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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20화 (220/275)

220화

녀석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선장 모자 쓴 시체가 나를 보고 히죽 웃었다.

― 우리는 심연의 똘마니다. 샐 수 없을 정도로 긴 세월 바다 아래의 고요한 죽음 아래에서 물결치던 소금기에 찌든 원념이다!

“그래, 염장이 잘되었다는 건 댁 몸 상태를 보면 알 수 있군.”

아주 그냥, 뼛속 깊은 곳까지 바닷물에 불어터진 것 같은데. 녀석은 커틀러스로 나를 겨누었다.

― 오늘, 나 선장 에이븐은 네 녀석의 삶에 끝을 고하면서 이 소금과 파도로 뒤얽힌 굴레를 벗어던질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배 건너편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클로에를 향해 외쳤다.

“자기가 선장 에이븐이라고 하는데, 뭐 아는 거 없냐?”

내 말에 클로에가 외쳤다.

“약 70년 전에 행방불명 된 사략선 엘리엇호의 해적 선장이에요!”

나는 그 말에 아하, 하는 소리를 내고 선장을 바라봤다.

“꽤 유명한 인물인가 봐?”

내 말에 에이븐이 소금기에 찌든 수염을 불어터진 손가락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 얘들아, 손님들께서 우리가 누군지 잘 모르신단다! 바다의 공포라 불리는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저 도련님께 천천히, 친절히 알려드려라!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커틀러스를 휘둘러 난간의 쇠 장식을 후려쳤다. 까앙,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바로 축 늘어져 있던 시체들이 고개를 팍 들고 키들거리기 시작한다.

― 도련님, 귀한 집 자제 같아 보이는데. 바다가 위험하다고 엄마가 말해주지 않던?

녹슨 단검을 할짝이며 떠드는 말을 들어보자니, 이 자식들은 하나하나 전부 지성이 남아있는 언데드로 보인다. 지성이 제대로 남아있는 언데드는 강력한 언데드라고 엘렌이 말해 줬었던 기억이 난다. 벌겋게 녹슨 단검을 혀로 할짝이던 녀석이 번개처럼 나에게 달려들었다.

― 이런 위험한 아저씨들이…….

녀석은 말을 마저 하지 못했다. 그야, 다가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이 뻗어진 무릎이 녀석의 가슴을 박살 내버렸으니까. 손을 뻗어 머리를 붙잡은 나는 목줄기에 검을 박아넣은 다음 손잡이를 아래로 꽉 누르자, 칼날이 지렛대처럼 움직여 녀석의 머리통을 몸통에서 뜯어낸다. 나는 뜯어낸 머리통을 바닥에 던지고 발로 밟으며 대답했다.

“빙신아, 내가 위험한 아저씨야. 니들이 뭣도 모르고 무서운 아저씨에게 달려든 꼬꼬마들이고.”

유령선이라, 오냐. 오늘 한번 죽어보자. 바닥에 침을 뱉은 나는 삐걱이는 소리가 퍼지는 갑판 위에서 나를 상대로 무기를 치켜든 시체 해적 중 한 녀석과의 거리를 바짝 좁혔다. 언데드가 팔을 휘둘러 나를 노리고 커틀러스를 내려찍는다. 검을 들어 막아내자, 상당히 묵직한 충격이 몸을 타고 퍼진다.

“그래, 뭐. 불어터진 근육치고는 제법이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검을 흘려내고 녀석의 가슴에 검을 박아넣었다. 시체답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가슴에 검을 박아넣은 나를 향해 공격을 이어간다. 검을 놓고 뒤로 빠지자, 녀석들 사이에서 키들거리는 비웃음이 들린다.

― 꼬마 도련님, 아무리 급해도 장난감을 두고 가면 어쩌…… 어어?!

키들거리며 자신의 가슴에 박힌 검 손잡이를 툭툭 치던 녀석은 자신의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분신이 칼을 뽑아내자 기묘한 소리를 냈다. 칼날이 뽑힌 자리에서 주르르, 탁한 액체가 흘러내린다. 분신은 뽑아낸 검을 나에게 던져주고 사라졌다.

“장난감이 뭐? 친구야, 하던 말은 마저 해야지.”

나는 그렇게 비꼬듯이 말한 다음 손에 쥔 검을 다시 발로 힘껏 차서 녀석들에게 날렸다.

― 이 자식이!

까앙, 하는 소리와 함께 던져진 검이 시체가 휘두른 커틀러스에 의해 허공으로 튕겨 나간다. 분신이 튕겨 나간 검을 허공에서 붙잡고, 그대로 떨어져 내리며 시체의 팔뚝을 썰어낸 다음, 다시 검을 허공에 던진다. 나는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 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허공에 던져진 검 근처에 나타난 분신이 시체 중 하나를 노리고 검을 발로 차서 날린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갑판에 박힌 검을 또 다른 분신이 나타나 휘두르고 사라진다.

계속해서 검과 함께 나타나고 사라지는 분신에 의해 유령선의 선원들이 당황한다. 내가 움직일 필요도 없이, 분신과 던져진 검만으로 세 마리 정도의 언데드를 요리하는 데 성공했다. 분신이 나를 향해 발로 칼을 차서 날려준다.

날아온 칼을 받아든 나는 칼을 휘휘 돌리며 에이번이라고 하는 선장 놈을 바라봤다.

“바다의 공포가 아니라, 혹시 바다의 광대 아니야?”

하는 짓이 완전 병신과 머저리가 따로 없을 지경인데. 이 정도면 현상금 500베리로 충분하겠는걸.

내 말을 들은 선장이 몸을 부르르 떤다. 그에 맞춰, 물이끼와 소금기가 엉겨 붙은 턱수염도 덩달아 흔들린다.

“뭐야 그건, 구애의 춤 같은 거냐? 바다에서 죽은 녀석들은 지금이 번식기인 모양이지.”

내 말에 녀석이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한 채 외쳤다.

― 내 반드시 저 녀석의 시체를 조각내 수장시키리!

“같은 언데드라고 해도 어쩜 저리 품격이 없을까.”

임마, 카루토스 타카운은 언데드이긴 하지만 던지는 말이나 하는 행동이 꽤나 그럴듯한 녀석이었어. 너는 왜 유령선 선장씩이나 되었으면서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초라하냐.

― 배를 점령해라! 저 자식은 내 몫이다!

언데드 선장 에이번은 자신의 졸개들에게 그렇게 외친 다음 커틀러스를 뽑아 들고 내 앞에 섰다. 언데드 선원들은 선장의 지시대로 클로에가 지키고 있는 포경선으로 건너갈 준비를 서두른다.

“클로에!”

“문제없어요, 여기는 맡기고 눈앞의 수염쟁이한테 집중하세요!”

좋아, 나는 검을 뽑아 들고 녀석을 겨누었다.

― 네 녀석은 아무것도 모른다. 이 검과 안개에는 지난 세월 켜켜이 쌓인 원령의 무게가 함께한다.

녀석이 뽑아 든 검에, 주변에 자욱하게 깔려있던 안개들이 휘감기기 시작한다. 휘감기는 안개 사이 사이로 울부짖는 사람의 얼굴 같은 형상이 나타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응축된 안개는 커틀러스의 크기를 몇 배는 더 크게 만들었다.

“안개를 모으는 검이라. 가습기로 쓰면 딱이겠는걸.”

녀석은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대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수백 명이 동시에 울부짖는 것 같은 날카로운 비명과 함께 검에 휘감겨 있던 안개가 눈사태처럼 나를 향해 쇄도한다. 자욱하게 밀려오는 안개 속에서, 사람의 형체 같은 것들이 나를 노리고 손을 뻗는 광경이 보인다.

몰려오는 안개를 피해 몸을 날리자, 쏟아지던 안개가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뚝 멈추고, 소용돌이치며 하늘로 솟구치며 퍼진다. 퍼지는 안개에 살이 닿자, 얼어붙은 강물 속에 몸을 담근 것처럼 몸이 오싹거린다. 제대로 얻어맞으면 심장마비 걸리겠는데.

― 몸놀림은 날래군. 하지만 바다는 그 정도로 이겨낼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우리는 심연의 검은 물 아래 자리 잡은 침묵의 바다 끝에서 퍼 올린 힘으로 무한히 새로워진다!

녀석이 어깨 위에 턱 하니 걸친 커틀러스에는 다시금 안개가 휘감겨 있었다.

― 그 삶에 더 이상 순풍은 없나니. 그 육신은 심연 깊은 곳까지 침잠하리.

바닥을 굴러다니던, 내 손에 작살난 언데드들이 으득, 으드득 하는 소리를 내며 다시 몸을 회복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 뭐, 너무 쉽다 했어.”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녀석들의 면상을 노리고 소금을 한 줌 뿌려봤다. 팍, 하고 얼굴에 소금을 얻어맞은 시체가 히죽 웃으며 머리를 타고 흘러내리는 미역을 손으로 걷어내며 외친다.

― 우리는 짠물 아래에서 죽은 다음 되살아났다. 소금이라니. 꼬마 도련님, 그딴 게 먹힐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이건 쓸모없다 해두고.

나는 휙 하고 바닥에 소금이 담긴 주머니를 버린 다음 히죽거리는 녀석을 무시하고 해적 선장에게 다가갔다.

“아까부터 신경 쓰이는 건데. 그 가슴에 달린 주머니는 뭐냐?”

내 말에 녀석이 퉤, 하고 입 안에 들어갔던 작은 게를 땅바닥에 뱉어버리고 입가를 닦았다.

― 네 녀석이 알 바는 아니지.

녀석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에 달려 있던 작은 주머니를 슥 하고 옷 속으로 감춘다.

“아하, 중요한 거구나? 솔직하지 못하긴.”

이 배의 다른 것들과는 다르게, 저 주머니만큼은 전혀 세월의 풍파 속에 손상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녀석은 안개가 휘몰아치는 검으로 나를 겨눈 채 대답했다.

― 알기 전에 죽을 테니, 궁금해하지 마라.

“그럼 알려주고 죽이면 되잖아. 웃긴 녀석이네.”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 유령선에는 산 사람이 타고 있다.

바닥에 약간 떨어져 있는 비스킷 가루.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언데드와 달리 물과 식량을 필요로 하는 산 사람이 이 배 안에 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아마 모습을 감춘 채 나와 이 후크 선장이 싸우는 모습을 관찰하고 있겠지. 아마, 꿈속에 나왔던 그 여자가 아래에 두고 부리는 졸개 중 하나일 것이다. 광대와는 달리, 그 여자는 나름대로 조직 비슷한 걸 갖춰두고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여기에서 내가 은신을 사용해 손쉬운 승리를 따내면 그 과정은 분명히 그 얼굴 반쪽이 작살난 여자가 알게 될 것이다. 이전에는 죽은 시체를 터뜨린 이력이 있으니, 이 배에 숨어있는 녀석을 찾아내서 죽인다 해도 그 여자에게는 소식이 전달될 확률이 높다.

은신을 사용한다면야 훨씬 더 쉽게 승리를 얻어낼 수 있겠지만, 괜히 일 편하게 끝내겠답시고 나중에 취할 수 있는 선택지의 개수를 줄일 수는 없지.

― 핫핫핫!

독특한 웃음소리와 함께 녀석이 나를 향해 안개에 휘감긴 커틀러스를 휘둘렀다. 제법 속도가 빠르다. 검을 들어 막아내자 후우욱, 하고 뿜어져 나온 안개가 내 몸을 덮친다. 몸 안에 얼음이 차오르는 느낌과 함께 귓가에 기괴한 속삭임이 울려 퍼진다.

그 속삭임들은 내가 얼마나 나쁘고 이기적인 개자식인지 떠들어 대면서, 동시에 이 싸움에 승산이 없으니 항복하라는 말을 지껄인다.

“거참. 언데드도 되지 못한 너절이들이 말이 많네.”

저 속삭임들은 분명히 불쾌하지만, 사실 그것보다는 안개가 몸에 닿으면서 척수를 타고 퍼지는 것 같은 싸늘한 감촉이 더 불쾌하다.

― 버티는 건가. 제법 척추에 힘을 넣을 줄 아는 녀석이군.

“시끄러.”

검에 닿은 커틀러스를 밀어내고 녀석의 가슴을 향해 반격을 먹이자. 녀석이 커틀러스로 가슴을 가려 공격을 막아낸다. 이 자식, 제법 잘 싸운다. 공격하면서 좀처럼 빈틈을 노리는 게 쉽지 않다.

― 제법 잘 싸우는 모양이군. 한번 제대로 놀아줄 가치가 있겠어, 응?

녀석은 커틀러스를 들어 올려 일자 모양으로 세운 다음 왼손으로 등을 짚었다. 팔이 꿈지럭거리는 걸 보니, 또 뭔가 개수작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인데.

“지옥에 안 떨어지고 지금까지 이승을 떠도는 이유가 있었군.”

말이 저리 많으니, 지옥에서도 받아주고 싶지는 않을 거야. 녀석은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오며, 곧게 세우고 있던 커틀러스를 살짝 아래로 내렸다. 저 새끼, 왼손에 지금 모래 같은 걸 쥐고 있는 게 분명하다.

― 죽어라!

커틀러스가 휘둘러지자, 그 궤적을 따라 안개가 쫙 딸려 들어간다. 몸을 뒤로 젖히자, 참격의 형태로 변한 안개의 파도가 내 몸 위를 스치고 지나간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나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원거리 공격이라.

“발포!”

갑자기, 포경선에서 선장의 외침과 함께 뭔가 투웅, 하는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내, 유령선의 뱃머리에 콰지직 하고 뭔가 박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낡은 갑판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건 포경선이다 이 씹새들아! 포경선이 뭐 잡으려고 만들어진 배인 줄 아냐! 고래야 이 개새끼들아! 고래! 네깟 시체 녀석들의 다 부서져 가는 배 따위는 이걸로 개박살 낼 수 있다! 다음! 자앙저언!”

선장은 시뻘겋게 흥분으로 달아오른 얼굴로 언데드들을 향해 겁도 없이 사자후를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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