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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22화 (222/275)

222화

“아, 너는 조건부 매매였나 보지?”

가리킬 수 있게 되다. 다른 말로는 검지를 되찾게 된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주머니 안에 들어있는 손가락뼈는 분명히 검지의 그것이다.

따라서, 이 손가락뼈를 바다에 던지면 지옥으로 끌려가는 모양이다. 당연히, 이번에 나를 쫓아온 이유는 이 조건부 매매 계약을 뭔가 조금 더 너그러운 방식으로 바꿔주거나, 아예 없던 일로 해주는 식이었겠지.

― 돌려다오, 그럼 내 맹세코 이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돌아가겠다!

나는 그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이런 일은 확실한 법이 좋지.”

누군가 나를 배신하는 게 싫다면, 그 사람의 말을 믿고 풀어주는 대신 머리통에 총알을 박아넣는 게 최고다.

풀어준 사람은 배신 할 수 있지만, 머리에 총알을 맞은 사람은 배신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거든.

어디 그뿐이랴. 저 녀석은 오늘 처음 본데다가, 만나게 된 과정에서도 서로 따뜻한 대화와 칭찬이 오간 게 아니라 날붙이와 폭언이 오갔잖아? 믿고 싶어도 믿을 수가 없다.

― 부탁한다.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다!

“그 한마디 만큼은 굉장히 공감 가네.”

나도 아직 죽고 싶지 않아서 이 지랄을 하고 있는 거니까. 저 친구가 하는 말은 뼈저리게 공감한다. 하지만, 공감하는 것과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기 마련이다.

“잘 가라 에이번.”

― 안돼에에에에!

녀석의 급박한 애원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손가락뼈를 집어 던지려는 자세를 취하다가 후우, 하고 숨을 내쉰 다음 난간에 기댄 채 녀석을 바라봤다.

“말해봐, 죽은 시체 선장. 바다에 대해서는 잘 아는 편인가?”

내 질문에 어떤 대답을 돌려주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다.

― 바다라면 필멸자에 한정했을 때 나보다 더 잘 아는 자는 없다고 자부한다.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뭍에 발을 들이지 않고 시간을 보냈어! 네가 원하는 것이 그 무엇이든, 바다에 있기만 하다면 내가 만족스러운 대답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마음이 급해져서 그런지 말도 빨라졌네. 나는 그 말에 손에 쥐고 있는 손가락뼈들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말을 이었다.

“더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지금 바다가 좀 거칠다고 생각하지 않아? 선장 나으리.”

내 말에 녀석이 모든 동작을 멈추고 똑바로 섰다. 흐리멍덩하던 눈동자가 허옇게 까뒤집어지고, 난동을 피우던 바다가 순식간에 가라앉기 시작한다. 다시, 안개도 없고 파도도 잔잔한 깊은 밤의 평화로운 바다가 우리를 맞이해주기 시작한다.

― 이제 만족하나?

“그럭저럭.”

사실, 지금 내 몸 상태가 정상은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바닥에 주저앉고 싶지만, 그러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클로에, 넘어와!”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포경선에서 팍 하고 튀어 오른 클로에가 내 옆에 섰다. 나는 그녀에게 손가락뼈를 넘겨주며 말했다.

“저 친구의 목숨줄이다. 소중하게 챙겨두고 있다가, 수상한 짓거리를 하면 바로 바다로 던져버려.”

내 말에 클로에가 자기 손에 쥐어진 세 조각의 손가락뼈를 살펴보나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에 지시한 명령과 비교하면 일도 아니네요.”

말을 마친 클로에는 수통을 꺼내 물을 몇 모금 마신 다음, 자신의 팔뚝에 난 자상을 그 물로 씻어낸다.

“더 다친 데는 없고?”

“네, 뭐…… 굉장히 피곤하고 삭신이 쑤시긴 하지만. 그런 건 푹 자고 나면 거뜬해지겠죠.”

말을 마친 클로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오히려, 마틴 님이야말로 괜찮으세요? 산 채로 벼락을 맞았잖아요.”

“괜찮겠냐? 죽을 것 같다.”

말을 마친 나는 그대로 다 썩어가는 유령선 바닥에 주르르 녹아내리듯이 주저앉았다.

무리한 선택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벼락에 맞아 죽을 확률은 의외로 10% 정도밖에 안 된다. 저 녀석이 그대로 자기 검에 벼락을 담아 다시 휘두르기 시작하면 일을 그르칠 확률은 내가 벼락 맞아 즉사할 확률보다 분명히 높았다.

그러니 방법이 있나. 나는 팔뚝을 살펴봤다. 시뻘겋게 남아있던 리히텐베르크 모양은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말을 듣지 않던 한쪽 팔이나, 맛이 가버렸던 온몸의 감각도 조금씩 회복되는 중이다.

이 정도 회복속도라면 완쾌까지 며칠 걸리긴 하겠지만, 아마 후유증은 남지 않을 것 같다.

― 이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나.

해적 선장 에이번은 긴장한 목소리로 나를 약간 다그친다. 그래, 지 명줄을 내가 잡고 있으니 아무래도 목에 사슬이 묶인 당사자로서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우리는 향유고래를 찾고 있다. 가능하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생활할 정도로 충분히 늙은 녀석이 좋겠군.”

말을 마친 나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에이번을 올려다보았다.

“찾을 수 있나?”

― 향유고래라.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 말했듯이, 바다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나는 네가 원하는 도움을 뭐든지 줄 수 있다. 네가 말한 조건에 부합하는 향유고래라면 꽤나 정확하게 위치를 특정지어 줄 수 있다. 아마…….

녀석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나 싶더니 말을 이었다.

― 일주일 안에 도착하면 그로부터 사흘 안에는 호흡하러 올라온 녀석을 볼 수 있을 거다.

“그거, 의심스러울 정도로 정확한데.”

내 말에 에이번이 대답했다.

― 나는 죽지 않는 몸이 되어 바다를 떠돌기 전에도 따라올 자가 없던 당대 최고의 선장이다. 폭풍우 치는 밤, 일백하고도 칠십의 해군의 추격을 뿌리치며, 그 와중에 세 번의 약탈을 했지. 그때도 바다를 읽는 능력은 인간들 중 제일이었고, 지금은 필멸이 예정된 모든 존재 중 제일이다!

나름대로 그 점에 대해서는 자부심이 있는 모양인지, 내가 자신의 목숨줄을 쥐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법 큰소리를 낸다.

“그래서, 확실하다 그거지?”

나는 그렇게 말하고 뒤편을 향해 외쳤다.

“여기, 해도 하나만 가져다주시겠습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해도와 램프가 내 앞에 놓였다.

“찍어봐.”

― 주머니부터 건네 다오.

“그럴 수는 없지.”

이 상황에서 클로에가 쥐고 있는 주머니를 척하니 에이번에게 넘겨주면, 상황은 우리가 명백하게 불리해진다. 딱 하나 가지고 있는 목숨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걸 넘겨줄까 보냐. 차라리 다리에 쇠공 매고 바다로 뛰어들고 말지.

문제는, 우리가 저 녀석을 믿지 못하는 만큼 저 녀석도 우리를 믿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 그렇다면…….

녀석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자신의 검지를 콱 물어뜯었다. 이빨로 씹힌 검지에서 시커멓게 죽은, 피와 같은 무언가가 끈적하게 바닥으로 떨어진다. 녀석은 곰팡이가 슨 축축한 종이를 한 장 꺼내더니 거기에 검지로 뭔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녀석이 완성된 종이를 나에게 내밀었다.

― 배가 암초에 걸려 모두가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때, 모든 선원의 동의하에 우툰에게 약조한 형식과 정확히 똑같다.

나는 그 종이를 받아들고 슥 훑어봤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종이 위에 그려져 있는 문양이었다. 이전에 광대 자식이 나에게 내밀었던 금종이와 같은 문양이다. 뭐, 이게 저런 녀석들 사이에서는 표준 계약서 양식이라도 되는 건가.

내용 자체는 축약하면 다음과 같았다.

나는 저 녀석에게 손가락뼈를 넘겨준다. 그 대가로 에이번은 향유고래를 찾아낼 수 있는 위치를 알려준다.

“우툰?”

― 바다의 악마다. 태초마 헤로스로부터 삼위계 아래의 계약마지.

“삼위계 아래? 그건 또 뭐야.”

내 중얼거림에, 에이번이 해적답지 않은 인내심을 발휘해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쉽게 말해, 일종의 족보 같은 거다. 헤로스로부터 삼위계 아래라는 뜻은, 헤로스와 계약해 악마가 된 녀석의 계약마의 계약마라는 뜻이다.

“그럼, 내가 이해한 게 맞다면 너는 헤로스로부터 사위계 아래의 계약마가 될 예정이었다는 뜻인가?”

내 말에 에이번이 고개를 저었다.

― 나는 계약마가 되는 조건으로 거래한 것이 아니다.

아, 그게 또 그렇게 될 수도 있는 모양이군. 일단, 계위라고 하는 게 뭔지는 알았다. 악마들 사이의 족보 같은 거군. 뭐 뉴욕 마씨 18대손 마이콜, 이런 것처럼.

“계약 쪽에는 밝은 편이지만.”

영혼을 걸고 하는 계약 같은 건 내 전문 분야가 아니다. 나는 슬쩍 포경선에서 기진맥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메이슨을 이리로 불러와, 계약서의 내용을 확인해보도록 했다.

“어떻습니까?”

내 질문에 메이슨이 턱을 쓰다듬었다.

“일견 보기에는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작성에 사용된 재료도 그렇고,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 문구도 정확히 적혀 있어요.”

말을 마친 메이슨이 눈앞에 서 있는 에이번을 향해 말했다.

“계약마 우툰과 맺은 계약을 가져와. 또한, 계약서에 ‘네가 여태 동안 맺은 마법적 구속력을 가진 계약서를 모두 우리에게 보여줘야 한다.’라는 내용을 추가하겠다.”

― 알았다. 기다려라.

말을 마친 그가 잠시 자리를 비웠다, 이내 돌아와서 뭔가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 계약마 우툰과 맺은 계약이다. 이와 비슷한 구속력을 가진 계약서는 더는 없다.

그 계약서의 내용을 한동안 살펴보던 메이슨이 나를 바라봤다.

“문제 될 내용은 없어 보입니다. 다만,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엘렌 양과 상의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죠.”

메이슨은 좋은 사람이지만, 그 실력을 신용하기는 힘들다. 내 허락을 받은 메이슨은 적혀 있는 내용을 재빠르게 필사하더니, 포경선으로 다시 돌아가 엘렌과 교신했다.

“여기, 술 한 병 건네줘!”

잠시 뒤, 독주가 들어있는 술 한 병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그 병을 그대로 에이번에게 굴려주며 말했다.

“암초라고 했었나? 우툰이라는 녀석과 계약하게 된 계기가.”

싸움이 끝나고 협상의 순간이 찾아왔다.

서로가 서로를 해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이제 그 전까지 나누던 몸의 대화는 잊어버리고 상식 있는 교양인으로서 나누는 지성 넘치는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내 말에 에이번이 코웃음을 친 다음 술병을 막고 있는 코르크 마개를 이빨로 뽑아낸 다음 그 내용물을 쭉 들이켠다.

― 그래. 씨이펄! 바다에서 상어가 익사한 꼴이지.

말을 마치고 나서, 안주 대용인지, 바닥을 기어가던 작은 게를 그대로 입 안에 넣고 생으로 씹어먹는다. 그 모습을 본 클로에가 작게 몸을 움찔한다.

“그리고 악마가 찾아왔겠군.”

내 말에 녀석이 바닥에 고름 섞인 침을 탁 뱉더니 코를 벅벅 비비며 다시 술을 들이켰다.

― 테네스 공국의 사채업자 같은 새끼들이야.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들고 와, 대가로 터무니없는 것을 요구하지.

“공감대가 아주 많은 친구였군 그래. 그 기분 나도 알지.”

말을 마친 나는 녀석을 보고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이제 댁도 이 배에 동행하고 있던 친구를 그대로 두기는 조금…… 찝찝한 상황 아닌가?”

이 배에는 시체만 타고 있는 게 아니다.

― 응? 하, 그렇지.

에이번은 내 말을 금방 알아들었는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뒤편에 멍하니 서 있는 선원을 향해 턱짓했다. 잠시 뒤, 선실 아래에서 뭔가 우지끈 뚜둑 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뒤, 소금이 허옇게 말라붙은 오랏줄에 묶인 사람 한 명이 내 앞으로 끌려 나왔다.

“마틴 레드우드, 저에게서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을 겁니다.”

나는 그 말에 턱을 괸 채 대답했다.

“꼭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찾아낸 건 아니야.”

그냥, 숨어있으면 아무래도 찝찝하니 끌어낸 것뿐이지. 어차피 이 녀석이 누구 아래에서 일하고 있는지는 팔뚝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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