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포경선의 주무기는 당연히 작살이다. 그것도 그냥 작살이 아니라, 고래도 때려잡는 특제 초거대 작살이다. 당연히, 그런 작살은 배에 발사해도 훌륭한 무기가 된다.
“얌전히 숨어있으라니까.”
하여튼 배에서 사는 녀석들은 다른 사람들 말은 겁나게 안 듣는다니까.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선원들이 클로에와 메이슨의 보호를 받으며 빠르게 작살을 재장전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온다.
다시 고개를 돌리자, 거기에는 검을 휘두르고 있는 시체 선장의 모습이 보였다. 피하기에는 좀 늦었고…… 나는 휘둘러지는 검의 궤적에 따라 검을 가져갔다. 다시 한번 참격과 함께 뿜어진 안개가 내 검과 서로 부딪친다.
“크흐.”
충격과 오금이 얼어붙는 감각을 느끼며, 내 몸은 뒤로 쭉 밀려났다.
― 이 자식들이.
선장의 얼굴에 시퍼런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기 시작한다. 썩은 동태 눈깔 같던 눈동자도 흰자위까지 시커멓게 변해 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다.
― 감히 나의 엘리엇을 다치게 하다니. 그래, 화가 난 바다를 보고 싶다 그거냐? 그렇다면 좋다.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지.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나서 검을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안개가 검을 향해 모여들지 않았다. 대신, 피부로 공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배를 감싸고 있던 안개가 빠른 속도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크흐.”
안개가 휘몰아치기 시작하자, 아까 느꼈던 그 서늘한 감각이 다시 몸을 덮치기 시작한다. 그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서, 기세 좋게 다음 작살을 장전하던 포경선의 선원들도 창백하게 질린 표정을 하고 몸을 떨고 있었다.
뽕, 하는 소리와 함께 녀석은 술병을 까더니 내용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이제, 죽어라. 심연이 너를 기다린다.”
휘몰아치는 안개는 마침내 바다에까지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불어닥치는 바람에 이리저리 떠밀리며 바다가 난폭하게 날뛰기 시작한다.
“닻을 올려라! 정신 차려 이 머저리들아!”
입술이 파랗게 변한 채, 포경선의 선장이 급박하게 선원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닻, 닻을 올리라 하신다!”
선원들 중 몇 명이 그 호령에 정신을 차리고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다른 선원들도 차츰 정신을 차리기 시작한다. 그건, 선원들의 정신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다.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깔려있던 안개가 전부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리겠군.”
하늘에 드리워진 짙은 먹구름, 그리고 동시에 희미하게 울려 퍼지는 천둥. 날뛰기 시작하는 바다. 이 유령선이 안개로는 부족해서, 마침내 말짱하던 바다에 폭풍을 불렀다. 툭, 툭, 뺨을 때리던 물방울은 점점 내 얼굴에 닿는 빈도수가 많아지더니, 이내 폭풍우가 되었다.
몰아치는 바람과 쏟아지는 거친 비. 거칠게 들썩이는 파도는 내가 타고 있는 유령선과 아군이 타고 있는 포경선의 멱살을 붙들고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한다.
― 마음에 드나? 모름지기 뱃사람이라면 이 정도 폭풍우는 고향처럼 포근하게 여겨야 하거늘!
쏟아지는 빗속에서 녀석의 커틀러스가 나를 노리고 휘둘러진다. 검을 막아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파도에 배가 흔들리며 몸의 균형이 무너진다.
“이런 망할.”
폭풍우 치는 배 위에서 싸워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때는 내 손에 검이 아니라 총과 수류탄이 쥐어져 있었지.
― 왜 그러나, 가정교사가 폭풍우 치는 바다에서의 싸움은 가르쳐주지 않았던 모양이지? 하!
녀석은 그렇게 외치며 나를 향해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기 시작한다. 파도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나는 억지로 균형을 잡으며 녀석의 검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그 와중에, 물이 차오른 갑판 위에서 내 발이 쭉 미끄러진다.
젠장, 비 때문에 갑판 위에 잔뜩 끼어있던 이끼!
― 이랴!
녀석이 그 틈을 노리고 내 가슴을 향해 검을 내지른다. 급하게 만들어낸 분신으로 그 공격을 막아낸 나는 뒤로 쭉 물러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젠장, 되게 힘들군.”
롤러코스터 위에서 검을 휘두르는 기분이다. 하지만, 역시 노려야 하는 건 분명하다. 아까 저 녀석이 가슴 속으로 숨긴 주머니. 만약 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할 방법이 있다면, 바로 그 주머니 안에 담겨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파도가 배를 흔들었다. 그 바람에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 으하하하하하핫!
그 와중에, 해적 선장 놈은 밧줄을 붙잡고 다 부러진 마스트 위로 훌쩍 올라가더니, 이어서 내 머리를 쪼갤 기세로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진다. 옆으로 굴러서 피하자, 비웃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귀를 간지럽혔다.
― 조심하라고.
나무통 하나가 나를 향해 데굴데굴 굴러오는 광경이 보인다.
“하.”
굴러오는 나무통을 분신이 번쩍 집어 들고는, 곧장 망할 놈의 해적 선장을 향해 집어 던진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나무통을 얻어맞은 선장이 웃음을 터뜨린다.
― 다 썩은 나무통이 그리 위험해 보이던가, 응?
쏟아지는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다. 망할 자식.
― 거기 몇 놈! 이리로 넘어와라. 도련님의 파트너가 좀 부족한 것 같다! 격에 어울리는 대접을 해줘야지, 응?
에이번의 외침에 열댓 마리의 언데드 해적들이 키들거리며 훌쩍 뛰어 포경선에서 다시 유령선으로 돌아온다. 그 와중에 포경선을 슥 보니, 선장과 선원들은 폭풍우에 대응하느라 더 이상 포경선의 작살을 조종할 여유가 없어 보인다. 클로에도, 흔들리는 배 위에서 어떻게든 언데드 선원들을 막아내고 있지만, 갑작스러운 기후 변화로 인해 이쪽에 신경 쓸 여유는 없어졌다.
다들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상황이다. 도움을 기대하는 건 포기해야겠군.
오히려, 저쪽에서 가까스로 버티는 사이 내가 어떻게든 저 해적 선장 놈을 조져내야 할 것 같은 느낌이다. 그때, 하늘에서 우르릉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에이번을 향해 벼락이 한 줄기 떨어져 내렸다.
―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보아라, 이것이 바로 바다의 분노다. 그 분노는 내 손 안에 쥐어져 있다!
녀석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커틀러스에서 창백한 스파크가 날뛰는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대단한 토르 나셨어 아주. 그리고 벼락이 무슨 바다의 분노야. 하늘의 분노지. 하지만 거기에 대해서는 불평할 여유가 없었다. 녀석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나는 볼 것도 없이 허공으로 몸을 던졌다. 내가 서 있던 자리를 후려치는 창백한 번개와 함께 머리카락이 쫙 서는 느낌과 함께 몸을 타고 찌릿찌릿한 감각이 퍼진다.
만약, 그대로 있었다면 찌릿거리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겠지. 허공에서, 녀석의 검에서 지랄발광을 하던 창백한 스파크들이 사라진 것을 확인했다. 내 뒤에 분신을 만든 다음, 분신의 양손에 내 발을 가져간다. 분신이 내 다리를 힘껏 민다.
나는 그 힘을 받아 에이번에게 돌격했다.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쇠와 쇠가 서로 부딪친다. 쏟아지는 폭우에 푹 젖은 에이번의 썩은 면상이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린다.
― 하!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했군!
그래야 하는 상황이니까. 나는 녀석에게서 거리를 벌리지 않고 계속해서 공격을 밀어 넣기 시작한다. 느긋하게 그 공격을 막아내며, 에이번은 서서히 위치를 바꾸기 시작한다.
“두 번은 안 당해.”
내 앞에 나타난 분신이 바닥을 향해 크게 검을 휘둘렀다. 파파팍, 하고 젖은 나무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엉겨 붙어있던 물이끼가 싹 쓸려나간다.
― 하!
녀석이 검을 하늘로 치켜든다. 다시 검에 벼락을 떨굴 생각인 모양이다.
내가 달려들기에는 거리가 좀 있고, 분신은 지금 바닥의 이끼를 쓸어내는 중이다. 나는 녀석의 코앞에 허상을 만들었다. 순간적으로 나타나 미간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허상을 보고 에이번이 순간 주춤한다.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해 거리를 좁힌 나는 들어 올려진 녀석의 검에 내 검을 가져가고, 그대로 힘껏 눌렀다. 들어 올려졌던 검이 그 힘을 이겨내지 못하고 꺾인다. 에이번은 뒤로 약간 물러나며 내 추격을 방지하기 위해 검을 몇 번 휘두르며 외쳤다.
― 성가신 놈.
“댁이 할 말은 아니지.”
죽었으면 곱게 바닷물이나 마시며 썩어갈 것이지. 뭐하러 여기까지 기어 나와서 산 사람에게 시비를 걸고 있어. 녀석의 커틀러스가 쏟아내는 공격은 지금 쏟아지는 폭우만큼이나 거칠었다. 뒤편에서 으지직,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하하! 네 녀석은 몰라도, 저 너절한 배는 폭풍우를 견딜 수 없는 모양인데?!
나도 알고 있다. 지금 포경선은 위험한 상황이다. 포경선의 마스트에서 들린 소리다. 펼쳐져 있던 돛을 전부 접었음에도 불구하고, 거칠게 몰아치는 폭풍을 견디지 못하고 있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소 무리해서라도 빠르게 저 녀석을 처리해야만 한다. 폭풍우는 이 녀석이 만들어낸 것이니, 이 녀석이 죽게 된다면 자연스럽게 가라앉겠지. 그럼 지금 위기에 처한 포경선도 어떻게든 원래 컨디션을 찾을 수 있을 거다.
검을 들어 올리게 해야 한다. 젖은 얼굴을 소매로 훔치며, 나는 녀석의 공세를 버틸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뒤로 빠졌다.
― 이걸로 끝이다!
에이번은 기다렸다는 듯이 검을 번쩍 하늘로 치켜들었다.
“젠장!”
나는 일부러 에이번을 향해 당황한 것 같은 한마디를 날리며 달려들었다.
― 이미 늦었어, 도련님. 잘 가라고.
코앞에 도달한 나는 녀석의 가슴에 칼을 박아넣었지만, 에이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가슴팍을 찌른 검 위에 왼손을 올려놓고, 나를 바라보며 히죽 웃었다. 여전히, 오른손에 쥐어진 검은 하늘을 향하고 있었다.
하나, 둘, 셋. 지금!
나는 녀석을 바라보다가, 박아넣은 검을 놓고, 녀석의 어깨를 한 손으로 꽉 짚은 채 몸을 허공으로 띄웠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린 벼락이 에이번의 검에 맞는 일은 없었다. 하늘과 바다를 이어버릴 기세로 그어진 창백한 벼락은 내 몸 위로 떨어졌다.
“아… 으아…… 으그그극.”
주륵, 하고 입에서 게거품이 흘러나오고 동공의 힘이 확 풀린다. 몸이 익어버리는 것 같은 고통과 함께 시야가 하얗게 점멸한다. 나는 검 대신 벼락을 맞았다. 그리고, 벼락은 에이번의 어깨를 짚은 내 팔을 타고, 녀석의 몸으로 이동했다.
― 크아아아아아아아!
녀석의 입에서 시커먼 연기가 확 뿜어져 나온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흐려진 눈으로 녀석의 위치를 확인하고,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을 비척이며 녀석의 가슴팍을 뒤져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었다.
“허윽… 크흑…… 소중한 물건은, 잘 숨겨놓아야지.”
나는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벼락은, 내 몸을 타고 들어와 에이번의 몸에 닿은 팔 쪽으로 뻗어 나갔다. 에이번의 몸에 닿았던 팔을 살펴보니, 벼락이 지나간 길이 마치 흉터처럼 내 팔뚝에 새겨졌다. 리히텐베르크 모양이라고 하던가.
나는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가 풀기를 몇 번 반복했다. 충격이 심각하다. 에이번의 몸에 닿았던 손이 움직이지 않는 걸 보니 아무래도 신경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이게 뭐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머니 안의 물건을 꺼내 들었다. 하얀 뼛조각 세 개다. 모양을 보니, 검지를 구성하는 뼈들 같은데.
하지만, 에이번은 몸이 썩기는 했어도 손가락은 멀쩡히 붙어있었다. 이건 그럼…… 나는 의문을 가진 채 주머니에 다시 손을 넣었다. 길쭉한 통 하나가 들어있다. 쪽지를 몰래 보관할 수 있는 물건이다.
[우툰이 약속한 위대한 항해에도 끝은 있나니. 미루어진 필멸의 순간은 맹세를 위해 바다에 바친 여인이 자신의 애인을 다시 가리킬 수 있게 되거나, 약정한 시간에 약정한 약탈을 하지 않을 때 다시 에이번에게 찾아올 것이다.]
뚜껑을 열고 안에 담긴 쪽지를 확인한 나는 벼락에 맞아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활짝 웃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