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18화 (218/275)

218화

청백색의 선으로 주변 사물의 외곽이 그려진다. 거기에는, 분명히 광대 녀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 뭔가 했더니! 놀고 있지는 않았군 자기!”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평정심을 가장하고 있지만, 당황한 기색을 완전히 숨기지는 못했다.

더 놀 시간 없다. 저 자식이 그림자를 움직였다는 건 이게 무조건 본체라는 뜻이다. 어차피 저 녀석은 이 공간 안에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렇다면, 사물의 형태를 알 수 있는 내가 더 유리하다.

절대로 거리를 벌리면 안 된다. 머릿속으로 주의해야 할 점들을 수도 없이 되뇌면서 나는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응? 방금 뭐 했나?”

녀석의 머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녀석의 팔이 꿈틀거리며 기이한 형상을 만들더니, 내 검을 휘감았다.

“시간, 회색 높푸른 강낭콩을 오해하는 매운 색깔 자루 소리. 우울한 해초와 행복한 유리색은 면도하나? 나사에 소금간을 잊지 말아요.”

문장이라고 할 수도 없는 소리를 마구 내뱉는 와중에 갑자기 뭔가가 내 가슴을 퍽 하고 후려쳤다.

몸이 붕 뜨는 와중에 등 뒤에 분신을 만들어내 몸을 받치게 했다. 하지만, 가슴을 후려친 통증은 여전히 남아있다. 울컥, 하고 입가로 피가 올라온다.

“으흑, 으흐흐헤헤헤헤헤헤! 빼꼭 삐꿉어 빠빵하는 빠가사리. 삶은 시소 손바람이 사무치는 사랑니. 아직 아는 아리아는 아마 오늘 오시나?”

그 와중에 녀석은 미친 듯이 웃음과 함께 다시 뜻 모를 개소리를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 바닥에 떨어뜨렸다. 뼛조각인가? 순식간에, 창백한 형상으로 표시된 뼛조각은 부쩍 그 크기를 키우더니 그대로 날카로운 창이 되어 내 머리통을 노리고 날아든다.

지금 내가 날아오는 장면을 보고 있다면…… 나는 곧바로 검을 들어 올렸다. 카가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검 끝을 타고 충격이 밀려온다. 뒤늦게, 내 검에 부딪혀 박살난 뼈창의 조각들이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다.

“아학, 아하하하하하학!”

숨이 넘어갈 것처럼 웃는 녀석의 모습을 향해 검을 휘두르자. 칼이 녀석의 팔을 잘라냈다. 잘려나간 팔이 휙 하고 날아와 내 목줄기를 붙잡는다.

“오, 우리 짜르릉 쿵쾅 춤을 부셔요. 고름 걸린 나뭇가지가 맵고 있잖아요. 우지끈 내장에 박힌 톱니바퀴가 눈웃음 짓는 신비한 익사! 신비한, 익사! 크헤헤헤헤헿! 익사!”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기괴한 형체가 녀석의 가슴을 찢고 튀어나온다. 제대로 보는 게 아니라, 단지 윤곽선만 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머리가 아득해질 정도로 기괴한 형상이었다.

사람 같기도 하고, 소 같기도 한 녀석은 액체인지 고체인지 모를 무언가를 입에서 줄줄 흘리며 손을 닮은 꼬리…… 어쩌면 꼬리를 닮은 손일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나를 향해 토했다.

“크흐…….”

그 정체불명의 공격이 팔뚝에 닿았다. 맞은 것 같기도 하고, 피한 것 같기도 하고, 막은 것 같기도 하다.

팔을 타고 전해지는 고통은 둔기에 후려맞은 것 같기도 하고, 날붙이에 베인 것 같기도 하다. 아니, 이 고통은 어디를 타고 머리로 전달된 거지? 팔을 공격당한 것 맞나?

“감각이…….”

귀로 호흡하고, 코로 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내 몸의 어디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오감이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건지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뒤엉키고 있다.

예를 들어, 눈깔로 냄새를 맡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오늘 처음 알았다.

다리가 움직이려 하면 난데없이 팔이 움직이고, 눈을 깜박이면 갑자기 입꼬리가 올라간다.

“꽁꽁 고사리 걸린 마파람에 물구나무 짹짹하네. 소나무 비늘에 단불이 덜그럭!”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상황을 세 글자로 축약하면 무력화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하지만, 일반적인 무력화와는 너무 다르다. 사지를 묶는 것도 아니고, 마비시키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 몸의 어디를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들었을 뿐이다.

“으흐, 으흐, 으흐흣.”

녀석이 뒤로 물러나려고 한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녀석이 뒤로 빠지는 자리에 만들어진 분신이 녀석을 향해 검을 휘두른다. 녀석이 움찔하고는 분신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리에 멈춘다. 분신은 괜찮다. 몸의 감각이 맛탱이가 갔다고 해도 머리까지 맛탱이가 간 건 아니니까.

분신은 내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인다.

이러면 천상 분신만 가지고 싸워야 하나.

“조금 부족했나? 다들 이 정도 해주면 좋아 죽던데.”

광대는 계속해서 나타나고 사라지는 분신의 공격을 피하며 우울하다는 듯이 칭얼거리며 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우드드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거대하게 변한 팔이 늘어나 내 쪽으로 달려든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으니, 무조건 막아야 한다.

거듭해서 만들어지는 분신이 팔뚝을 마구 내려찍는다. 뻗어진 팔이 내 몸에 닿기 전에 잘라내는 데 성공했다.

“흐으…….”

이걸 오래 유지할 수는 없을 거다. 원리는 모르지만 한 사람의 몸을 이렇게까지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유지하는 행위가 적은 마력을 소모할 리가 없다. 실제로, 녀석은 내가 그 거대화된 팔을 잘라내는 동안 충분히 거리를 벌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를 벌리지 못했다.

저 녀석도 지금 지쳤다. 젠장, 몸만 제대로 움직여 준다면 제대로 한 방 먹일 수 있을 텐데! 다시 한번 손을 움직여 봤지만, 이번에는 난데없이 들숨이 팍 하고 흘러나온다. 도대체, 무슨 원칙을 가지고 작동하는 거야. 방금 전에는 손을 움직였더니 다리가 움직였잖아.

녀석이 급작스럽게 거리를 벌리려 든다.

“그렇게는 안 될걸. 우리 친하게 지내자고, 이 개자식아.”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분신을 만들어내 몸을 광대 쪽으로 집어 던졌다. 제대로 움직이지 못해 축 늘어진 몸이 분신의 도움을 받아 광대 쪽으로 날아간다.

“제 발로 죽으러 오는 건가!?”

녀석의 손에 들린 단검이 보인다. 다시 한번, 분신이 나타나 녀석이 던진 단검을 튕겨내고 광대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내려찍었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어깨에 분신이 휘두른 검이 박혀들었다.

“크흐.”

녀석은 그런 소리를 냈다. 이건 유효타다.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이 창백한 형상으로 보인다. 그리고, 순식간에 몸의 감각이 다시 정상으로 돌아왔다. 걸어놓은 마법이 풀린 거다.

“넌 뒤졌어. 이 개새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발을 크게 구르며 녀석을 향해 쇄도했다. 하지만, 내 공격은 누군가에 의해 막혔다. 광대 새끼가 막은 게 아니다. 이내 귀에 딱, 딱, 하고 입에서 혀를 튕겨내는 소리가 들렸다.

시각장애인 중에 저런 소리를 내서 주변을 파악하는 경우가 있다고 듣기는 했었지.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으면, 마담께서 참견하라 하셨습니다. 모셔도 괜찮겠습니까?”

여자의 목소리였다.

“젠장. 누구 맘대로…….”

광대의 목소리에는 확실히 힘이 빠져 있었다. 그 대화를 들은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하고는 말을 걸었다.

“마담이라. 혹시, 그 얼굴 한쪽 작살난 여자?”

내 말에 휙휙 하고 검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계약자 마틴 레드우드 님. 헤로스 님의 간택을 받았다는 점은 존경해 마지않을 점이지만, 제가 섬기는 마담께서는 그런 식으로 불릴 만한 분이 아니십니다. 말씀을 조금만 완화해 주셨으면 합니다.”

“공손하기도 하지.”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잠깐 두 녀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한숨을 팍 내쉬고 검을 내리고 자세를 풀었다.

“데려갈 생각이라면 데려가. 나도 지쳤으니 더 이상 싸울 생각은 없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광대 녀석의 뒤편에 분신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분신이 광대의 머리를 향해 검을 내려찍으려는 순간 저 멀리에서 날아온 화살이 분신의 머리통을 꿰뚫었다.

“마담께서는 단지 계약자의 안전을 확보하라고 하셨습니다. 저희는 계약자 마틴 레드우드 님을 지금은 적대할 생각이 없습니다만, 계속해서 이런 상황을 이어가신다면 저희로서도 선택지가 없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이거 복잡해지는데, 지금 이 주변에 저런 녀석들이 몇 명이나 자리 잡고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걸린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걸 살려 보내는 건 또 뒷일이 귀찮아질 게 너무 뻔하다. 거기에 더해, 저 녀석은 이제 내가 자신이 주로 사용하는 수작질에 대응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까지 안다.

다음에 저 새끼 면상을 또 보게 된다면, 지금처럼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녀석을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에서 무턱대고 싸움을 이어가는 것도 위험하다. 주변에 몇 명이나 숨어있는지 알아낼 수 있다면야 싸움을 이어갈지, 아니면 그만둘지 선택할 수 있겠지만.

지금 나는 시각이 막힌 상황이다. 섣부르게 공격했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 고민을 마친 나는 자세를 풀며 말했다.

“데려가.”

저 녀석이 대비책을 마련해 온다면, 우리도 다시 대비책을 개선하면 된다.

“현명한 판단입니다. 그럼 이만.”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광대 녀석을 부축한 채 순식간에 멀어진다. 나는 나비 장식에 불어넣던 마력을 차단하고 안대를 벗었다.

“약간 뒤끝이 쓰리긴 하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명확하게 우리의 승리다. 광대 자식은 결국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고, 우리는 바다로 나갈 거다. 바다로 나가게 된다면, 녀석들도 우리를 추격하는 데에는 한계가 생긴다. 슬쩍, 바람이 다시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부상자를 치료하고, 멀쩡한 사람들은 항해 준비를 마쳐!”

빠르게 준비를 마친 우리는 배 위에 올랐다.

* * *

광대는 불쾌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몸을 살펴보다가 헛구역질을 몇 번 하더니 입에서 찐득한 액체를 한 바가지 쏟아냈다.

“아침에 먹은 스튜가 이런 색깔이었나? 하!”

그런 쓸데없는 소리와 함께 쇳소리 섞인 웃음을 터뜨린 광대는 입가를 슥 훔치고 문을 바라봤다.

바라보기가 무섭게 팍 하고 문이 열리며 짙은 보라색 베일로 얼굴을 가린 숙녀가 손에 쥘부채를 든 채 안으로 들어왔다.

“꼬라지 하고는. 큰소리 떵떵 치며 가지고 놀겠다고 하더니.”

비꼬는 것 같은 여자의 말에 광대가 다소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일이 마음먹은 대로 흘러간다면야 댁 면상 반쪽이 갈려 나갈 일도 없었겠지.”

그 말에 뒤따라 들어온 여자의 부하들이 허리춤의 검으로 손을 가져간다. 광대는 그 녀석들을 바라보나 싶더니 끄응, 하는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나 녀석들을 바라본다.

“뭐, 할 말 있나?”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인 녀석들을 향해 여자가 입을 열었다.

“그만, 자세 풀어.”

여자의 말에 검 자루에 손을 올려놓았던 자들이 다시 자세를 바로잡는다. 광대는 그런 녀석들을 바라보다가 픽 웃고는 베일을 쓴 여자를 바라보며 웃는다.

“화풀이라도 좀 해볼까 했는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잖아, 머저리 새끼.”

자리에 앉은 여자는 자기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입을 열었다.

“마틴 레드우드 건은 나에게 넘겨. 네까짓 녀석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녀석이 아니야.”

광대는 와우, 하는 소리를 내고는 여자의 얼굴을 가린 베일 바로 앞까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었다.

“마치 너는 어떻게 할 수 있을 것처럼 말하는군.”

“당연하지. 너 같은 미친놈과는 달라. 휘하에 수천의 부하를 두고 있고, 그 부하들은 하나같이 목숨을 바칠 정도로 내 명령에 복종하지.”

말을 마친 여자는 베일의 한쪽을 걷었다. 멀쩡한 그녀의 한쪽 얼굴이 드러나고, 그 눈동자가 광대에 대한 경멸을 담고 그의 얼굴을 슥 훑어본다.

“나는 개인이 아니라 조직이야. 소수는 다수를 이길 수 없어.”

“재미있는 말을 하는군. 그렇다면 항구에서 나를 빼내는 게 아니라, 협력했어야지.”

“헤로스 님이 약속한 건 계약마로 타락하는 기간의 완전 소멸이지? 그걸 둘이 나누면 타락 기간을 반으로 단축하는 것밖에 안 되잖아.”

즉시 계약마의 자격을 갖추는 것과, 계약마로 타락하기 위해 고통받아야 하는 시간을 반으로 줄이는 건 굉장한 차이가 있다. 부채의 완전 탕감은 자유를 의미하지만, 부채를 절반 탕감해 주는 건, 아직도 절반이 남아있다는 뜻이니까.

광대는 그 말에 혀를 찬 다음 대답했다.

“욕심이라. 뭐, 파티의 주인공이 나에게서 너에게로 넘어갔다는 건 인정하지. 일단은…… 네 실패를 기대하며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연극에는 순서가 있는 법이고, 좋은 광대는 자신의 순서를 지키는 법이니까.”

“네 순서는 돌아오지 않을걸. 그나저나 바다라. 써먹을 만한 게 있겠군.”

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살짝 걷었던 베일을 다시 내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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