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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우드-233화 (233/275)

233화

그리고, 땅이 잠깐 들썩이나 싶더니 내 몸이 뒤로 쫙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실제로 쫙 밀려나고 있었다. 내가 움직이는 게 아니다. 내가 딛고 있는 땅이 뒤로 밀려나는 거다.

“이게 무슨.”

그리고, 나는 사막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얼마나 뒤로 밀려난 건지 모르겠다.

“숲이 완전히 맛이 갔잖아.”

이 주변에 울창하던 숲이 완전히 변했다. 대부분이 바짝 말라붙어서, 하늘에 떠 있는 햇볕을 받아내며 시시각각 부스러지고 있었다.

“흑마법에는 제물이 필요하다고 했지.”

땅을 밀려나게 하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제물로 사용된 게 바로 그 여자가 뿌리내리고 있던 숲 그 자체였겠지. 그게 아니라면 방금까지 온 천지에 울창하던 그 숲이 이렇게까지 순식간에 망가질 이유가 없다.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곧장 몸에 마력을 불어넣고 달리기 시작했다. 클로에 혼자서는 그 여자를 이길 수 없을 거다. 제아무리 클로에가 날고 기는 실력을 가지고 있다 해도, 엄연히 나보다는 그 실력이 떨어진다.

저항할 수는 있겠지만, 오래 하지는 못할 것이다.

“거리 자체는 그렇게 멀지 않아.”

질주하기 시작하자,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다시 그 여자 앞에 설 수 있었다. 늪이나 다름없던 땅은, 이제 삐쩍 말라붙은 황무지로 변해 있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막으로 변해버리겠지.

“생각보다 빨리 왔네.”

여자는 얼굴의 베일을 치운 채, 나무줄기를 이어 만든 그네 같은 것 위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사지가 꽁꽁 묶인 클로에가 허공에 매달려 있다.

“말했잖아, 식충식물. 나는 적을 찾아다니지 않아. 적이 올 수밖에 없게 만들지. 그리고…….”

말을 마친 여자의 눈이 싸악 눈웃음을 짓는다.

“적이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지.”

클로에는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노려보며 억지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내가 검을 들어 올리자, 곧바로 클로에의 목에 감긴 덩굴이 꽉 조여든다. 그 목졸림 자체는 클로에에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클로에가 목에 능력을 사용한다면, 목을 졸리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의 귓속으로 가느다란 덩굴 한 가닥이 쑥 들어갔다.

“함부로 움직이면, 이 여자는 죽을 거야.”

나는 그 말에 들고 있던 검을 다시 집어넣었다. 그네 위에 타고 있던 여자는 몸을 흔들거리며 웃었다.

“남자와 여자라. 언제나 가지고 놀기 즐거운 조합이지.”

그런 대사를 던진 여자는 내 쪽으로 살짝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은 취미생활을 하기 위해 마련한 상황이 아니거든. 애초에, 너를 강제로 저 멀리 보내는데 꽤나 많은 제물을 사용하기도 했고. 이 정도 낭비를 취미생활로 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녀의 손에는 작은 점토판이 하나 들려 있었다. 여자가 그 점토판을 던졌다.

던져진 점토판은, 정확히 내 바로 앞에 떨어졌다.

“맹세해. 너는 이 이후, 헤로스와 맺은 계약을 위협할 수 있는 그 어떤 종류의 일도 하면 안 될 거야.”

“하겠다면?”

내 말에 여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저 여자는 방금 내가 했던 말 그대로 모습이 변하겠지. 아름다운 여자가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누리던 모든 것들을 망가뜨리는 건 정말 즐겁거든.”

말을 마친 여자는 그네 위에서 다리를 꼰 채 턱을 괴고 나를 바라봤다.

“일단, 얼굴부터 망쳐줄까?”

클로에의 눈앞에, 짙은 우윳빛의 액체를 담고 있는 식물 하나가 스르륵 내려왔다. 그 끝이 뾰족한 게, 약물의 주입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 낸 식물 같았다.

그걸 조용히 눈앞에서 보고 있던 클로에가 몸을 부르르 떨더니 나를 향해 외쳤다.

“뭐 하고 있어요!? 당장 그 점토판에 서명하세요! 아니, 서명해!”

나는 그 말에 순간적으로 움찔한 다음 클로에를 바라봤다. 클로에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젠장, 당신 때문에 여기까지 끌려왔잖아요. 조금이라도 책임감을 느끼란 말이야! 내가 왜 당신 인생 때문에 여기에서 이런 꼴을 당해야 하는 건데!”

클로에의 말에는 증오와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분노와 적의를 담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한다.

“서명하라고, 당장! 이 망할 새끼야!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잖아!”

계속해서 쏟아지는 악의가 가득 담긴 말.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고 사지가 묶인 채 발악하는 클로에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집어치워. 저년은 니 맘대로 해. 이 점토판에 서명할 일은 없으니.”

말을 마친 나는 점토판을 발로 밟아 박살낸 다음, 바로 등을 돌리고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돼, 가지마! 제발, 나를 살려! 이… 이… 망할 자식아! 너는 너랑 니 엄마나 소중하게 생각할 줄 아는 거야?! 돌아와, 돌아오라고! 아니, 돌아와 주세요!”

“지랄하고 있네.”

계속해서 클로에는 그런 말을 떠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별다른 말 없이 두 사람으로부터 멀어졌다.

* * *

그네를 타고 있던 여자는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계속해서 발악하는 클로에를 바라봤다.

“이미 그 녀석은 사라졌어.”

클로에는 그 말을 듣고 나서도 잠깐 더 발악하나 싶더니 이내 숨을 몰아쉬고 대답했다.

“나도 알아.”

그 대답을 들은 여자가 혀를 찼다.

“그냥 얌전히 있었으면 마틴 레드우드가 그냥 버리고 가지는 않았을 텐데.”

클로에는 그 말에 입꼬리를 슬쩍 올리며 대답했다.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마틴 레드우드는 제국을 벗어날 당시 위험을 무릅쓰고 뱀독에 중독된 클로에를 데리고 탈출했다. 아마, 이번에도 마틴이 같은 시도를 했을 거라고 클로에도 믿고 있었다.

클로에의 대답을 들은 여자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너.”

“최소한, 이제 마틴 님은 나를 버렸다는 죄책감 같은 거에 시달리진 않겠지.”

말을 마친 클로에는 빙글빙글 웃었다.

“자, 이제 네 맘대로 해봐. 나는 더 이상 마틴 님의 걸림돌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걸로 충분해. 나는 그에게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마틴 레드우드는 그녀를 버렸다. 더 이상 클로에 로니세라가 인질이 되었다는 점이 그의 행보를 제약하지 않는다.

클로에는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고, 마틴 레드우드는 클로에가 무슨 꼴을 당하건 신경 쓰지 않고 삭풍의 족쇄를 찾을 것이다.

그거면 충분하다. 클로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한다.

방금 상황에서 클로에가 눈물 뚝뚝 흘리며 ‘마틴 님의 짐이 될 수는 없어요! 점토판에 절대로 서명하지 마세요!’ 같은 소리를 했다면 그녀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오히려 마틴의 마음을 무겁게 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마틴 레드우드가 인질로 잡힌 클로에 때문에 해서는 안 될 서명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물론, 실제로 그랬을 확률은 낮지만.”

그 남자가 그런 선택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무렴 그렇지. 클로에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클로에의 웃음을 보고 있던 여자가 몸을 부르르 떨며 대답했다.

“그래. 네년 얼굴이 피어난 웃음이 과연 언제까지 지속되나 한번 보자. 다시 경험해보지 못할 끔찍한 고통과 함께, 두 눈 뜨고는 볼 수 없는 추한 몰골을 선사해줄 테니.”

여자가 손을 움직이자, 아까의 뿌연 액체를 담고 있는 줄기가 서서히 클로에 쪽으로 다가온다.

“먼저, 그 고운 피부부터…….”

천천히 클로에에게 다가가며 말을 걸던 여자의 입에서 주륵, 하고 피가 흘러내렸다.

“안녕.”

여자는 자신의 가슴팍을 뚫고 나온 칼날을 양손으로 꽉 잡았다.

* * *

사람이, 이래서 언제나 비장의 한 수는 반드시 숨겨두어야 하는 법이다. 은신을 푼 나는 가슴에 박혀 들어간 칼을 꽉 쥔 채 확 돌리며 말했다.

“처음에, 모래로 새겨넣은 자상도 아직 회복하지 못했지?”

그 말인즉슨, 가슴을 찔려도 허허허 거리며 웃을 수 있는 불사신 같은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악마와 계약한 흑마법사라고 해도, 어쨌든 몸에 피가 흐르는 사람이다. 칼로 심장을 찔리면 죽는다.

“이… 이이이!”

녀석이 뭐라고 말하기 전에, 나는 여자의 등짝에 박아넣은 검을 쑥 뽑아내 목을 내려찍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살과 뼈를 가르는 감촉이 검을 타고 전달된다. 그리고, 잘려나간 머리가 바닥을 구른다. 피를 뿜어내던 몸통은 이내 바닥에 퍽 쓰러진다.

“죽은 건가.”

나는 그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클로에 쪽으로 뛰어올라 그녀를 묶고 있던 덩굴을 모두 잘라냈다.

“이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클로에의 말에 나는 놀리는 것 같은 어투로 대꾸했다.

“세상에, 머리가 많이 좋아진 모양이다? 감히 내 행동도 예측하려 들고.”

내 말에 클로에는 입맛을 약간 다셨다.

“그러게요. 오히려 속셈이 들켰네요. 아직 멀었나 봐요.”

“뭐, 네가 방금 한 말들이 진짜였다고 해도 구할 생각이었어.”

이 정도로 끌려다니며 개고생했으면, 빡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쨌든 내 개인 사정 때문에 고생하다가 그 꼴이 되었으니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모를까,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 방금 쏟아낸 폭언 때문에 그냥 버리고 돌아설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살려는 놓고, 그다음에 각자 제 갈 길 가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공포 속에서 본능적으로 던진 폭언 몇 마디의 대가가 지독한 고문과 흉측해진 몰골이라면 너무 과하잖아.

“뭐, 여러 가지로 형편이 좋긴 했지만.”

저 여자가 전력을 다해서 나를 추방한 이후, 땅이 바로 사막으로 변한 게 아니라 메마른 황무지로 변한 게 가장 주요했다. 모래 위에서는 제아무리 은신을 사용했다 해도 발자국을 숨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저 여자가 나를 추방하기 위해 자신이 일구어 놓은 숲을 싹 날려버린 것도 한몫했지. 그 숲 전체가 저 여자 그 자체나 다름없었으니, 은신을 사용했어도 숲속이었다면 분명 들켰을 거다.

“고생했다. 굉장한 각오가 필요했을 텐데.”

물론, 이런저런 조건들 중에서도 내가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처럼 보일 기회를 쥐여준 클로에의 연기가 가장 핵심적인 한 방을 날렸지.

“어차피 마틴 님이 살려주지 않았다면 저는 뱀에게 물렸던 숲속에서 죽었을걸요. 아니다, 죽지는 않았겠구나.”

클로에는 이파리가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말을 이었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꼴을 당했겠죠.”

우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으려니, 옆에서 그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목이 떨어진 주제에 어떻게든 아직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반쪽 얼굴 여자의 면상이 보였다.

“너희는…… 이미 졌다.”

“글쎄, 잘려나간 머리라도 다시 붙이고 그런 대사를 치는 게 어떨까?”

목이 잘린 채 그런 말을 씨부리면, 그 말을 듣고 무서워할 사람이 있기는 할까 싶은데. 여자는 낮게 웃음을 흘리다 대답했다.

“회색 서약은 절대로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내 죽음은 그 광대 놈에게 전달될 거다. 그리고, 그 즉시 녀석은…….”

여자는 하려던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짙은 유황 냄새와 함께 대지가 갈라졌다. 넘실거리는 불꽃이 갈라진 대지 너머에서 혀를 날름거리고, 달궈진 공기가 들끓는 아지랑이를 피워올린다.

여자의 시체는, 그 갈라진 틈에서 튀어나온 시뻘건 쇠사슬에 칭칭 감겨, 그 틈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우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갈라졌던 대지가 다시 서로 엉겨 붙었다.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멀쩡한 대지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없어진 건 오직 그 여자의 시체 하나뿐이다.

“나도 죽으면 저렇게 되는 건가.”

내 말에 클로에가 으음, 하는 소리를 냈다.

“끌려가는 시기가 겨울이니, 춥지는 않겠네요.”

“말 참 이쁘게 하네.”

나와 클로에는 잠깐 땅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저 멀리로 돌렸다. 아직도 휘몰아치는 모래 회오리가 우리의 눈에 들어온다. 숲속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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