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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25화 (225/275)

225화

산호림. 무수한 산호초들이 암초처럼 파도 아래에 숨어 긴 범위를 뒤덮고 있는 장소다.

“굉장하군.”

이 거리에서 눈 앞에 펼쳐진 보고 있으려니, 아득한 수평선 만큼이나 끝이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산호초가 쫙 깔려 있었다.

“조금 더 나아가면, 파르스가 스스로 헤엄쳐 나아갈 수 없습니다.”

메이슨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상 이후 산호림에 도착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렇게 길지는 않았지만 짧지도 않았다. 그 사이 메이슨은 통제에 성공한 향유고래에게 나름대로 정을 붙인 모양인지, 파르스라는 이름도 붙여 주었다.

“걱정하지 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양팔을 걷어붙였다. 며칠 사이 클로에의 도움을 받아 양팔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덕분에 몸은 완전히 회복되었다.

산호초 같은 건 얼마든지 개작살 내줄 수 있다. 내 옆에 서 있던 클로에도 양 주먹을 서로 부딪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럼, 갈까요.”

우리는 곧바로 바다 속으로 뛰어들었다. 목적은 간단했다. 향유고래의 이동에 방해되는 산호초를 개작살내라.

순서도 간단했다. 수정구를 통해 연락을 받고, 향유고래가 멈춰있는 장소까지 다가간 다음, 거기를 막고 있는 산호초를 박살내면 된다.

길이 막힐 때마다 우리는 물속으로 들어가 고래의 길을 열어주기를 반복했다. 벽해의 피가 자리 잡고 있는 산호림 최심부까지 다가가기 위해 우리는 약 이틀 정도 이 작업을 반복했다.

“산호초만 보면 토가 나올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다.”

정말, 더럽게 많았다. 누가 몰래 산호초를 양식하고 있어도 이 정도로 많은 숫자의 산호초가 자리 잡을 수는 없을 텐데.

산호초를 박살내 길을 뚫기 시작한 지 이틀째 저녁, 우리는 마침내 산호림의 최심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기껏해야 15k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였는데, 돛을 단 배가 이틀에 걸쳐 15km를 이동했다는 건 사실상 기어갔다는 뜻이다. 사람이 졸면서 걸어도 15km는 하루 안에 주파할 수 있으니, 걷는 것보다 느린 속도였다는 뜻이다.

“그래도, 이제 드디어 목적한 물건을 획득할 수 있게 되었잖아요.”

“아직 하나 남았지만.”

벽해의 피를 얻게 되면 남은 건 삭풍의 족쇄라는 이름의 무언가다. 아마, 그 물건의 획득만큼은 그 광대와 얼굴이 반쪽 난 여자가 필사적으로 막으려 들 것이다. 이전까지는 녀석들도 나름대로 자기들에게 여유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따로따로 공격했지만…… 아마 다음에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준비 끝났습니다! 파르스에게 잠수를 부탁할까요?”

메이슨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허가가 떨어지자마자 메이스는 눈을 꾹 감았다. 녀석의 손등에 박혀있는 보석이 빛나기 시작한다.

우리 배 뒤를 졸졸 따라오던 그 거대한 고래가 쑤욱, 하고 바다 아래로 잠수해 모습을 감췄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고래가 잠수한 장소를 바라봤다. 제대로 해라. 내가 진짜, 여기까지 와서 그 산호조각 하나 가지겠다고 얼마나 개고생을 한 건지 아냐.

가서 뭐, 난데없이 오징어 같은 거에 눈이 돌아가서 그거 먹느라 삽질하면 올라왔을 때 바로 배를 째서 용연향을 꺼내고 기름을 짜낼 거야.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옆에서 내 표정을 살피던 클로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지.”

잠수 속도를 생각해보면, 이미 목적지에 도착했을 확률이 높다. 메이슨은 계속해서 정신을 집중하고 눈을 감은 상태다. 하지만, 눈을 감았음에도 불구하고 뭔가를 보고 있는 건지, 눈꺼풀 아래에서 눈알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됐다. 찾았습니다! 이제…….”

메이슨이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순간, 갑자기 우리가 타고 있는 포경선 바로 앞에 물거품이 마구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건.”

그리고, 그 물거품은 우리가 뭔가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서로 엉켜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하얀색에 가까운 푸른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형상이었다. 귀 대신 달린 작은 지느러미가, 눈앞에 나타난 이 여자가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 당신은 레드우드로군요. 드라이어드 에린실이 남기고 떠난 유산으로는 부족했나요?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이 울리고, 뭔가 마음을 적시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그 여자는 내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누구십니까?”

― 네레이드 시렌이 이 바다에 남기고 간 의지에요. 사실, 제가 누구인지보다는 당신이 왜 저를 원하는지가 더 중요하죠.

“바다의 정령…….”

포경선 선장의 중얼거림을 들은 나는 그 말에 침을 삼켰다.

드라이어드 에린실은 자신의 힘을 로티샤 호수에 남기고 사라졌다.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여자가 바로 벽해의 피 안에 담겨 있는 네레이드 시렌의 의지라는 건가.

“벽해의 피가 필요합니다. 전부는 아니고, 일부라도 좋습니다.”

내 말을 들은 네레이드는 자신의 손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대답했다.

―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어요. 필요하니 여기에 왔겠고, 필요했으니 이러한 방법을 동원해 벽해의 피를 얻어내려고 했겠죠. 중요한 건 이유랍니다.

말을 마친 네레이드가 살짝 한 손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우리가 타고 있던 포경선이 무거운 물체라도 실은 것처럼 바닷속으로 쑥 가라앉았다.

해수면이 갑판과 서로 맞닿을 정도가 되어서야 그 침몰은 멈췄다.

― 벽해의 피는 만록의 심장과는 다릅니다. 에린실은 사람이 사용할 것이라 생각하고 붉은 가지를 남겨두었지만, 벽해의 피는 그렇지 않아요. 네레이드 시렌이 사랑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바다 그 자체에요. 당연히, 남겨진 힘도 사람이 아니라 바다를 위한 것이지요.

아무에게나 건네줄 생각은 없다는 건가.

“만약…… 제가 벽해의 피를 원하는 이유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 타고 온 배는 부력을 잃고 심해로 침잠하게 될 거에요. 타고 있던 사람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말을 마친 시렌은 자신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던 깃털 한 조각을 뽑아서 바닷물 위에 띄웠다.

― 이렇게 말이죠.

그리고, 바닷물 위에 넘실거리던 깃털은 마치 납덩이라도 된 것처럼 바닷속으로 쑥 가라앉아버렸다. 부력이 없으면 헤엄은 소용이 없다. 나는 침을 삼킨 다음 대답했다.

“헤로스가 남기고 간 회색 서약이 필요합니다.”

―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질문이 이어지겠군요. 당연한 이치로, 이어지는 질문은 아까의 질문보다 더 중요해요.

말을 마친 시렌의 눈이 푸른빛을 흘리기 시작한다.

― 그 석판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위험한 일을 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헤로스와의 계약을 강요당했고, 이제 그 계약을 무효로 돌리고 싶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시렌의 눈은 여전히 그 푸른빛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 소박한 바람이군요. 인간의 매력은 소박한 바람이 웅대한 야망으로 자라난다는 점에 있어요. 하지만, 매력이 추레함으로 변하는 경우도 있죠. 소박한 바람이 끝을 모르는 탐욕으로 변하기도 하니까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 하루 먹을 양식이 필요해 낚시를 하던 소박한 어부가 어느 순간부터 그물을 쓰더군요. 몇년이 지나고 나니, 그 어부는 그물은 점점 촘촘하게 만들더니 미처 다 자라지 못한 치어까지 잡아들이더군요.

말을 마친 시렌의 입가에 찬웃음이 걸렸다.

― 치어까지 다 잡아버린 어부는 어획량이 줄어들자 그제서야 풍어제를 한답시고 기도를 올립니다. 기도를 올려도 어획량이 형편없으면, 자신이 저지른 일은 생각하지도 않으면서 우리를 욕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획량이 형편없으면, 나중에는 같은 사람까지 제물로 바치더군요.

“제가 회색 서약을 찾은 다음, 무엇을 하려 들지 확신할 수 없다는 뜻이군요.”

내 말에 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 회색 서약을 찾는다 했으니, 그게 뭔지도 알겠죠. 석판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 지옥의 태초마 중 하나인 헤로스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요구할 수 있어요. 인간의 맹세는 덧없고, 그 정신력은 약해서 유혹을 거절하기 힘들어하죠.

그래, 로또를 맞기만 하면 평생 아껴 쓰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로또에 맞은 사람이 그 돈을 정말로 아껴 쓰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렇다면 지금쯤 저희는 물 아래로 빠져야 정상 아닙니까?”

어차피 주지 않을 생각이라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다. 그냥, 우리를 심해로 가라앉게 해서 익사시키면 그걸로 끝일 텐데, 이 시렌이라는 네레이드는 왜 굳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까.

― 그러게요. 이유가 뭘까요.

“회색 서약이 신경쓰이는 모양이시군요.”

내 대답을 들은 시렌의 표정이 약간 풀린다.

― 빠른 대답이 제법 정확하기까지 하네요.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해보지 않을래요?

“헤로스의 회색 서약이 아직까지 사용되지 않았다 해도, 결국 언젠가는 사용될 겁니다. 언젠가 사용되어야만 하는 물건이라면…… 가능한 소박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편이 좋죠.”

네레이드 시렌의 말대로, 그 회색 서약을 손에 넣는다면 그 안에 뭐든지 적어 넣을 수 있다. 향후 모든 싸움에서 절대로 지지 않게 해달라는 내용을 적을 수도 있고, 아예 나라 하나를 멸망시켜 달라는 내용을 적을 수도 있다. 뭐든지 적을 수 있고, 헤로스는 그 부탁이 어떤 것이든 들어줘야 한다.

그렇다면 최대한 믿을 수 있는 누군가를 통해 그 회색 서약을, 위험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하게 만들자. 그게 이 시렌이라는 네레이드의 바람인 거다.

― 제법 정확하던 대답이 정확해졌네요. 하지만, 개체의 지성과 욕망의 통제 사이에는 연관성이 없죠.

“그렇죠. 오히려, 비례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 그 점이 걱정이네요. 회색 서약을 통해 이루고 싶어 하는 당신의 소망은 분명히 소박하고, 거기에 거짓은 없어요. 하지만, 현재의 진실이 미래까지 이어진다는 보장은 없죠.

말을 마친 시렌이 검지를 살짝 들어 올렸다. 슈우우, 하는 소리와 함께 검지 위로 바닷물이 휘말려 올라오나 싶더니, 거기에는 새빨간 산호 조각이 자리 잡았다.

― 벽해의 피. 원하시던 물건이죠. 드리는 건 어렵지 않아요. 한 가지 조건만 지켜주신다면.

“어떤 조건인지 궁금하군요.”

내 말에 시렌이 대답했다.

― 이 조각은 당신의 몸에 녹아들어, 골수와 피를 대체할 겁니다.

나는 그 말에 기괴한 표정을 지었다. 골수와 피라니. 쉽게 말해서 지금 내 몸에 들어있는 피와, 앞으로 만들어질 피가 전부 갈아 끼워진다는 뜻이잖아. 만록의 심장이 내 심장을 대체하더니만, 이번에는 벽해의 피가 내 피를 갈음하는 거냐.

“어째서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겁니까?”

내 말에 시렌이 대답했다.

― 벽해의 피는 시렌의 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시렌의 의지는 방금 전 당신이 말한 소원을 분명히 들었어요.

말을 마친 시렌은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얼굴을 내밀었다. 투명한 눈동자가 내 눈을 바라본다.

― 인간은 맹세를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어요. 엄밀히 말하면, 잃을 게 없는 맹세는 가볍게 여기죠.

“경고인 모양이군요.”

내 말에 시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 회색 서약 앞에서, 당신이 내 앞에서 말했던 소망이 아닌 다른 것을 바라지 마세요. 겪어 본 적 없는 갈증을 겪게 될 테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물이 당신의 몸에 들어가는 걸 거부할 거예요.

말을 마친 시렌이 내 코 위에 검지를 올려놓고 웃었다.

― 하지만 죽지는 않아요. 벽해의 피가 그렇게 두지는 않을 거예요.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극심한 갈증 속에서 당신은 천수를 누리고 사라질 거예요. 다른 모든 것은 회색 서약을 통해 날려버릴 수 있겠지만, 그 갈증만큼은 불가능해요. 네레이드 시렌의 이름으로 분명히 말씀드리죠.

“그렇게 어려울 거 없는 제약이군요. 저는 진실을 말했습니다.”

시렌이 나를 그대로 끌어안았다.

― 저도 그렇길 바라요. 그 정도의 소박한 소원으로 회색 서약이 소모된다면, 저 또한 한시름 놓을 수 있을 테니.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눈앞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강렬한 통증이 등을 타고 퍼진다.

“크…… 아아아.”

― 이제, 피를 뽑아낼 거예요.

말을 끝내기 무섭게, 시렌의 손이 내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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