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화
이 여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 여자는 여기에 뿌리내리기 위해 시간을 소모했다. 그렇다는 건…….
“파이크 왕국의 교단 대주교들에게 소문을 흘린 건 그 광대 놈이겠군.”
― 헤이, 나 찾았나?
대번에 꽃에 달린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변한다. 이건 그 광대 놈의 목소리다.
― 어머니 일은 참으로 유감이야. 그 나이에 귀부인께서 그런 더럽고 좁고 허름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니. 게다가 끝까지 자기 아들은 악마에게 영혼을 팔지 않았다고 믿고 있더군. 크흐흫. 그런 곳에서 살아 본 적 없는 귀한 분인데, 병드는데 얼마나 걸릴 것 같아? 나는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으히히히힛!
아, 그래. 이 상황에서 내 성미를 자극하는 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그렇다면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나는 아무 말 없이 입이 돋아난 장미를 바라보다 재빠르게 검을 휘둘러 수십 송이의 장미를 잘라낸 다음 대답했다.
“말은 거창하게 하지만 모습은 드러내지도 못하는군, 쫄보 새끼들. 덤비던가, 그러지 못하겠으면 꼬리 말고 짜져.”
내 말에 광대 놈의 목소리를 전달하던 꽃들이 동시에 침묵한다. 나는 그 꽃들을 바라보며 비웃는 표정을 짓고 말을 덧붙였다.
“아, 사실 생각해보면 거기서 뭐 대단한 일이라도 한 것처럼 아가리 놀리는 친구는 나한테 한 번 흠씬 쥐어 터졌었지? 나 같으면 쪽팔려서 감히 아가리 놀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참 변죽도 좋군. 광대라 그런 건가?”
옆에서 내 말을 듣고 있던 클로에가 타이밍 좋게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여전히, 피어있는 장미꽃들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나는 덩굴을 슥 훑어보다가 검을 뽑아 들었다.
벽처럼 얽혀있는 덩굴이라고 해도, 기껏해야 장미 덩굴일 뿐이다. 이게 무슨 흑단 나무 같은 것도 아니고, 칼로 베면 잘려나가겠지.
“잘 베이는군.”
검을 휘두르자, 뭔가 걸리적거리는 느낌과 함께 장미 덩굴들이 샥샥 잘려나간다. 그렇게, 벽을 넘어갈 수 있는 길을 내고 나자, 그 너머에 자리 잡은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으어.”
나는 약간 얼굴을 구길 수밖에 없었다. 장미로 만들어진 담벼락은 그 너머의 풍경을 가리기 위한 것이었던 모양이다. 장미 덩굴 너머에 자리 잡고 있는 건, 마치 사람이 벌레로 보일 정도의 사이즈로 자라난 식충식물들이었다.
거대한 끈끈이주걱에 달라붙어 산 채로 녹아내리는 사람이 보인다.
네펜데스라고도 불리는 벌레잡이 통풀은 사람의 몸이 전부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았던 모양인지, 살이 거의 다 녹아내려 드문드문 뼈가 드러난 사람의 머리통이 삐죽 튀어나와 있다.
꽉 닫혀 있는 파리지옥의 삐죽삐죽한 톱날 사이로 사람의 다리나 팔 같은 게 튀어나온 채 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식물 줄기에 종기 몇 개가 생기더니, 이내 팍 하고 터지며 눈알과 입을 만들어낸다. 핏발이 선 눈은 이리저리 움직이다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리고, 입이 열리며 여자의 목소리를 낸다.
― 그거 알아? 식충식물은 움직이지 않는 법이야. 그래, 언제나 땅속에 깊숙이 뿌리를 박고 먹이를 기다리지. 다가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고 만전의 준비를 한 다음, 어쩔 수 없이 다가온 상대를 포식하는 거야.
뒤편에서 장미 덩굴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서 뒤를 돌아보니, 나갈 수 있도록 커다란 구멍이 열려 있었다.
― 자, 나가고 싶으면 나가렴. 나는 막지 않아. 어차피, 너희는 여기 다시 올 수밖에 없으니.
삭풍의 족쇄를 얻기 위해서는 이 지옥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정원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 나는 검을 뽑아 든 채 주변을 천천히 살피다가 혀를 찬다.
“이 안에 있는 게, 식물이 전부는 아닌 모양이군.”
피어있는 네펜데스 중 하나를 향해, 그 네펜데스의 뒤편에서 나타난 분신이 검을 휘두른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누런 체액이 쏟아지고, 꽃으로 위장하고 있던 사마귀가 배를 칼에 찔린 채 발버둥친다.
― 곤충과 식물,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잖아? 필요 없는 녀석은 먹이로 삼고, 필요한 녀석과는 공생하지. 야생에 온 걸 환영해.
야생에 온 걸 환영해?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흑마법사가 입에 담을 만한 말이 아닌데. 뭐 대갈통에 사슴뿔 나 있는 드루이드나, 귀가 길쭉한 엘프 같은 녀석이라면 모를까.
“식충식물이라.”
나는 아직도 발버둥 치는 사마귀의 머리통을 잘라낸 다음, 서서히 다가오는 거대한 끈끈이주걱을 피해 뒤로 물러나며 검을 휘둘렀다. 긴 자상이 남은 끈끈이주걱이 수액을 흘리며 줄기를 파르르 떤다.
“너무 큰 벌레를 잡아먹으려고 들면, 결국 식충식물이 죽는 법이라고.”
― 어머, 너는 그렇게 크지 않은걸. 오히려,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구나.
결국 얼굴을 드러낼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찾아가야지.
“저건.”
클로에가 다소 긴장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뱀처럼 스물스물 움직이는 식물의 줄기가 보인다. 우리가 응시하자, 동작을 딱 멈추더니 갑자기 줄기에서 길쭉한 주머니를 만들어냈다.
“봉숭아랑 나팔꽃의 씨앗 주머니잖아.”
엄청 커다란 씨앗 주머니였다. 봉숭아와 나팔꽃 모두 툭 하고 건드리면 씨앗이 터져 나와 사방으로 흩어지는 걸로 유명하다.
당연히, 저 안에 들어있는 씨앗들이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 어머, 꽃을 제법 알고 있는 모양이구나. 그런 사람 중에 나쁜 사람은 없다고 들었는데, 너는 어쩜 그리 못된 거니?
“신경 사나우니 닥쳐.”
줄기에 피어나 있는 아가리를 향해 분신이 주먹을 휘두르자, 곧바로 줄기에 돋아나 있던 입이 망치로 두들겨 맞은 것처럼 으깨진다. 그 와중에, 꽤나 굵다란 줄기 하나가 줄기에 달려 있는 씨앗 주머니를 건드리고 지나간다.
“젠장.”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고 브레이서에 마력을 불어넣으며 클로에의 앞에 섰다. 주머니가 터지며, 사방으로 씨앗이 비산한다. 그 씨앗의 끄트머리는 씨앗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뾰족했다. 땅에 뿌려지기 위한 모습이 아니다. 어딘가에 박혀들기 위한 거다.
브레이서로 만들어낸 방어벽을 씨앗들이 사납게 두들겼다. 하지만, 보호막을 뚫지는 못했다.
“저기, 사마귀가.”
클로에의 말에 시선을 옆으로 돌리니, 목이 달아나 죽은 사마귀의 몸통에 박힌 씨앗들이 눈에 들어온다. 씨앗은 순식간에 자라나 짙은 보라색의 꽃을 피우더니, 덩굴로 사마귀의 사체를 휘감았다.
그리고, 머리가 잘려 죽은 사마귀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사마귀뿐이 아니군.”
식충식물들도, 어느 사이엔가 자신이 잡은 사냥감을 다시 내뱉어 바닥에 방치해 둔 상황이었다.
사마위와 마찬가지로 주머니에서 터져 나온 씨앗들이 녀석들 몸 여기저기에 박혀들고, 꽃을 피우고, 덩굴로 휘감아 억지로 다시 일으킨다. 녀석들의 몸을 휘감고 있던 연한 녹색의 줄기는, 갈색으로 그 색이 변하고, 거기에 끈적거리는 액체를 품은 촉수들이 마구 돋아나기 시작한다. 끈끈이주걱에 달려 있는 그 촉수들이다.
“식물은 움직이지 않는다면서, 미친년이 나한테 거짓말을 하다니.”
저러면 움직일 수 있잖아.
게다가, 바로 옆에 있는 사마귀는 앞다리 중 하나를 파리지옥으로 갈아치웠다. 식물의 조종을 받는 다른 시체들도 각자 자신의 몸뚱어리에 딱 봐도 위험해 보이는 식물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아니, 무슨 변신 로봇도 아니고 왜 몸뚱어리의 파츠를 식물로 갈아치우는 거야. 조금 있으면 아주 합체까지 하려 들겠다? 녀석들의 몸에 피어난 꽃은 만개해서, 누런 꽃가루를 대기 중에 줄줄 흘리고 있다.
유독해 보인다.
“이거 받아.”
나는 브레이서를 벗어 클로에 쪽으로 던져준 다음, 바닷속으로 들어갈 때 사용하는 호흡기도 건네주었다. 호흡은 이 호흡기로 하고, 몸에 닿는 꽃가루는 브레이서가 만들어내는 보호막으로 막으면 될 거다.
“하지만, 마틴 님은 어쩌시려고요?”
“피부에 닿은 꽃가루가 뿜어내는 독이 내 몸으로 스며드는 일은 없어.”
몸에 독이 스며들지 않는다면, 그냥 꽃가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 말에 클로에가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가능한 사용하지 않고 싸우다가, 꼭 필요한 순간에만 사용할게요.”
말을 마친 클로에는 밀려오는 누런 꽃가루를 향해 손을 뻗었다. 퍼엉, 하는 충격파와 함께 전방의 공기가 뒤로 쫙 밀려나며, 그 공기를 타고 흩날리던 꽃가루까지 덤으로 쫙 밀어낸다. 그 틈을 노려, 나와 클로에는 재빠르게 식물에 휘감겨 움직이는 녀석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 사마귀 녀석의 팔에 달려있던 파리지옥이 그 형태가 확 뒤틀리더니 거대한 꽃으로 변해 나를 겨눈다. 푸화아아아악, 하는 소리와 함께 누런 꽃가루가 나를 노리고 쏟아진다.
“뭔데 이건, 꽃가루 대포 같은 거냐?”
머리가 없는 사마귀, 그렇다면 이 녀석의 약점은 정해져 있다. 나는 녀석의 몸에 박혀 있던 씨앗이 자라나 피워낸 꽃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꽃이 잘려나가자, 녀석의 몸을 휘감고 있던 식물이 누렇게 뜨더니, 이내 부스러지듯 사라진다.
그 사이, 클로에도 자신의 향해 밀려오는 꽃가루를 계속 자잘한 충격파를 뿜어 밀어내며 시체 위에 피어난 꽃을 노리고 검을 휘두른다. 만약을 대비해, 입에는 호흡기를 물고 있다. 살짝 뒤로 빠져 호흡을 가다듬나 싶던 클로에는 시체에게 달려들어 순식간에 열 번이 넘는 찌르기를 박아넣고 작은 폭발을 일으킨다.
말이 작은 폭발이지, 그 정도로도 살과 뼈로 이루어진 몸뚱어리를 작살내기에는 충분했고, 당연히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꽃도 박살 낼 수 있었다.
“이번에는 또 뭐야.”
꽃가루가 별로 효과가 없다는 걸 알아챈 건지, 녀석들의 팔뚝에 휘감겨 있던 덩굴이 뒤틀리며 모습을 바꾸더니, 큼지막한 선인장으로 변했다. 뭘 하고 싶은 거지, 선인장 펀치?
팔뚝에 달려 있는 선인장에 돋아난 가시는 하나같이 검지만 한 길이였다.
카칵, 하는 소리와 함께 클로에가 밀어 넣은 레이피어가 선인장에 박혀 들었다. 이내 쿵, 하는 소리가 퍼졌지만 선인장은 충격에 터져나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충격을 견뎌내고 가시투성이 팔을 휘둘러 클로에의 죽빵을 치려 든다.
허리를 젖혀 휘둘러진 선인장을 피한 클로에가 바닥에 착지한 다음, 신발을 이용해 뒤로 쭉 바지며 외쳤다.
“생각보다 튼튼해요!”
“그래 보이네.”
저 레이피어가 박힌 다음 터졌는데도 박살나지 않다니. 주변을 살피던 나는 꽤나 재미있는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미안하지만, 시간 좀 끌고 있어 봐.”
“세상에, 안 도와주실 거예요?! 여자는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고 하던데, 지금 여자가 꽃으로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에요!”
“꼬추로 맞는 것보다는 낫잖아. 조금만 시간을 벌어.”
“우와…….”
클로에는 그런 감탄사 한마디를 남기고 선인장 주먹을 단 녀석들과 싸움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사이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방으로 뻗쳐 있는 온갖 종류의 식물들이 보인다. 나는 그 녀석들 중 하나를 붙잡고, 그대로 쑥 뽑아내 봤다.
으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서 식물이 뽑혀 나온다. 나는 그 식물은 옆으로 치워버리고, 식물이 뽑힌 흙을 살폈다.
방금 뽑은 식물은 뿌리째 뽑힌 게 아니다. 뜯어져 나간 거다. 크기에 걸맞게, 어린애 팔뚝만 한 뿌리들이 흙 속에 서너 가닥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흙 속에 남아있는 뿌리는 바닥으로 뻗어져 있지 않다. 어떤 특정 방향에서 뿌리가 뻗어 나와 여기에 닿은 거다.
“이 식물들…….”
따로따로 심겨 있는 게 아니다. 어떤 거대한 하나의 식물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온 뿌리를 공유하고 있는 거다. 각각 다른 식물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이 땅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식물이나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