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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26화 (226/275)

226화

고통을 느낄 수는 없었다. 이미, 뼛속에서 밀려오는 고통 때문에 다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을 지경이었으니까. 사지를 묶어놓고, 드릴로 뼈를 후벼 파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푸화아아악, 하고 베인 손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모두가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바닥에 푹 꼬꾸라진 채, 몸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고통으로 흐릿해진 눈으로, 내 피부 아래에 숨어있는 핏줄들이 울룩불룩 불거져 나왔다가 다시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그럴 때마다 계속해서 손목에서는 피가 쏟아진다. 원래 나의 피였던 것들.

“흐억… 커흡…….”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기분으로는 거의 10년은 지난 것 같은데. 나는 입가에 줄줄 흘러내린 침을 닦아내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아직, 피는 더 나올 거에요. 조금만 더.

시렌은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손목에서 쏟아지던 검붉은 피가 어느 순간 뚝 멈췄다.

“……끝난 겁니까?”

― 네. 이제, 당신의 몸 안에는 벽해의 피가 흐르고, 만들어지고 있어요. 좀 어떠세요?

“몸이.”

거뜬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푹 쉬고 일어난 것처럼 정신이 굉장히 맑을 뿐 아니라, 피로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 한 번, 그 심장에 자리 잡고 있는 마력을 몸에 불어넣어 보세요.

뭔가, 변한 게 있는 건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몸에 마력을 돌려보았다.

“이건, 족쇄라기보다는 선물 같습니다.”

― 다를 거 없어요. 당신을 믿고 건네준 벽해의 피에요. 제 믿음이 배신당하지 않는 한. 당신의 몸을 순환하는 피는 당신을 지킵니다.

본래, 심장의 마력을 온몸에 돌리기 위해서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심장의 마력이 혈관을 타고 퍼져나가야 하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다리에 마력을 불어넣으면, 그 즉시 다리에 마력이 모인다. 마력이 다리로 향하기까지 필요하던 약간의 시간이 완전히 사라졌다.

― 당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피는 몸에서 흘러나오지 않을 거예요. 당신의 몸에 해를 끼칠 수 있는 무언가가 들어온다면, 그것이 질병이건 독이건 벽해의 피가 그 성분을 받아들이지 않겠죠. 만약 물속에 빠진다면 몸에 상처를 내세요. 벽해의 피가 물에 녹아있는 공기를 빨아들여 폐가 하지 못하는 일을 대신해 줄 겁니다.

출혈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다. 독과 질병이 내 몸을 침범하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시렌의 설명대로라면 앞으로 나는 오염된 물이나 음식을 먹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다만, 산은 몸에 닿으면 흡수될 필요 없이 살점을 녹이니 어쩔 수 없겠지만…… 그 정도를 제외하면 독이나 질병으로 내 몸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말이 피를 바꾼 거지, 이건 사실상 내 몸 안의 체액을 포함한 순환계통을 싹 다 갈아 끼운 수준 아닌가? 무슨 원리로 그게 가능한 거지는 알 도리도 없고,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다. 내가 의사라면 입에 개거품을 물겠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잖아.

― 본디 인간의 피가 해야 하는 역할이라면, 그것이 뭐든지 벽해의 피가 훨씬 더 잘 수행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더 건강해지는 거죠.

“그런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시렌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부드러운 어조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 아 참, 잠자리에서도 여자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거예요. 결국, 그것도 어떻게 보면 아래로 피가 쏠려야 하는 거잖아요? 벽해의 피는 주인이 원하는 한, 언제까지고…….

그러면서 시렌은 주먹 쥐고 있던 손에서 검지를 팍 들어 올렸다. 간단한 손짓이었지만, 참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만, 더 말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충분히 이해했어요.”

정력증대라, 그 효과 하나만 있어도 눈이 돌아가서 벽해의 피를 찾고 싶어 하는 녀석들이 수천만은 될 것 같은데.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참아낸 보람이 있네.

― 저는 당신의 약속을 믿고 벽해의 피를 건네주었습니다. 제 선물이, 당신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말을 마친 시렌의 모습이 흐려지더니, 이내 사라졌다.

“생각보다 순순히 넘겨줬네요.”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조건이 있었으니까. 거짓말을 했다면 여기에서 인생이 조져지는 거지.”

하지만 나는 거짓을 말한 게 아니다. 가서 회색 계약 위에 써넣을 내용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나는 그 내용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정직했던 사람에게는 선물이 되고, 정직하지 못했던 녀석에게는 저주가 되는 거다. 그 뭐냐, 동화 금도끼 은도끼처럼 말이지.

“문자 그대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이 되어버리셨군요.”

클로에의 말에 나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러게 말이다. 이제 남은 건 삭풍의 족쇄 하나뿐이다.

* * *

세자는 왕궁의 집무실에서 서류를 살펴보는 중이었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서류 위에 옥새가 찍혔다. 서류를 옆으로 치운 세자가 이마를 짚고 작게 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죽겠다.”

세자가 그렇게 중얼거리기 무섭게 문 너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세자는 인상을 팍 쓴 채 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죽여라. 이 망할 놈들.”

“세자 저하,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에게서 기별이 왔습니다.”

문 너머의 목소리를 들은 세자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대주교? 그 영감탱이가 지금 연락을 보낼 만한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갑자기 무슨 일이지.

“들어오거라.”

세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남자는 인사를 하고, 허리를 숙인 채 천천히 세자에게 다가가, 테이블 위에 공손히 편지를 올려두었다. 세자는 곧장 손을 뻗어 전달받은 편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대주교들이 동시에 알현하겠다고?”

왕국 안에는 크게 세 개의 교단이 자리 잡고 있다. 각 교단은 대주교라는 이름의 지도자가 한 명씩 있다. 세 교단의 대주교들이 동시에 파이크 왕국의 세자를 알현하겠다고 청하는 것은 굉장히 드문 일이었다.

“긴급한 사안이라 합니다. 조속히 뵐 수 있기를 고대한다는 말도 남겨두었습니다.”

남자의 말에 세자는 턱을 쓰다듬었다. 제아무리 파이크 왕국의 세자라 해도, 교단의 대주교들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조속히 만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면, 적어도 이번 주중에는 만나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편지는 잘 전달받았다. 어떤 사안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내 자리를 한번 마련해보지. 이만 나가거라.”

세자의 말에 남자는 다시 한번 깊게 인사를 하고, 뒷걸음질 쳐서 문을 나섰다. 잠깐 생각에 빠져있던 세자는 수정구를 손에 쥐었다.

― 세자 저하를 뵙습니다.

첩보국장 알버트의 목소리가 수정구 너머에서 들렸다.

“얼굴을 보는 것도 아닌데 뵙기는 개뿔. 대주교들이 나에게 알현 요청을 하더군.”

― 대주교가 아니라 대주교들……입니까?

“그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당사자들 입에서 그 주제가 흘러나오기 전에 미리 알아두어야 할 것 같아서.”

세자의 말이 끝나자 알버트가 곧장 대답했다.

― 죄송합니다. 미리 파악해 두었어야 하는데. 소신의 능력에 부족함이 많아…….

“되었어. 지금 첩보국장이 바쁘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나. 하지만, 일리온 교단의 대주교가 보내온 편지에서 풍기는 냄새가 심상치가 않으니, 속히 조사해주게. 오늘 저녁 중에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으면 좋겠군.”

대화를 마친 세자는 수정구의 연락을 끊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확실히, 느낌이 좋지 않아.”

무슨 대축일 같은 걸 앞에 둔 상황에서 대주교들이 만남을 청했다면 세자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향후 두 달 정도는 종교적인 행사가 예정되어 있지 않다. 그렇다고 왕국의 사람들이 최근 교단과 마찰을 일으킨 적이 있는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만남을 청할 이유가 없는 상황에서의 만남은, 종종 좋지 않은 소식을 가져오는 법이다.

시간이 흘러 저녁이 되었다. 허브차를 마시고 있던 세자는 알버트의 연락을 다시 받을 수 있었다.

― 세자 저하. 누군가 마틴 레드우드의 비밀을 교단 쪽에 흘린 모양입니다.

알버트의 말을 들은 세자는 손에 들고 있던 허브차를 내려놓았다.

“이런 처망할. 어떤 개새끼가.”

마틴 레드우드의 비밀이라고 한다면 하나뿐이다. 태초마 헤로스와의 계약.

세 교단의 대주교들이 세자를 알현하고자 하는 이유가 명확해졌다.

“그 자식들.”

― 어떡하시겠습니까? 대주교들이 무엇을 요청할지는 분명합니다.

악마와 계약한 마틴 레드우드의 모든 권리를 박탈하고, 재산과 영지를 몰수한 다음, 화형하려 들 것이다.

“구체적으로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것 같았나?”

― 계약 대상이 헤로스라는 것까지 파악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그 말에 세자는 책상을 쾅 하고 내려찍었다.

“클로에 로니세라 경은 현재 마틴 레드우드와 동행 중이지.”

그녀가 교단에 정보를 흘릴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최근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클로에 로니세라는 첩보국 신분까지 벗어던지고 마틴 레드우드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다. 그 정도의 충심을 가지고 있는 자가 정보를 흘렸을 리는 없다.

― 엘렌 리버플로우 양은 레드우드 부인의 호위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법사 엘렌 리버플로우도 현재까지의 행적을 미루어 보았을 때 이야기를 흘렸다고 보기는 어렵다.

“나도 아니고, 자네도 아니고.”

마틴 레드우드와 태초마 사이의 계약에 대해 알고 있는 자는 이 네 명이 전부다. 그리고, 그들 중 누구도 교단에 마틴 레드우드가 헤로스와 맺은 계약에 대한 이야기를 흘릴 이유가 없다. 동기가 부족하다. 잠깐 고민하던 세자는 이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누가 교단에 마틴 레드우드의 비밀을 흘려 넣었느냐가 아니다. 대주교들이 찾아올 것이다.

― 세자 저하, 어떡하시겠습니까. 왕국의 세 교단에서 동시에 마틴 레드우드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그들이 들고 일어난 명분이 다른 것이었다면 ‘나랏일에 종교가 끼어들면 안 된다.’ 같은 식의 논리로 가볍게 묵살할 수 있겠지만, 악마와의 계약이라는 주제인 이상 제아무리 국왕이라 해도 그들을 무시할 수 없다.

한 명도 아니고, 이 나라를 주름잡고 있는 세 개 교단의 대주교 전부가 덤벼드는 상황이다. 그들이 마틴 레드우드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고 나선다면…….

세자의 신뢰를 받으며 출세 가도를 달리는 마틴 레드우드를 고깝게 보던 신하들도 슬슬 목소리를 높일 것이다.

“일 참 잘 풀리는군.”

― 바로 처벌을 주장하지는 않겠지만, 마틴 레드우드를 강제로 왕도로 소환해, 악마와의 계약 여부를 조사하라는 청을 올릴 것입니다.

마틴 레드우드가 헤로스와 계약 했다는 이야기는 소문이 아니라 사실이다. 왕도로 소환해 교단에서 조사를 실시한다면 들킬 수밖에 없다.

쉬운 길은 있다. 교단의 청을 받아들여 마틴 레드우드를 왕도로 강제 소환하고 조사를 받게 하면 된다. 쉽게 표현해서, 마틴 레드우드를 버리면 된다.

이 시점에서 마틴 레드우드를 비호하려 들면, 결국 대주교들이 세자에게 반발할 것이다.

― 세자 저하,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늘에 드리워진 붉은 노을이 완전히 사라지고, 깊은 밤이 될 동안 세자는 수정구를 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인내심 있게 기다리던 알버트가 결국 세자에게 말을 걸었다.

“결단이라.”

세자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차갑게 식은 찻물을 쭉 들이켰다. 세자의 눈은 서늘하게 빛나고 있었다.

“짚고 넘어갈 때가 되었지. 이 나라에서 신이 왕 위에 있는가, 아니면 왕이 신 위에 있는가.”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왕 만큼이나 신도 무서운 법이다.

― 싸우실 생각입니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어.”

세자는 그 망할 놈의 교단이 나라에 세금 한 푼 안 내고, 신께서 허락하신 땅이네 어쩌네 하면서 자기들끼리 나라의 국토 일부를 지들 멋대로 세습하고, 교단의 검이랍시고 사병을 육성하는 꼴이 굉장히 띠꺼웠다.

신권과 왕권은 같은 눈높이에 있을 수 없는 개념이다. 결국, 언젠가 둘 중 하나는 다른 한쪽에 굴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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