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내 말을 들은 광대가 흐흐흐, 하는 소리를 내더니 자기 입을 양손으로 꽉 틀어막고 있다가 이내 확 치우며 뭔가를 계속해서 토해내기 시작했다. 살펴보니, 트럼프 카드다.
“몇 대 때려주세요.”
우수수 쏟아진 트럼프 카드가 우리를 노리고 고속으로 쏟아진다. 그걸 보던 클로에가 싱거운 표정을 지은 채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는 클로에의 등을 향해 주먹을 몇 방 휘둘러 주었다. 충격을 흡수한 클로에가 정면에 그 충격을 그대로 뿜어내고, 날아오던 카드들이 방향을 잃고 엄한 곳에 처박혀버린다.
“장난 그만해.”
저 자식도 지금 제대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처음 항구에서 만났을 때는 이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내 말에 광대가 히죽 웃나 싶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자기 옷매무시를 가다듬는 시늉을 하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다.
“손님, 즐거운 공연이 되기 위해서는 연출과 구성이 아주우 중요하답니다. 나도 노력 많이 했다고.”
그래서, 지금은 에피타이저다 뭐 그런 뜻이냐.
“첫 단추가 허접하면, 이후로도 쭉 허접하기 마련이지. 별로 기대되지는 않는 공연이야.”
내 말에 녀석이 어허, 하는 소리를 내고는 나를 향해 떽! 하는 소리를 냈다.
“있어 보라고, 자기. 내가 좋아 죽게 만들어 줄게. 인내심을 가져. 성격이 그렇게 급하면 본방에 들어가서 찍 하고 싸 버린다?”
그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뭔가를 만들길래 긴장한 채 가만히 보고 있었더니, 종이접기를 하는 중이다.
대놓고 짜증 나는 녀석이다. 하는 짓도 그렇고, 분장도 그렇고. 거부감이 팍팍 치솟는다.
“저기……!”
약물이 담긴 커다란 통을 운반하던 녀석들의 외침에 시선을 돌려보니 굉장한 모습을 한 흉물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피범벅이 된 데드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발레리나다. 입고 있는 곰팡이 슨 하얀 발레복은 여기저기 오물이 엉겨 붙어있고, 다리에는 수십 개의 나사가 박혀 있는데, 그 박혀 있는 자리에서 고름 섞인 체액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나사의 용도를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피가 뚝뚝 떨어지는 날카로운 칼날이 발을 대신하고 있다.
희미하게 들리는 오르골 소리에 시선을 돌려보니, 광대 녀석이 건물 지붕에 앉은 채 바이올린을 하나 들고 춤곡을 연주하는 중이다.
“여기는 부탁한다.”
나는 클로에에게 뒤를 부탁하고, 눈앞에 있는 발레리나라고 해야 할지 어떨지 모를 흉물 쪽으로 달려들었다. 살짝 공중으로 뛰어오른 녀석이 내 머리통을 노리고 발차기를 넣는다.
찰나의 순간 세 번이나 때려 박힐 정도의 속도. 나는 그 공격들을 막아내며 틈을 보다, 나사가 잔뜩 박힌 종이를 꽉 붙잡아 땅바닥으로 메어쳤다. 하지만, 이 괴물은 남은 다리 하나로 바닥을 짚더니 휙 하고 턴을 하며 내 허리를 향해 다리를 휘둘렀다.
허상을 남기고 옆으로 빠진다. 녀석의 발 대신 달린 칼날은 허상의 허리를 핥고 지나갔다. 괴물은 뒤로 빠지면서 자세를 바로잡았다. 치킹,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긁는 칼날의 쇳소리와 함께 불똥이 튀나 싶더니, 유황 냄새와 함께 괴물 발레리나의 다리에 불이 엉겨 붙는다.
“와, 발레리나가 불탄다.”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허공에 만들어진 분신이 아래로 떨어지며 그 불타는 발레리나를 향해 검을 내려찍는다. 불타는 발이 땅을 쭉 쓸어내자, 화염으로 만들어진 벽이 확 일어나며 떨어져 내리던 분신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운다.
“…….”
발레리나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두 명의 나를 바라본다. 하나는 허상이고, 다른 하나는 진짜다.
허상은 검을 찌르고, 나는 뒤로 돌아간다. 동시에 원래 내가 있던 자리에 만들어진 분신은 발레리나를 반 토막 낼 기세로 검을 휘두른다.
발레리나는 몸을 돌려 찌르기를 피하고, 분신의 참격은 다리를 들어 막았다.
“까꿍.”
녀석이 몸을 틀었을 때, 비로소 뒤로 돌아간 내 모습을 확인한 모양이다. 급하게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발레리나의 불타는 다리가 나를 노리고 휘둘러졌지만, 그것보다는 내 공격이 더 빠르다.
휘둘러진 검이 발레리나의 허리를 자르고, 허리가 잘리기 직전 발악하는 느낌으로 휘둘러진 발레리나의 다리는 다시 나타난 분신이 막아내고 사라진다.
“크흐.”
허리가 베인 발레리나의 몸에서 흘러나온 것은 피가 아니라 시커멓고 고약한 냄새를 흘리는 찐득한 액체였다. 상반신이 잘려나갔음에도 불구하고, 발레리나의 하반신은 계속 움직여 내 머리를 향해 발차기를 날린다.
“어딜, 이 새끼야!”
머리를 노리고 휘둘러지는 발레리나의 다리를 향해 검을 휘두르자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다리에 달린 칼날에 금이 간다. 그 상태에서 다시 한번 참격을 날리자, 발레리나의 다리는 완전히 박살나 바닥에 떨어진다.
“이봐, 그거 힘들게 만든 건데!”
건물 위에서 그런 외침이 울려 퍼진다. 나는 그 광대의 소리를 무시하고 통을 옮기는 녀석들에게 말했다.
“얼마 안 남았습니다. 서두르죠.”
발레리나를 처리하면서 다시 길이 열렸다. 우리는 어떻게든 포경선이 정박해 있는 항구에 도착했다.
“짐을 옮기겠습니다! 약물을 보호해주세요!”
메이슨이 나와 클로에를 향해 외친 다음, 다른 사람들을 지휘하며 필요한 물자를 배로 옮기기 시작한다.
“원래는 창고에서 날라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 말에 메이슨이 대답했다.
“본디 계약대로라면 그래야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급하니 어쩔 수 없죠. 어느 정도의 물자가 필요한지는 이미 알고 있으니. 주변을 뒤져 물자를 챙긴 다음, 배로 옮길 생각입니다! 대금 지불은 나중에……!”
항구에는 필연적으로 물자가 많을 수밖에 없다. 다른 배에 싣기 위해 준비된 물자도 얼마든지 있다. 메이슨은 그것들을 챙겨서 우리가 타고 갈 포경선으로 옮길 생각인 모양이다.
“먼저 빌리고 허락은 나중에 받는다라.”
“강도질은 아닙니다. 정말로 나중에 대금을 지불할 생각이에요.”
뭐, 어차피 눈 까뒤집고 침 흘리면서 배 타고 나갈 수는 없을 테니. 그거 좀 빌려 쓴다고 뭐라고 할 녀석은 없겠지.
“알겠습니다. 물자 운반은 맡겨두겠습니다.”
말을 마친 나는 검을 휘휘 돌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불꽃놀이 다음은 맛탱이가 간 사람들, 맛탱이가 간 사람들 다음은 대가리에 고깔모자 쓴 박쥐괴물. 고깔모자 다음에는 불타는 발레리나였지.
그럼, 불타는 발레리나 다음은 뭘까.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근처까지 따라와서도 여전히 건물의 지붕 위를 고수하는 광대를 향해 검을 겨눴다.
“더 보여줄 거 없으면 빨리 내려와. 내가 올라갈까?”
광대는 그런 나를 응시하다 훌쩍 뛰어 건물 아래로 내려왔다. 휙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아니다. 마치 공기를 채워 넣은 풍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은 둥실거리는 느낌이었다.
“결국 주인공이 나서야 해결되는 법이지.”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히죽 웃으며 손에 들고 있는 지팡이를 빙빙 돌린다. 방금 전까지 얼굴에 가득하던 광기 어린 웃음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녀석은 꽤나 진지한 목소리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헤로스의 계약마가 되는 걸 도대체 왜 거부하려고 하는지 모르겠군. 생각해보라고, 완전해질 수 있는 기회 아닌가. 불멸의 정신과 육체. 거기에 더해 계약마가 되면서 갖추게 될 고유한 힘까지. 그 모든 것들을 거절하려 들다니.”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래 뭐, 세상에는 영원히 누군가의 노예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지. 취향은 존중한다.”
개목걸이 같은 건 필요 없나?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녀석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여차하면 챙겨둔 나비 조각을 통해 빛을 차단하고 바로 아이마스크를 쓸 생각이다. 다가오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광대는 내가 다가온 거리만큼 뒤로 빠진다.
“뭔가 노리는 게 있군?”
“아니, 그냥 좋아서 다가가는 거야.”
나는 검을 잡은 손에 힘을 넣으며 그렇게 대꾸했다. 잠깐 나와 녀석의 눈이 마주친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두른다. 광대는 지팡이를 휘둘러 검을 막아낸다. 검을 막아냄과 동시에 녀석의 옆에 나타난 분신이 다시 검을 휘두른다. 지팡이의 끝부분이 뱀의 머리로 변해 분신의 팔을 휘감아 공격을 막는다.
“조금 더 힘 써보지 그래.”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녀석의 배에 발차기를 박아넣었다. 북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살짝 뜬 채 뒤로 쫙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케헥!”
벽이 무너지며 자욱하게 깔린 흙먼지 너머에서 그런 소리가 들린다. 흙먼지 너머에서 서서히 다시 모습을 드러낸 광대는 외발자전거 위에 올라 단도 몇 자루를 가지고 저글링을 하고 있었다.
“저건.”
허공에 던져졌다 다시 광대의 손에 잡히는 단도의 끝부분에는 짙은 검은색으로 뭔가 문양이 새겨져 있다. 휙휙휙 소리를 내던 단검 중 한 자루가 나를 노리고 던져진다. 검으로 튕겨내자 근처의 가로수에 단검이 박혔다. 나무에 박힌 단검은 알록달록한 연기를 확 뿜어내고, 순식간에 나무의 잎사귀가 누렇게 뜨고, 이내 말라비틀어진다.
계속해서 단검들이 날아오고, 나는 별다른 말 없이 그 공격을 튕겨냈다.
“하! 제법인…….”
광대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 분신이 녀석의 뒤에 나타나 등짝을 발로 걷어찼다. 그 충격에 허공에 뜬 녀석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
날아온 녀석의 이마에 내 검이 박혔다. 검을 뽑아낸 나는 가슴팍에 검을 박아넣고, 그대로 쭉 내려그었다. 칼날은 녀석의 가슴부터 사타구니까지를 쭉 가르고 지나간다.
다시 나타난 분신은 이마에 칼집이 난 녀석의 머리통을 붙잡고 검을 휘둘러 모가지를 따낸다. 사과를 따는 것처럼 깔끔하게 녀석의 머리통이 몸에서 잘려나간다.
“지푸라기?”
몸 안에 차 있는 건 지푸라기였다. 그걸 확인한 나는 즉시 그 짚단을 채워 만들어낸 인형을 저 멀리 집어 던지고 주변을 살폈다.
“으흐흐흐흐흫! 바보 같으니라고.”
그제서야 한쪽 구석에서 희미한 검은 기운이 흩어지며 광대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바보 같다고 하기에는 댁의 몸 상태도 정상은 아닌데? 입에서 흐르는 건 케첩이냐?”
짚단을 채워 만든 인형이라고 해도 어느 정도는 피해를 공유하는 게 분명하다.
“이런, 들켰네!”
녀석은 그렇게 외치고는 자기 이마를 팍 하고 치더니 손수건을 꺼내 입가를 슥 훔쳤다. 그 와중에, 녀석의 눈에서 음산한 느낌의 보라색 빛이 번쩍였다.
“미리 말해두는데, 배는 바다로 못 나갈 거야.”
나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부터 바람이 한 점도 안 불더군. 네가 저질러 놓은 개수작이겠지.”
바람이 불지 않는 상황에서 범선은 움직이기 힘들다. 까놓고 말해 다리가 부러진 것과 똑같다. 녀석은 여전히 외발자전거에 탄 채 이리저리 균형을 맞추며 히죽 웃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저 통에 담긴 약물을 스스로 바다에 털어 넣고…….”
말을 마친 녀석이 손가락에 침을 바르더니 소매 안쪽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종이처럼 얇게 펴 놓은 금이었다. 그 위에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이 내용에 동의하도록.”
어떤 내용인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지금까지 제대로 싸우지 않고 장난질 치고 있던 이유도 이 쪼가리를 내밀기 위해서였을 거다.
나는 그 금종이를 받아들고는 그대로 손에 힘을 줘 구겨버렸다.
“엿이나 처먹어.”
“아, 저런.”
녀석이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가 다시 내렸다. 거기에는 얼굴의 분장이 울고 있는 광대 모습으로 변했다.
“이걸로 최후통첩까지 끝났어.”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외발자전거 위에서 양손을 꽉 맞잡았다. 나는 곧바로 바닥에 드리워진 그림자를 살폈다. 이전처럼, 빠르게 그림자가 회전하기 시작한다. 울고 있는 화장과는 다르게 녀석은 이를 드러내고 웃고 있었다. 훤하게 드러난 누런 이빨은, 짐승의 어금니처럼 날카로웠다.
“갈 때는 웃으면서 가라고. 우는 얼굴로 죽으면 시체는 평생 그 표정으로 썩어갈 테니!”
“충고 고맙다. 너도 갈 때 웃으면서 가라.”
녀석에게 바짝 붙은 나는 곧바로 챙겨둔 나비 장식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내 주머니를 중심으로 회색의 반구가 쫙 퍼지는 형상이 보였고, 그 뒤로는 암흑만이 자리 잡았다. 나는 재빨리 안대를 꺼내 눈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