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즉, 이 뿌리를 계속해서 따라가다 보면 결국 본체에 도달하겠지.
그리고, 이 식물의 본체는 여태 동안 얼굴 한 번 드러낸 적 없는 수줍은 반쪽 얼굴 아가씨가 지키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말이 나무뿌리지, 그 뿌리의 형태는 일반적인 나무뿌리 형태가 아니었다. 마치, 파이프처럼 곧은 직선으로 뻗어져 있다.
“이러면…….”
클로에가 고군분투하는 동안 나는 빠르게 다른 식물의 뿌리를 살핀 다음, 두 뿌리가 교차하는 땅을 향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휘두른 검의 칼등 부분이 땅바닥을 후려치고, 지뢰가 터지는 소리 비슷한 게 나며 땅이 확 갈아엎어진다.
“세상에, 겁나게 굵잖아.”
어지간한 사람 몸통보다 조금 더 굵은 뿌리가 흙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만약 칡뿌리였다면 적어도 250만 원은 받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뿌리가 우리를 원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멀었어요?! 이 녀석들이 계속 몰려오고 있어요. 이젠 슬슬 벅찬 것 같은데.”
클로에가 선인장을 달고 있는 시체들을 막아내며 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클로에를 확인하고 기겁했다. 뭐야, 왜 시체가 저렇게 많아졌어. 서른 구가 넘잖아. 물량으로 밀어붙일 생각인가? 저런 숫자를 상대로 잘도 버티네. 이미 클로에의 손에 박살나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체도 열 구는 넘는 것 같다.
힘들었겠는걸.
“미안, 조금만 더 버텨봐! 아직 확인할 게 조금 더 남았어!”
뭔가, 이 뿌리에서 규칙성을 찾아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나는 그렇게 외치고 나서 계속해서 주변 땅을 갈아엎어 그 뿌리를 확인한다. 위치와 뻗어 나간 방향을 확인하고, 다시 다른 곳을 살펴 뿌리를 확인한다. 그렇게 20분 정도 반복해서 살펴본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프랙탈 구조잖아.”
그렇게 중얼거린 나는 이내 히죽 웃었다.
특정 비율의 길이에 도달하면, 정해진 각도로 두 갈래로 갈라지는 걸 반복하는 구조다. 눈송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뻗어 나가는 나뭇가지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구조다.
“그래, 주로 다루는 게 식물이다 그거지.”
프랙털 구조는 식물을 주로 다루는 것으로 보이는 그 여자 흑마법사에게 익숙할 수밖에 없지. 게다가 대지를 타고 뻗어 나가는 뿌리가 효율적으로 전체를 커버하기 위해서는 역시 프랙탈 구조 만한 게 없으니까.
하지만, 효율적인 만큼 이 모든 뿌리들이 뻗어 나온 원천지를 역으로 더듬어 올라가는 것도 굉장히 쉽다. 각도를 확인하고, 뿌리의 길이를 비교해 두 갈래로 갈라지는 분기점의 비율을 찾아낸 다음, 역으로 계산하면 되니까. 그리고, 내가 그것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다.
“뭔가 찾으셨나요?!”
클로에의 다소 다급해 보이는 목소리에, 나는 곧장 외쳤다.
“나를 따라서 달려!”
“드디어!”
클로에는 그런 외침과 함께 달려드는 녀석의 몸에 레이피어를 몇 번 찔러넣어 터뜨린 다음 뒤로 쭉 빠져 내 옆으로 바싹 붙는다. 나는 그녀가 따라붙은 걸 확인한 다음, 이 지옥의 식물원 속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냥 무턱대고 달리시는 건 아니죠?”
“그럴 리가 있냐.”
무조건 도착할 거다. 그런 구조로 되어있는 장소다.
“계속 달리다 보면, 어느 시점부터 풍경이 변할 거야.”
내 말에 클로에가 눈에 아주 조금의 불신을 담은 채 대답했다.
“마틴 님을 믿어야겠죠.”
“그래야지. 하지만 네 눈은 불신을 말하고 있구나.”
“확신이 없으니까요. 남의 말을 믿고 움직인다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아시잖아요.”
나는 그 말에 어깨를 으쓱한 다음 클로에를 덮쳐오는 가시투성이의 나뭇가지들을 쳐내며 대답했다.
“이동하는 데 집중해. 목적지 근처에 도착하면 풍경이 변하기 시작할 거야.”
계속해서 앞을 막아서는 온갖 식물과 곤충들을 뚫으며 앞으로 나아가자, 어느 순간 내가 말한 대로 풍경이 확 변한다.
“여긴…… 다시 사막이네요.”
다시, 사막의 폭염과 모래투성이의 대지가 나타난다. 방금까지 이어지던 밀림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네 녀석이 기어이.”
모래가 한 번 거칠게 휘몰아치나 싶더니, 짙은 보라색 베일로 얼굴을 가린 여자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검을 어깨 위에 걸친 나는 그 여자를 보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건강해 보이는군. 뭐, 조금 있으면 그렇지도 못하게 되겠지만. 반쪽 얼굴 아가씨.”
건강한 시체는 세상에 없잖아. 내가 검을 뽑아 들고 녀석에게 다가가자, 여자는 자신이 쓰고 있던 베일의 한쪽을 들어 올려 나와 눈을 마주친다.
“반쪽 뭐? 말조심해, 잡것아.”
나는 그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잡것이라니, 이래 봬도 레드우드 백작가의 장자이자 파이크 왕국의 국왕으로부터 왕궁 안에서의 생활을 허락받은 사람인데.”
누가 들으면 니가 무슨 황제라도 되는 줄 알겠다. 내 말에 여자는 코웃음을 한 번 쳤다.
“몇십 년도 지나지 않아 뒤질 것들이 가져다 붙인 이름 따위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어.”
“그래? 그럼 그 해골바가지와 계약한 건 쳐주나?”
내 말에 베일을 쓴 여자가 한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소매를 타고 기어오른 덩굴이 손을 휘감는다.
“헤로스 님과의 계약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너는 그 계약을 이행할 생각이 없잖아? 꽃에서 꿀만 빼먹고 꽃가루를 옮길 생각이 없는 꿀벌 같은 놈.”
나는 그 말에 혀를 찼다.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네.”
확실히, 나는 계약에서 좋은 부분만 쏙 가져가서 취한 다음 내가 이행해야 하는 의무는 이행하지 않으려고 하는 놈이니까. 하지만,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닌데 시도하지 않는 건 바보 아닌가?
이 여자는 아무래도 사람 공부를 좀 해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빌린 돈도 안 갚을 방법이 있다면 시도해보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인데, 하물며 영혼이 걸려있는 계약이잖아. 빠져나갈 수 있는 뒷구멍이 있으면 당연히 시도해야지.”
내 말에 다시 한번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저열한 새끼. 더 이상 대화를 나눌 가치도 없군.”
말을 마친 여자는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들려 한다. 나는 바닥의 모래를 한 줌 집어서 휘두르듯 뿌렸다. 휘두르는 힘을 받은 모래가 마치 참격처럼 뿜어져 나가 여자의 손을 후려친다. 그것만으로도 날카로운 칼에 베인 것 같은 자상이 생긴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아프냐?”
여자가 움찔하는 사이 바짝 붙은 나는 바로 검을 휘둘러 여자의 배를 찔렀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칼에 걸리는 딱딱한 느낌. 이거, 살을 찌른 게 아니라, 보호막을 찌른 거다. 뚫지 못한 건가.
“아른거리는 여명은 달이 삼키고.”
바닥에서 확 일어난 푸른 기운이 입을 쩍 벌리고 나를 삼키기 위해 밀려든다. 그 공격을 피하는 사이 여자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여명을 삼킨 시린 달은 호수가 품고”
이어지는 여자의 말에 입을 벌리고 있던 푸른 기운이 그 형태를 안개로 바꿔 내 발아래에 짙게 깔린다. 소름 끼치는 한기가 발을 타고 퍼지는 것을 느낀 나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달을 삼킨 고요한 호수는 잉어가 부순다.”
바닥에 낮게 퍼져있던 한기가 그 말과 함께 요동치며 내 몸을 노리고 솟구친다.
“크흐.”
허공에서 분신의 도움을 받아 피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스친 것만으로도 허연 입김이 토해질 정도의 한기가 전달된다.
“그 병신같은 광대 놈과는 다르게, 나는 제대로 된 마법사거든.”
“눈에 연결점을 박아넣은 건가?”
자세히 보니, 흰자는 멀쩡한데 동공이 이상하다.
“손등에 얽매일 필요 있나?”
하긴, 눈도 신경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굳이 손등에 보석을 박아넣을 이유는 없다. 하지만, 눈깔에 박아넣는 건 겁네 아플 것 같은데.
여자가 한 손을 살짝 움직이자, 내가 찔렀던 배의 옷감이 다시 생성된다.
“죽어. 뭔가를 느낄 새도 없이.”
말을 마치자마자 여자가 서 있는 땅을 중심으로 갑자기 바짝 마른 모래들이 질척거리는 진흙 늪으로 변한다. 부글거리는 거품과 함께 늪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황색의 가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유독해 보인다.
“검이나 휘두르는 무식한 녀석들이야 그 행동거지가 뻔하지. 발이 묶이면 등신이 따로 없어.”
그 말에 대한 대답이라는 듯이, 클로에의 손에서 굉음과 함께 뭔가가 여자를 향해 쏘아졌다. 팍, 하고 늪 속에서 솟구친 식물들이 클로에가 쏘아낸 공격을 받아낸다.
“어머, 화난 거야?”
클로에는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픽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냥…….”
클로에가 말을 거는 사이, 나는 여자의 뒤편에 분신을 만들어내 힘차게 검을 위로 휘둘렀다. 빠악,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늪 위에 살짝 떠 있던 여자의 몸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나는 늪에 발이 잠긴 채, 계속해서 허공에 떠 있는 여자를 노리고 분신을 만들어냈다. 여자는 몸이 땅에 닿는 일 없이, 허공에 뜬 채 분신들에 의해 수십 대는 두들겨 맞는다. 물론, 만들어진 보호막으로 인해 몸에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지는 않았다.
“다시 돌려보내 주세요.”
그 일방적인 구타를 보고 있던 클로에가, 자신의 레이피어를 허공에 떠 있는 여자를 향해 쏘아냈다. 콰가가가가가, 하는 굉음과 함께 쏘아진 레이피어는 아쉽게도 마법 방벽을 뚫지 못하고, 여자의 이마 바로 앞에 멈춘다.
이어, 내가 만들어낸 분신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레이피어를 뽑아내 클로에에게 다시 던져준다.
“젠장. 뚫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클로에의 말에 여자의 눈이 그녀에게 향한다.
“너는 몸뚱어리만 음탕해서는, 남자 아래 깔리는 신세가 딱 좋겠는걸. 그런 날붙이 말고, 남자 다리 사이에 나 있는 검이나 다루는 게 어때?”
그 말을 들은 클로에의 이마에는 팍 하고 힘줄이 돋아나 있었다.
“말은 잘하네.”
클로에의 대꾸에 여자는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며 다정한 어조로 클로에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예쁜 년들을 보면, 망가뜨려 주고 싶어.”
“왜, 니 얼굴은 반쪽이 작살이 나서 그런 건가?”
내 대꾸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네 상판을 보면 바로 호감을 느끼겠지. 뭐라도 하나 더 해주려 하고, 뭐라도 하나 더 챙겨주려 하고. 뭔가 실수를 해도 넘어가지. 아니, 그냥 실수를 넘어가는 수준이 아니야. 찾아와서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겠다고 먼저 나서기까지 했을 거야. 그렇지? 이유는 딱 하나지. 그 반질한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가슴팍이랑 엉덩짝에 토실하게 붙은 기름 덩어리.”
말을 하는 동안, 여자의 목소리는 점점 더 흥분으로 물들고 있었다.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해줄게. 얼굴에는 고름이 줄줄 흘러내리는 엄지손가락만 한 종기가 한가득 나게 만들어 줄게. 고운 입술은 썩은 내가 진동할 테고 앞니 몇 개는 빠져서 입을 열면 그 빈틈이 훤히 보이고, 그 윤기 나는 머리카락은 쥐가 파먹은 것처럼 숱이 다 빠지고. 매끄러운 배는 복수가 가득 차서 볼품없어지고.”
여자의 입에서 쉬지 않고 폭언이 쏟아져 나올 때마다, 클로에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진다. 저건, 폭언을 들어서 표정이 변한 게 아니다. 애초에, 클로에가 말 몇 마디로 저런 표정을 지을 만한 인물은 아니니까. 저건, 지금 진짜로 몸이 점점 불편해지고 있는 거다.
뭐, 저주라도 걸고 있는 건가?
그대로 두고 보면 안 되겠는 걸. 내가 움직이려 하자, 여자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했다.
“너는 조금 이따 보자. 아주 재미있는 상황을 마련해 놓을게. 빨리 와.”
말을 마친 여자가 양손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