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드우드-227화 (227/275)

227화

세자는 숨을 깊게 내쉬고 말을 이었다.

“위기는 기회야, 일이 잘 풀리면 이번에 확실히 교단 녀석들의 목에 개목걸이를 채워놓을 수 있을 터.”

― 세자 저하……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 올바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세자 저하께서 패배하실 수도 있습니다.

교단이 개목걸이를 차는 게 아니라, 세자가 개목걸이를 차게 될 수도 있다.

“권력투쟁은 그런 거야. 잃을 걸 각오하고 달려들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현상만 유지할 뿐이지.”

― 제가 감히 세자 저하의 고견을 청해 들어도 괜찮겠습니까.

알버트의 말에 세자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마틴 레드우드는 구국의 영웅이지.”

그 점만큼은 현재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베로나 제국의 손에 작살날 뻔한 파이크 왕국은 마틴 레드우드의 활약으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교단에서는 지금 이 나라 구국의 영웅에게 악마와 계약했다는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거야. 응당,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것이 밝혀지면 녀석들은 그에 걸맞은 사죄를 해야 할 터.”

한 나라의 영웅을 악마와 계약했다는 누명으로 패망시키려고 한 것이다. 제아무리 백성들이 교단에 껌벅 죽는다고 해도, 이런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면 그 위세가 크게 흔들리게 될 뿐 아니라, 세자가 교단을 징벌할 명분이 서게 된다.

― 하지만, 마틴 레드우드는 확실히 헤로스와 계약한 상황입니다.

“그 친구가 삭풍의 족쇄를 얻는 데 성공하고, 회색 서약에 계약 무효를 새기는 데 성공하면?”

그러면, 헤로스와의 계약은 없던 일이 된다. 이후 교단에서 조사하더라도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거는 찾을 수 없을 것이다.

― 확실히, 마틴 레드우드가 계약을 무효화하는 데 성공한 이후 교단의 조사를 받게 된다면 누명이라는 것이 밝혀질 겁니다.

“그러니, 내가 집중해야 할 것은 마틴 레드우드에게 충분한 시간을 벌어준 다음…… 그 친구가 성공하기를 비는 수밖에. 젠장, 교단이 적이 되어서야 누구한테 빌어야 할지도 모르겠군.”

성공만 하면, 세자는 말 그대로 교단이 그동안 받고 있던 특혜들을 싹 다 작살내 버릴 생각이다. 교단에서 벌어들이는 수익에 세금을 물리고, 대주교 임명에 관여할 것이다. 더 이상 교단에서 멋대로 사병을 육성하지 못하게 하고, 세습되던 교단의 땅을 다시 왕국 아래로 거둬들일 것이다.

그동안 교단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한 왕은 많았다. 하지만, 교단을 왕의 발아래 굴복시키는 데 성공한 왕은 없었다.

“얻을 것이 많은 도박이야.”

― 잃을 것도 많은 도박입니다.

“원래 다 그런 거 아니겠나.”

얻는 게 없고 잃는 것만 많은 도박은 하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얻을 게 많고 잃을 것도 많은 도박은 해볼 만하다.

“게다가, 이건 운에 기대는 게 아니지. 마틴 레드우드라면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라 보네. 장차 왕이 될 자가 사람 보는 눈이 글러 먹었다면, 어차피 왕위에 올랐을 때도 대업을 이루기는 글러 먹었어.”

사람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면서 큰일을 해낼 수는 없다.

“마틴 레드우드와 연락을 해봐야겠군.”

― 지금 즈음이면 테네스 공국 근해에 도달했을 겁니다. 엘렌 리버플로우 양의 수정구를 활용한다면, 연락에 문제는 없습니다.

“알았네, 고생하게. 아, 찾고 있던 물건의 위치는 파악했나?”

삭풍의 족쇄. 그게 자리 잡고 있는 위치를 알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 대략적으로 범위는 축소한 상황입니다. 카노체리 사막 동북쪽 일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만, 그 이상은 아직.

“그런가, 일단 알았네. 그 내용은 마틴 레드우드에게 전달해두지.”

알버트와의 연락을 마친 세자는 수정구를 바꿔서 곧장 마틴 레드우드에게 연락을 취했다.

* * *

세자에게 연락이 왔다. 방 안에서 연락을 받는 나는 세자가 전달한 내용을 듣고는 기가 막혀서 나도 모르게 한탄을 했다.

“교단이라니.”

― 누가 소문을 흘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주교들이 알현을 요청했어.

누가 소문을 흘렸는지 나는 알 것 같다. 내가 바다에서 벽해의 피를 구하기 위해 개고생을 하는 동안, 그 광대놈과 얼굴 반쪽이 작살난 여자도 놀고 있지는 않았던 거다. 악마랑 계약한 새끼들이 교단의 힘을 빌린다니 뭐 이런 개막장 같은 상황이 다 있을까.

차라리 면죄부를 팔지 그래? 최소한 그건 자기들 탐욕에 휘둘린 거지, 악마한테 휘둘린 건 아니잖아.

― 태초마 헤로스와 계약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자네는 화형이야.

바베큐라. 보통 바베큐를 먹는 입장이었지, 구워지는 입장이 되어 본 적은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구워지는 입장이 되고 싶지는 않다. 헤로스와 계약한 상태로 죽으면 어차피 지옥에서 불타게 될 텐데, 차라리 얼어 죽고 나서 지옥에서 불타는 게 낫지. 불타 죽고 난 다음 죽어서도 또 불타는 건 너무하잖아.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겁니까. 버리시는 겁니까?”

― 그럴 거면 연락하지도 않았어. 나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봤으니 한번 들어보게.

세자는 간단하게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주었다. 세자는 내가 회색 서약을 찾아내 계약을 무효화 할 때까지 시간을 번다. 나는 그 사이 회색 서약을 찾아내 계약을 무효화하고, 당당하게 왕도로 돌아가 교단의 조사를 받는다.

계약하지 않았다는 게 밝혀지면, 그 즉시 세자가 구국의 영웅을 모함했다는 혐의를 통해 그동안 이 나라 안에서 교단이 누려왔던 모든 특권을 박살내 굴복시킨다.

거기까지 들은 나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건 이제 더 이상 저 하나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게 된 것 같습니다.”

― 그래, 이건 자네 하나가 죽고 사는 게 아니야. 이건 이 나라가 향후 어떻게 될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분기점이네.

내가 실패하면 화형은 물론이고, 악마와 계약한 나를 비호했던 세자도 곱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왕족이니 교단에서 화형시킬 수는 없겠지만…….

한겨울 대주교들이 머무르는 교회 앞에서 세자가 쌓인 눈 위에 무릎 꿇고 3일 정도는 빌어야 할 수도 있다.

― 어쨌든, 이미 뭘 해야 할지는 결정 난 상황이지만 어떻게 시간을 벌어야 할지가 고민이란 말이야.

“찾아온 대주교들에게 현재 마틴 레드우드는 파이크 왕국 안에 없고, 세자 저하의 밀명을 받아 임무를 수행 중이라고 말씀하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비밀에 부치면 된다. 어차피 그 광대와 반쪽 얼굴의 여자도 내가 회색 서약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교단의 대주교들에게 흘려 넣지는 않았을 것이다.

회색 서약이라는 게 뭔지 알려지는 건 헤로스에게 좋을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따라서, 교단의 대주교들도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중인지는 모른다.

― 시간은 벌 수 있겠지만…… 대주교, 그리고 교단과 편을 먹은 귀족들이 하루가 멀다고 반발하겠군.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날 싫어하는 친구들이 왕도에 없을 리가 있나. 내 대답을 들은 세자가 끄응, 하는 소리를 냈다.

― 미리 말해두지만, 레드우드 부인에게도 영향이 있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움찔한 다음 침묵했다. 악마와 계약한 자식을 둔 어머니다. 교단에서 가만둘 리가 없다.

― 이 나라의 귀족이고, 나도 각별히 신경을 쓸 테니 고문을 하지는 못하겠지만. 골방에 감금되어 거친 음식을 먹으며, 제대로 쉬지 못하고 교단의 심문관들에게 심문당하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을 거야.

나는 그 말에 주먹을 꽉 쥐었다. 씨팔, 로델린이 뭔 잘못이 있다고 그 꼴을 당해야 하는데.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다. 로델린이 고난을 견디지 못하고 내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증언을 해버리면, 세자가 나를 비호하기가 더 힘들어질 테니까.

애초에 로델린은 내가 헤로스와 계약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지만, 교단 입장에서는 그딴 건 알 바 아니다. 자식에 대한 부모의 증언은 아주 설득력이 높기 마련이니까.

“세자 저하, 저는 성공할 겁니다.”

― 나도 그러길 바라네.

해낼 수 있으니 믿어달라,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문서를 남기시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아예, 문서로 박제를 해버려서 나중에 딴말을 못 하게 해버려야 한다. 교단에서 나를 의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심이 헛된 것이 밝혀진다면 교단에서는 잘못된 의심과 음해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할 것인지 아예 단단히 박아버린 다음, 그들의 서명을 받아놓아야 한다.

“세자 저하께서 강하게 나오신다면, 대주교들도 약간은 당황할 겁니다.”

― 하지만, 그들이 그냥 움직이는 건 아닐 거야. 나름의 확신이 있겠지.

“그들에게 확신이 있다면 서류에 서명할 겁니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 몇백 년이 지나도록 이어질 것이다. 대주교의 서명이 박혀 있는 문서는 안부 편지 같은 게 아니다. 그 문서가 이 나라의 왕에게 부여하는 힘은 막대하다.

“저는 해낼 수 있습니다. 아니, 무조건 해낼 테니 저를 믿으시고, 아예 그 대주교 놈들도 제가 악마와 계약한 것으로 밝혀졌을 때 바라는 것에 대한 문서를 준비하도록 명하시지요.”

― 화난 건가?

나는 그 말에 부드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교단들이 세습하고 있는 토지의 세습권을 회수할 때 기왕이면 제가 직접 가도록 지시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그리고 교단 쪽에 붙은 귀족들에게도 나름의 처벌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역시 제가 집행했으면 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있던 남의 어머니를 건드릴 생각이라면, 자식 눈깔이 돌아버리는 것 정도는 각오했겠지. 설마하니 남의 어머니를 골방에 가둬놓고 괴롭힌 주제에 아들이 찾아와서는 쿠키를 줄 거라고 생각하겠어?

나는 가서 곱게 세자가 지시한 일만 끝내고 돌아올 생각이 없다.

― 그 정도는 어려운 요청도 아니군. 하지만, 지금 집중해야 할 건 그게 아니지.

“그렇습니다.”

삭풍의 족쇄를 얻어야 한다. 세자가 먼저 이 주제를 꺼내 들었다는 건, 어쨌든 삭풍의 족쇄가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어느 정도 밝혀졌다는 뜻이다. 그나마 좋은 소식이군.

― 카노체리 사막 동북쪽에 위치한 모양이야.

카노체리 사막. 나는 그 말을 듣고 지도를 확인한 다음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동북쪽이라고 해도, 상당히 넓습니다.”

작은 사막이 아니다. 굉장히 넓은 범위에 걸쳐 자리 잡고 있는 사막이기 때문에, 동북쪽이라고 해도 범위가 꽤나 넓다.

― 첩보국에서 계속 조사 중이네. 일단, 그 일대에 있다는 건 확실하니 자네는 뭍에 상륙하는 즉시 카노체리 사막으로 향하게. 이제 여름이 되었으니, 사막은 굉장히 따끈할 거야. 준비를 단단히 하게.

확실히, 날이 많이 더워졌다. 뭍에 상륙하면 본격적으로 여름을 느낄 수 있겠지. 사막에서 맞이하는 여름이라. 생각만 해도 벌써 기분이 좋아진다. 가기 전에 닭이라도 한 마리 푹 삶아서 먹고 가야 하나.

세자와의 연락을 마친 나는 클로에에게 그 내용을 전달했다.

“교단에 소문이 흘러 들어가다니.”

클로에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걱정이네요. 악마와 관련된 일에 있어서, 교단은 지독할 정도로 집요해요. 게다가, 이번에는 단순히 악마와 계약한 자를 찾아내 처벌한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잖아요.”

“내가 아무리 잘해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모를까. 이건 그렇지 않아.”

내 말에 클로에가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표정을 푼 클로에가 작게 심호흡을 했다.

“맞아요. 결국, 마틴 님이 회색 서약을 찾아내는 데 성공하면 모든 일이 잘 풀릴 테니까요. 걱정하지 않아요.”

자리에서 일어난 클로에가 나에게 인사한다.

“가야 하는 장소가 카노체리 사막 동북쪽이라면, 그 인근의 항구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는 편이 좋겠죠. 물자 재보급도 필요할 테니 선장과 상담해서 항로를 변경하고, 거쳐 가는 항구들에 미리 연락을 취할게요.”

“그래 줘.”

클로에는 문을 나섰고, 나는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멍하니 벽을 응시하며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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