었다.

“죽이면 곤란하겠지?”

내 말에 옆에 서 있던 클로에가 달려드는 녀석의 머리를 꽉 붙잡으며 대답했다.

“네, 여기에서 우리가 테네스 공국의 백성들을 죽여버리면 수습할 도리가 없어요.”

대답과 동시에 사람의 머리를 붙잡고 있는 클로에의 손에서 둥,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반항하던 녀석의 몸이 축 늘어진다.

이건 한두 명 죽인다고 끝나는 게 아니다. 적게 잡아도 수십, 많으면 천이 넘어가는 사람들을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에게 무슨 사정이 있건, 테네스 공국의 사람들 입장에서는 외국인이 자기 나라 국민 수백을 죽였다는 사실은 그것 자체로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마을 하나를 통째로 이 꼴로 만들다니. 미친 새끼 같으니라고. 약물은 챙겼어?”

내 말에 클로에가 슬쩍 뒤를 가리켰다. 동행하는 병사들이 커다란 통을 짊어지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이리로 와! 우리가 보호할 테니. 너희는 통을 나르는 데 집중해.”

말을 마친 우리는 달려드는 사람들을 제압하면서 약물을 나르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봐, 지금 바쁜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건물 꼭대기에 쪼그려 앉은 채 우리를 바라보는 광대가 보인다.

“바뻐, 말 시키지 마.”

내 대답을 들은 녀석이 으응으응, 하는 좆같은 느낌의 교태부리는 소리를 내고는 손을 휙휙 흔든다.

“그러지 말고, 놀다가 청년.”

혈압 오르네. 나는 씨팔, 클로에가 애교부리는 것도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근데, 이 세상 와서 처음으로 나를 향해 애교 부리는 새끼가 대가리에 밀가루 처바른 정신병자 광대 새끼라니. 지금 바쁘지 않았다면 저 건물 위로 치고 올라가 저 새끼 모가지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구를 때까지 치고받았을 거다.

녀석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건물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낄낄거리다가 손뼉을 한 번 짝 쳤다.

녀석의 머리통 위에 마술사 모자가 턱 하니 얹어지고, 손에는 기다란 지팡이 하나가 쥐어졌다.

“짜잔, 잘 살펴보세요. 아무것도 없는 모자입니다. 그렇죠? 이 모자에서 이제 여태 동안 여러분들이 보지 못한 엄청난 일이 일어난답니다! 무려!”

그리고는 녀석이 모자를 휙 손에 들더니 지팡이로 그 모자를 툭 친다. 모자가 뿌웨에에에엑, 구토하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시커먼 액체를 쏟아낸다. 쏟아진 액체가 꿈틀거리며 형체를 갖춘다.

엄청나게 흉측하게 생긴 괴물이었다. 덤으로 등짝에는 구멍 숭숭 뚫린 박쥐 날개가 달려있고, 날카로운 손톱이 길게 자란 손은 곧게 선 상태에서도 바닥에 끌릴 만큼 길었다. 그런 녀석이 두 마리나 튀어나왔다.

“음, 조금 파티 느낌이 나지 않는데…… 그래!”

녀석은 그런 소리를 내고는 그 흉측한 박쥐 날개 생명체 머리 위에 알록달록한 고깔모자를 하나씩 씌워준다.

“이제 좀 즐거운 분위기가 나네. 역시, 고깔모자는 행복의 상징이지.”

녀석은 키들거리며 가만히 서 있는 괴물들의 뺨을 토닥거리고는 외쳤다.

“가서, 손님들을 즐겁게 해주렴!”

퍼덕퍼덕, 날갯짓을 하던 녀석들이 우리를 향해 쏘아지듯 달려든다.

“이 새끼가 근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달려드는 괴물딱지의 면상에 검을 박아넣고 뒤로 빠졌다. 분신이 박혀있는 칼을 뽑아내 녀석의 목을 칼로 내려찍고, 내 쪽으로 다시 검을 던져준다. 나는 그 검을 받아들고 다시 달려들어 박쥐 괴물의 가슴팍에 커다란 십자 모양의 자상을 남겼다.

내가 그러는 사이, 괴물의 등 쪽에 나타난 분신이 날개 하나를 꺾어버렸다. 비명을 지르며 남은 날개 하나를 퍼덕이는 녀석의 등줄기에 검을 박아넣은 나는 얼굴을 구긴 채 중얼거렸다.

“진짜 사람을 무슨 병신으로 보나. 적당히 해야 할 거 아냐.”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눈이 허옇게 뒤집힌 사람 몇 명을 기절시키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바닥에 쓰러진 괴물은 몸을 한 번 부르르 떨더니 그대로 축 늘어진다.

“오?”

“오?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도대체 무슨 결과를 기대했길래 오? 하는 반응을 보이는 거야. 뭐, 그럼 우리가 저딴 너절한 거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토막 날 것 같았던 거냐.

첫 만남에는 저 새끼 하는 짓에 너무 당황해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방금 전까지는 테네스 공국에서 테네스 공국의 백성을 죽이면 안 될 것 같아서 조심스럽게 움직였을 뿐이다. 근데 대놓고 죽여도 괜찮다고 괴물딱지를 날려 보내주다니.

그사이 남아있던 한 마리도 투쾅,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땅을 박차고 벽에 부딪친 괴물을 향해 날아간 클로에가 괴물의 가슴팍에 레이피어를 박아넣었다. 이내 쿵, 쿵,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레이피어의 끝을 타고 연속으로 폭발하는 충격파가 괴물의 몸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마술이 형편없는데. 그 모자에서 하이랜더 같은 건 못 꺼내냐?”

그 정도는 뽑아낼 수 있어야 잠깐이나마 우리의 이동을 방해할 수 있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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